여기만 오면 건강해져 약전골목

쌉싸래한 한약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몸이 금세 건강해지는 느낌이다. 시냇물이 흐르는 것처럼 인공으로 만들어놓은 작은 도랑 주변으로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발을 담그고 있다. 양말까지 벗은 맨발 상태다. 발을 담근 물은 황토 빛. 쌉싸래한 한약 냄새는 여기서 난 냄새였다. 제법 오래 앉아있었던 사람들은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되어 있다. 친구들과 혹은 가족 끼리 발을 담그고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약전골목 중간에 들어선 대구약령시 한의약박물관에서는 무료로 족욕 체험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족욕을 하는 것이 싫다면 박물관 안에 들어가서 5천 원을 주고 개인욕탕을 이용해 족욕을 할 수 있다. 대구 근대골목 투어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니 이곳에서 족욕을 하며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을 듯하다.
한의약박물관은 2009년 한의약문화관으로 개관했다가 2011년 한의약박물관으로 승격됐다. 보통의 박물관은 어두침침하고 지루한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이지만 한의약박물관은 다르다. 족욕 체험을 비롯해 한방비누 만들기와 한방 립밤 만들기, 한방차 시음하기 같은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 신선한 재미를 얻어갈 수 있다. 한번 둘러보면 대구의 한의약 역사를 꿰뚫어 볼 수 있다. 1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기록 자료, 사진 자료와 함께 한약방 내부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고 있다.


대구약령시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약령시로 2001년 한국기네스북에 등재됐다. 약령시는 약 350년 전 조선 효종(1649~1659)때부터 경상감영 안 객사 주변에서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열렸던 시장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했는데 약재 수급이 궁궐에서조차 힘들어지자, 임금이 약재 수급이 좋고 교통도 편리한 대구에 영시를 열라 명령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 약령시는 경상감영 앞 1000평 정도의 마당에서 열렸다. 그러나 1895년에 조선 8도제가 사라지면서 경상감영이 없어지고 약령시를 관장하던 행정도 없어졌다.


그래서 늘 열던 약령시를 옮겨서 열어야 할 상황에 놓였다. 이 때 주민들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대구 읍성 안에 살던 한약재 취급자들이 서로 자기들이 사는 곳 주변에 시장을 열자고 주장했던 것이다. 남쪽에 살던 사람들은 남성로에 열자고, 북쪽에 살던 사람들은 북쪽에 열자고 주장했다. 그러다가 남쪽 사람들이 시장을 옮기는 데 필요한 돈 1000원(현재 돈으로 7200만원정도)을 부담하기로 하면서 지금의 남성로 일대로 이전이 결정됐다. 이후 약령시가 점점 자리를 잡아가면서 서문로와 동산동 일때까지 범위가 넓어졌다.


구한말 대구약령시에는 전국에서 만 명가량이 몰려들었다. ‘영(令) 바람 쐰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단다. 또 아무리 좋은 약재라도 ‘대구 영 바람 안 쐬면 약효가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약령시가 유명해 이북 원산이나 함흥 등지에서 생산한 약재를 대구약령시에 가지고 왔다가 다시 생산지로 실어 가는 해프닝이 벌어졌다고 전해진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대구약령시에는 다양한 이야깃거리가 숨어 있다. 그 중 약방을 가업으로 여기며 대를 이어 운영하는 곳을 방문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약령시 서문 쪽에 있는 ‘광신한약방’은 3대 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3대 주인 75살 이용식 씨는 할아버지 이기영 옹이 1920년대 초 ‘제화당한약방’을 시작한 뒤 부친 이태진 옹에 이어 한약방을 지키고 있다. “어릴 때 기억으로 약령시장이 문을 열기도 전에 새벽부터 약재를 팔거나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할아버지 한약방은 늘 사람들이 북적북적 댔고요. 내가 이어받아서 운영할 때는 점심식사를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어요. 대구가 한약 집산지니까 전국에서 모여들어서 전부 여기서 사고 여기서 팔고 했기 때문에 바빴죠.”


이씨가 한창 바쁘게 일하던 1970년대에는 약령시 안에 한약방과 약재상이 1000곳이 넘었다고 한다. 또 여기서는 소중한 골동품을 구경할 수 있다. 1대 할아버지와 2대인 아버지가 대를 이어 고약을 제조하던 ‘백통 양재기’와 1대가 직접 쓴 처방전인 ‘화제(和劑) 모음집’, 그리고 낡은 약 저울과 약 보관 서랍, 주판 등이다. 이 씨의 조부가 사용했던 백통 양재기는 고약을 만들다가 그대로 둔 탓인지, 고약 속에 작은 방망이가 꽂힌 채 굳어 있다. 손바닥만 한 찌그러진 그릇은 박물관에서 금방 튀어나온 것만 같다. 약 보관 서랍은 현재 사용하지 않지만 약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신주단지 모시듯 세워놓았다. “이 약장에 저희 한약방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어른 허벅지 높이만큼의 아래쪽 약장은 조부가 사용하시던 것입니다. 100년 쯤 됐습니다. 그 위에 덧대어 올린 것은 선친이 사용하셨던 60~70년 된 약장입니다. 또 그 위에 다시 서랍을 올려서 비슷한 색을 칠해놓은 것은 제가 쓰던 것입니다. 40년 이상이 되었네요.”라며 세월이 켜켜이 쌓인 귀한 물건을 소개했다.


3대 째 운영하고 있는 또 다른 한약방 ‘중앙한약방’에는 한방 가족박물관이 있다. 박신호 씨는 할아버지가 사용한 80년이 넘은 유품들을 모아 가족박물관을 만들어 일반에 개방하고있다. 한약 저울을 비롯해 약재를 빻는 주발, 한방 글귀와 한시 등이 적힌 병풍이 남아 있다. 박씨의 할아버지는 1926년에 한약방을 열었다. 현재 박씨의 아버지 박재규 씨가 한약방을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는데 아들인 박신호 씨가 다시 물려받기 위해서 일을 배우고 있다. 박씨는 경영학을 전공했다. 1988년 대학 졸업 후 게임회사에서 10년 정도 근무했다. 그러나 가업을 물려받았던 형이 작고하는 바람에 형을 대신해 자신이 가업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 아버지 박재규 씨는 그런 신호 씨가 기특하다. “아들이 가업을 잘 알고 그 역사를 잘 아니까 다른 것을 하다가 그만 두고 왔어요. 여기에 와서 가업을 잇겠다고 하니까 기특하고 좋지요.”
1000여 개 점포가 즐비했던 1970년대와는 달리 지금은 점포가 150여 곳으로 줄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구, 경북 사람들은 한약재를 살 때 대구약령시를 먼저 떠올리고, 이곳을 먼저 찾는다. 또 대구약령시에서는 전국 유일의 한약재 경매가 열리는데, 약령시 사람들은 이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농수산물도매시장처럼 거창하게 펼쳐지지는 않지만, 대구약령시 도매시장에서는 매달 4번 정도 한약재 경매가 열린다. 상인 20~30명이 모인 가운데 한, 두 시간 만에 끝이 난다. 도심에서 벌어지는 생경한 풍경이 꽤 볼 만 하다. 또 지난 1978년부터 약전골목에서는 해마다 대구약령시 축제가 열리고 있다. 약재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관광객들까지 전국의 이목이 이곳에 쏠린다.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축제를 보기 위해 대구를 방문할 정도다.


3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구약령시, 즉 약전 골목은 변화무쌍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도 꿋꿋하게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그게 다 골목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는 약전 골목 사람들 덕분이다.


S.CAS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