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함께 하는 근대골목

문학과 함께 하는 근대골목

▲ 계산 예가 (사진 출처 = 본사 취재)

직접 연필이나 펜을 들고 손편지를 써 본 지 얼마나 됐을까? 휴대전화 문자메시지, SNS, e-메일이 아닌 진짜 편지 말이다. 대구 근대골목 계산예가에 가면 빨간 우체통 하나가 있다. ‘느린 우체통’. 이 우체통에 엽서를 넣으면 1년 뒤 적힌 주소지로 엽서가 배달된다. 이상화, 서상돈 고택과 계산예가를 방문하는 관광객 중에 빨간 우체통의 매력에 이끌려 펜을 집어 드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참으로 낭만적인 발상이다. 

(▲사진 출처 = 본사 취재)

글로써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문학가 가운데는 대구 출신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시인 이상화이다. ‘대구근대골목’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이상화 고택에 가면 그의 숨결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이상화 고택은 실제로 그가 살았던 집이다.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살았던 터전이다. 암울했던 일제강점기에 민족의 광복을 위해 저항정신의 횃불을 밝힌 시인의 넋이 남아있는 곳이다. 이상화 고택 마당에 들어서면 반가운 시비가 우리를 반긴다. 그의 대표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전문을 담은 비석이 있다. 이 시는 1926년 『개벽』 6월호에 발표되었다. 일제 식민지 치하에 발표된 대표적인 저항시이다. 이상화 시인의 날카로운 현실 감각이 돋보인다. 

▲이상화 시인(사진 출처 = 본사 취재)

이상화는 1901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3년 수료하고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 학생시위운동을 지휘했다. 처음 문학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 백기만 이상백 등과 함께이다. 1922년에는 문예지 『백조』의 동인이 되어,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나의 침실로’, ‘이중의 사망’ 등을 발표했다. 1937년에는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던 장군인 형 이상정을 만나러 중국에 다녀왔다가 일본 관헌에 3개월 동안 구금되기도 했다. 그 뒤 3년 동안은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했지만 43세에 집에서 숨을 거뒀다. 사인은 위암이었다. 그의 시비는 1946년 시인 김소운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3.1 만세운동길은 현진건의 길이라고도 불린다. (사진 출처 = 본사 취재)

근대골목 코스를 따라 3.1만세운동길에 접어들면 대구 출신 소설가 빙허 현진건이 떠오른다. 실제로 90계단의 3.1만세운동길은 ‘현진건의 길‘이라고도 불린다. 그 배경은 이러한 일화로 설명할 수 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금메달을 딴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시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는 일장기를 매달고 있었지만,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신문에 실으면서 가슴에 단 일장기를 지웠다. 일면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 사건’. 그 때 동아일보 사회부장이 바로 현진건이었다. 


현진건은 ‘자신이 뒷일을 책임지겠다고.’고 호언하며 이 사건을 주도했다고 전해진다. 그 뒤 일본은 동아일보를 폐간시켰고, 현진건은 옥살이를 해야 했다. 일제에 항거한 현진건의 고귀한 정신을 기려서 3.1만세운동길에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현진건은 1900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대구 우체국장이었던 현경운의 4남이다. 구한말 득세한 개화파 집안 출신이라 할 수 있다. 1920년 『개벽』에 ‘희생화’를 발표함으로써 문필활동을 시작했고, 1921년 ‘빈처’와 ‘술 권하는 사회’를 발표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또 같은 해 조선일보사에 입사함으로써 언론계 첫발을 디뎠다. 그 후 시대일보를 거쳐 동아일보로 옮겼고, 일장기 사건 때문에 사직한 뒤에는 소설 창작에만 매달렸다. 가난한 삶을 이어갔지만 친일 문학에 가담하지 않고 지내다가 1943년 장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월간 에스카사 /  www.STORY-CASA.com

글 권윤수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