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하 유럽 여행이야기
유럽 작은 도시를 걷다가 깨달은 소중한 생각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답다
못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 날은 ‘내가 정말 못생겼나?’ 하고 거울을 자주 본다거나 왠지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기가 꺼려졌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날 문득 나는 생각했다. 나와 너는 엄청난 우연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고귀한 존재이다. 하지만 동시에 명동거리만 나가보아도 발에 챌 정도로 많은 평범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고민했다. 나란사람은 특별한 것일까 평범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내가 다 그렇지 뭐….'를 입에 달고 살며 사람들에게 이리 채고 저리 채여도 집에만 가면 '우리 아들'하고 나를 안아주는 부모님이 계시니 말이다. ‘여러분은 소중하고 특별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알바몬을 뒤적거리는 나를 보고 있자면 그다지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는 아닌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반년간 유럽에 있으며 유럽풍의 건축물들을 눈이 닳도록 보았다. 동유럽의 아기자기한 건물들부터 서유럽의 웅장한 건물들까지. 이제는 질릴 법도 한데 언제 어디서 봐도 매번 두 눈을 만족하게 한다. 나에겐 이렇게나 아름다운 건물인데도 누군가는 다들 똑같아 이제는 질린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또 누군가는 손으로 직접 건물을 만지며 이것좀 보라고 내 팔을 잡아당겼던 일이 떠오른다. 에펠탑과 같은 건축물도 있지만, 반대로 비슷한 모습들 속에 그 차이와 가치를 알아주는 이를 기다리는 평범한 건물들도 있었다.
유럽의 시골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투박하고 조악하기 그지없지만, 각각의 이야기가 있는 그런 집들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모두 같아 보이지만 사실 제각기 다른 그런 집들. 그런 집들이 있는 길을 걷고 있노라면 묘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기에 많은 사람이 찾아오진 않지만 그래도 네가 와주었잖아. 네가 와서 사진을 찍고 아름다움을 느껴주었잖아. 그걸로 족해.’ 하고 속삭이는 듯 하다. 그곳의 공기를 맡고 있자면 그런 기분이 든다.

여행을 하다 보면 타인과 나 사이 흐릿했던 경계가 뚜렷해진다. 세상과 타인 그리고 나라는 존재들이 내 안에서 자리를 잡아갈 때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우리'라고 부르는 '너'는 비슷비슷하게 살아가지만 (그래서 유사성에서 오는 안도감을 느끼거나, 특별해보이는 이들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하며 위로받지만) 결국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살아온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을 하는 '타인'이었던것이다.
결국 ’판단'이라는 것은 우주에서 보면 먼지에 불과하지만 먼지에서 보면 우주에 가까운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내리는 불완전한 행위이다. 나라는 사람이 소중할 수도, 소중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나에 대한 타인의 판단은 그럴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경험 속에서 살아온 네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나에게 함부로 내리는 평가이니 말이다.

‘나’라는 건물을 짓고 나니 아쉽게도 에펠탑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좌우에 있는 건물들과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소박한 녀석이었다. 때로는 그 '소박함'이 주는 무료함에 화가 나기도 하고 특별하지 못하다는 사실 때문에 우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잠시 눈을 돌려보니 누군가는 이 보잘 없는 벽돌들 안에서 추위를 피해 손을 녹였고 잠을 청했다. 나름대로 나도 쓸모 있는 녀석이었던 거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어떤 건축물로 비칠지가 아니라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느냐였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불완전한 평가들 사이에서 좌절하지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얘기에 더 귀를 기울였을 텐데. 그렇다면 좀 더 사는 게 재밌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글 김동하
에스카사 편집부
김동하 유럽 여행이야기
유럽 작은 도시를 걷다가 깨달은 소중한 생각 세상 모든 것은 아름답다
못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온종일 기분이 좋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 날은 ‘내가 정말 못생겼나?’ 하고 거울을 자주 본다거나 왠지 다른 사람 앞에 나서기가 꺼려졌던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날 문득 나는 생각했다. 나와 너는 엄청난 우연으로 세상에 나오게 된 고귀한 존재이다. 하지만 동시에 명동거리만 나가보아도 발에 챌 정도로 많은 평범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난 고민했다. 나란사람은 특별한 것일까 평범한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내가 다 그렇지 뭐….'를 입에 달고 살며 사람들에게 이리 채고 저리 채여도 집에만 가면 '우리 아들'하고 나를 안아주는 부모님이 계시니 말이다. ‘여러분은 소중하고 특별해요.’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알바몬을 뒤적거리는 나를 보고 있자면 그다지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는 아닌 거 같은 기분이 든다.
반년간 유럽에 있으며 유럽풍의 건축물들을 눈이 닳도록 보았다. 동유럽의 아기자기한 건물들부터 서유럽의 웅장한 건물들까지. 이제는 질릴 법도 한데 언제 어디서 봐도 매번 두 눈을 만족하게 한다. 나에겐 이렇게나 아름다운 건물인데도 누군가는 다들 똑같아 이제는 질린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또 누군가는 손으로 직접 건물을 만지며 이것좀 보라고 내 팔을 잡아당겼던 일이 떠오른다. 에펠탑과 같은 건축물도 있지만, 반대로 비슷한 모습들 속에 그 차이와 가치를 알아주는 이를 기다리는 평범한 건물들도 있었다.
유럽의 시골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투박하고 조악하기 그지없지만, 각각의 이야기가 있는 그런 집들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모두 같아 보이지만 사실 제각기 다른 그런 집들. 그런 집들이 있는 길을 걷고 있노라면 묘하게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기에 많은 사람이 찾아오진 않지만 그래도 네가 와주었잖아. 네가 와서 사진을 찍고 아름다움을 느껴주었잖아. 그걸로 족해.’ 하고 속삭이는 듯 하다. 그곳의 공기를 맡고 있자면 그런 기분이 든다.
여행을 하다 보면 타인과 나 사이 흐릿했던 경계가 뚜렷해진다. 세상과 타인 그리고 나라는 존재들이 내 안에서 자리를 잡아갈 때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우리'라고 부르는 '너'는 비슷비슷하게 살아가지만 (그래서 유사성에서 오는 안도감을 느끼거나, 특별해보이는 이들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하며 위로받지만) 결국엔 전혀 다른 경험을 하고 살아온 종잡을 수 없는 생각을 하는 '타인'이었던것이다.
결국 ’판단'이라는 것은 우주에서 보면 먼지에 불과하지만 먼지에서 보면 우주에 가까운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내리는 불완전한 행위이다. 나라는 사람이 소중할 수도, 소중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나에 대한 타인의 판단은 그럴 수도 혹은 아닐 수도 있다. 나와는 전혀 다른 경험 속에서 살아온 네가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나에게 함부로 내리는 평가이니 말이다.
‘나’라는 건물을 짓고 나니 아쉽게도 에펠탑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좌우에 있는 건물들과 다를 바 없는 그저 그런 소박한 녀석이었다. 때로는 그 '소박함'이 주는 무료함에 화가 나기도 하고 특별하지 못하다는 사실 때문에 우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잠시 눈을 돌려보니 누군가는 이 보잘 없는 벽돌들 안에서 추위를 피해 손을 녹였고 잠을 청했다. 나름대로 나도 쓸모 있는 녀석이었던 거다.
결국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 어떤 건축물로 비칠지가 아니라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사랑해주는 사람과 함께 있느냐였다.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불완전한 평가들 사이에서 좌절하지 않고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얘기에 더 귀를 기울였을 텐데. 그렇다면 좀 더 사는 게 재밌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글 김동하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