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SANTIAGO CHILE


산티아고는 만년설이 덮인 안데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일교차는 크지만 적들의 침입을 막기에 지리적 이점이 크다. 16세기 아우라칸족을 몰아낸 발디비아 장군이 산티아고를 칠레의 중심으로 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지금도 비냐 델 마르로 가는 인공 터널만 없으면 육로로 침공하기엔 쉽지 않은 곳이다. 발디비아는 스페인 장군이었지만 칠레 독립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의 동상이 산티아고의 중심인 아르마스 광장에 세워졌다. 


남미 사람들의 색다른 점 중 하나는 식민지배를 당했지만, 그들을 지배한 스페인에 대한 적대감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스페인이 들어와서 자신들의 문명화를 앞당겼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한일 관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토 히로부미 동상이 서울 명동에 세워져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남미는 케세라 세라(될대로 되라)다. 그런 것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수도로 만들어 총독부 건물을 세워준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식민통지치절 총독부 건물은 산티아고의 산타루시아 언덕에 지어졌다. 지금은 시민들의 산책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국가적인 중대 행사엔 대규모 만찬도 행해진다고 한다.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역사의 잔재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에 대한 해석은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지만 낯선 모습임엔 틀림없다. 아무튼 산티아고는 칠레의 정치, 경제, 행정기관이 모두 집결해 있는 명실상부한 수도다.


다만 국회는 산티아고에서 두 시간 거리인 발파라이소에 있다. 사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지방분권화가 일찍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그렇지 않다. 1974년부터 1990년까지 장기 집권했던 피노체트가 정치인들이 보고 싶지 않다며 발파라이소로 가서 ‘떠들라’고 옮겨 버린 것이 정설이다. 물론 국회의사당 건립은 1991년이지만 그전에 이미 모든 작업이 이뤄진 것이다. 유네스코에서 200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할 만큼 아름다운 건물이지만, 그 이면을 알고 나면 헛웃음만 나온다. 물론 한편으로는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있지만. 정치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칠레는 현재 바첼레트란 이름의 여성 대통령이 2번째 대권을 잡고 있다. 중도좌파다. 두 번째란 것은 연임이 아니라 재임(전전 대통령)을 의미한다. 


칠레는 피노체트 독재 이후 대통령 연임이 안 된다. 칠레를 비롯한 남미 상당수 나라는 선거권 행사에 강제성을 동원한다. 즉, 투표를 하러 가기 전 사전신고를 하고 그날 가지 못하면 과태료가 부과된다. 아르헨티나는 자주 투표에 빠지면 해외여행도 제한을 받는다. 또 투표 전날은 주류판매가 금지되고 3명 이상 모이는 행사가 금지된다. 이런 강제력에도 투표율은 저조하다. 이것도 ‘케세라 세라’인지는 모르겠다.




산티아고가 한눈에 보이는 후니쿨라를 타고

산티아고에 가면 누구나 찾는 곳 중 하나가 바로 산크리스토발언덕이다. 산티아고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으로 마리아상이 그 중심에 있다. 홍콩의 피크트램과 비슷한 후니쿨라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거나 자동차로 갈 수 있다. 물론 시간은 걸리지만 걸어서 가는 사람도 있다. 케이블카에 내리면 마리아상으로 갈 수 있는 계단이 있다. 계단을 모두 오르면 야외에서 미사를 볼 수 있는 무대가 있고, 그 정중앙을 따라 눈을 돌리면 마리아상이 산티아고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오른쪽 옆에는 성당이 있다. 성당 옆으로는 각종 크고 작은 십자가들이 늘어선 곳이 있다. 십자가의 길이다.


참회하면서 걷는 길인 십자가의 길 아래로는 남미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 포함된 4개 건물의 집합체인 코스타네라가 보인다. 코스타네라는 산티아고 중심 상업 지역에 있으며 네 건물 중 가장 높은 것은 아르헨티나 출신 건축가 시저 펠리가 설계했다. 높이는 300m로 62층이다. 남미에서 가장 높으며 남반구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골드 코스트의 322m 짜리 Q1 빌딩 다음으로 높다. 건물 일부의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이다. 다만 건물 아래층 상가엔 대형 쇼핑몰과 백화점이 이미 들어서 있다. 쇼핑을 하러 온 사람들은 한눈에 봐도 중산층 이상임을 알 수 있다.



코스타네라 건너편에는 볼리비아 대사관이 있다. 남미 국가 중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비자를 받아야 입국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볼리비아다. 입국일로부터 한달간 유효하며 연장도 가능하다. 2010년에만 해도 아침에 가서 바로 받았는데 이번엔 오후 4시에 오라고 한다. 최근엔 다음날 받으러 오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영사가 이런저런 질문들을 하더니 이전에 찍혔던 비자도장을 보고 그때 담당자가 참 재미있는 친구였다고 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다음날 또 오기가 뭣해서 볼리비아에 대해 좋은 기사 쓰려고 간다했더니 옆에 있던 직원에게 ‘라피도(긴급)’라고 하며 서류를 건네준다. 엄지손가락을 척 올려주고 나왔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스승과 제자

2015년 11월 칠레 정부는 이례적으로 파블로 네루다가 타살당했을 가능성을 인정했다. 지금까지 전립선암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네루다는 피노체트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를 거세게 비판하다 출국 예정일 하루 전 갑자기 숨졌다.


파블로 네루다. 칠레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다. 칠레는 또 한 명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있다.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다. 미스트랄은 교사 로서 네루다를 테무코에서 가르쳤다. 어린 네루다가 찾아오면 톨스토이, 체호프 등 러시아 문호들의 글을 보여주면서 창작열에 불을 지폈다. 미스트랄은 1945년 남미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됐으며 네루다는 사망하기 2년 전인 1971년 상을 받았다. 스승과 제자가 나란히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이다.


네루다박물관은 산티아고 중산층 거주지역인 프로비덴시아 베야비스타 야트막한 언덕에 있다. 박물관이라고는 하지만 그가 살던 집을 이어폰에서 나오는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는 것이어서 한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가지 못한다. 박물관에는 그가 사용하던 모든 집기에서부터 선물로 받은 그림이나 조각 등이 생전 모습 그대로 전시돼 있다. 네루다를 기념하는 공간은 이곳을 제외하고도 발파라이소 등 3곳이 더 있다. 공산주의자로서 대통령에도 추대될 정도로 현실참여형 시인이었지만 가슴 따듯한 사랑 시를 많이 쓴 시인이기도 하다. 그의 스승이었던 미스트랄은 라 세레나에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작은 시골 마을 비쿠냐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가 집을 나가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15세의 나이에  교사가 돼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한인들의 삶의 터전, 칠레판 동대문 시장

칠레 이민은 옆 나라인 아르헨티나에 비해 조금 늦은 편이다. 아르헨티나가 지난해 대대적인 공식 이민 50년 기념식을 가지면서 오래된 이민 역사를 자랑한데 비해 칠레는 50년까지 14년이 남았다. 한국에서 바로 넘어온 사람들도 있지만 한때 남미 이민하면 떠올렸을 정도로 많은 교민이 살았던 파라과이나 아르헨티나에서 온 이주이민자도 상당수다. 하지만 아르헨 티나 교민이 3만 5천 명 정도인데 반해 칠레는 주재원까지 합쳐 2천 500여 명 내외로 숫자가 많지 않다. 게다가 2년 전부터는 이민 오는 이들의 발길이 끊겼다고 한다. 칠레판 동대문 시장으로 한국인들의 삶의 터전인 파트로나토의 경기가 예전만큼 못하기 때문이란 것.


산티아고 레콜레토 ‘라 베가(대규모 청과시장)’ 건너편에 위치한 파트로 나토는 한집 건너 하나가 이민교포들의 가게라고 할 정도로 한국인들이 많다.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7시 30분까지 의류, 원단, 가방, 모자 등을 파는 가게엔 소매는 물론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도매상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교민들은 1년에 3, 4차례 중국에 가서 물건을 대량으로 주문 하고, 오는 길에 유럽이나 미국에 들러 새로운 트렌드를 공부하기도 한다.


문 닫을 정도는 아니지만 가게세가 워낙 비싸 교민들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다. 급지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한달에 우리돈 500만 원에서 1천만 원 정도의 임대료를 내야한다. 2년이나 3년 계약을 해도 물가와 연동해 세가 오르기 때문에 실제 임대료는 책정된 금액보다 항상 웃돌 수 밖에 없다. 문제는 가게를 사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는 것, 아니 팔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세계의 주요 상권에 있는 건물 주인이 그렇듯 파트로나토 역시 건물주 대부분이 유태인이기 때문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팔 이유가 없는 것이다. 유태인의 돈버는 순서인 ‘토지매입-건물신축-임대-토지물색’ 그리고 다시 토지매입을 하는 방식으로 자산을 불려나가는 곳 중 하나가 파트로나토다.


현재 남미의 유태인들은 임대수익에서 나아가 귀금속, 부동산업 전반으로 업종을 다양화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파트로나토의 이민 1세대 교민들에 이어 1.5, 2세대 교민들의 새로운 창업도 서서히 시작되고 있어 이들의 상권 장악력이 어느 정도에 이를지 주목받고 있다.


글 김승근 여행 칼럼니스트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