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 아일랜드 부부, 노시화 & 팀 쉐이
그들만의 특별한 러브 스토리 6년만의 결혼식으로 꽃을 피우다

지난 11월 5일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의 보호구역인 메인주 인디언 아일랜드(Penobscot)에서 조금 특별한 결혼식이 열렸다. 신부는 뉴욕에서 무용수로 활동했고 현재는 메인주 뱅고시에서 탱고와 태극권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45세의 한인 노시화씨이고 신랑은 인디언 인권보호자이자 돌 조각 아티스트인 62세의 팀 쉐이(Tim Shay)씨이다.
이들에겐 인디언 이름인 ‘천둥 노래’, 한국 이름‘환희’인 6세 아들 찰리가 있다. 부부의 적지 않은 나이 차이도 놀랍지만, 더 흥미로운 사실은 남편 팀이 이미 2번 결혼했던 경험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자녀, 손주까지 있다는거다. 마산에서 태어난 한국인 여성이 어떤 인연으로 이런 ‘범상치 않은’ 경력의 인디언 남성과 사랑에 빠져 뒤늦은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일까? 한국의 종편 TV 조선의 프로그램 <사랑은 아무나 하나> 제작진은 결혼식1주일 전부터 이들 부부의 결혼 준비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SCASA도 그들의 감동적인 결혼식을 방송팀과 함께 현장에서 지켜볼 기회를 얻었다.

티피(Tipi) 세러모니가 맺어 준 인연- 인디언 텐트에서의 첫 만남
노시화씨 가족이 LA로 이민 온 것은 1987년이다. 3남매의 막내였던 시화씨는 당시15살. 전형적인 1.5세인 셈이다. 불과 몇천 달러 정도의 돈을 갖고 미국에 온 가족은 햄버거 가게를 시작했다. 밤낮으로 일에만 몰두하며 10년 정도 사업을 하면서 제법 돈이 모였다. 힘든 미국 생활에 지쳤던 부모는 고향인 마산에서 숙박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역이민을 했다. 하지만 이미 UC 어바인을 졸업하고 무용수의 길을 걷고 있던 시화씨는 한국이 아닌 뉴욕으로 왔다. 그녀가 정착한 곳은 퀸즈 서니사이드였다.
시화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을 따라 학원을 옮겨 다니며 무용을 배우고, 밤에는 서빙 등 파트타임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기회가 되는 무대는 어디라도 섰다. 그러다가 큰 무대를 앞둔 시점에서 연습 중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회복이 된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몸이 돌아올 수 없는 상태였다. 전업 댄서의 길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시화씨는 생활을 위해 차선을 생각했다. 무용으로 단련된 몸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타이치(태극권)를 배우고 강습을 시작했다.
무용수의 꿈은 좌절되고, 가족과 친구가 없는 뉴욕에서 강습으로 힘겹게 살아가며 시화씨의 몸과 마음은 갈수록 지쳐갔다. “TV에서 한국 드라마를 볼 때 친구들끼리 술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 내가 직접 겪어보지도 못한 모습인데도 갑자기 참기 힘든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시화씨는 말했다. 그러던 2005년, 시화씨가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참석한 것이 ‘티피 세러모니’였다.
‘티피 세러모니’는 인디언들의 전통 텐트 가옥인 티피(Tipi) 안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밤새도록 기도와 대화를 하고 차와 담배를 나누는 영적인 의식이다. 태극권을 연마하며 기와 영적인 에너지의 중요성을 체험하던 시화씨는 티피 세러모니가 준 경험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미래의 남편인 팀 쉐이를 처음 만났다. 시화씨는 “당시 팀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었고 게다가 그 사람은 아내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둘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사이로 헤어졌다.
노시화의 이야기- 팀은 마음이 넓은 사람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4년 후인 2009년. 역시 뉴욕주 업스테이트에서 열린 티피 세러모니에서였다. 그 기간 큰 변화가 있었다면 팀이 이혼하고 싱글이 된 상태였고, 변화가 없던 것은 시화씨의 여전히 외로운 뉴욕 생활이었다. 세러모니를 마치고 팀이 시화씨에게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말한다. 시화씨는 많이 놀랐다.
“팀이 거주하는 메인은 세러모니 장소에서 8시간 운전해야 하는 거리였어요. 저는 브루클린에 살고 있었고요. 집과 반대 방향으로 4시간을 더 운전해야 하는 수고를 해주겠다는 것이니 나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팀은 이후 8시간 이상의 운전을하며 시화씨를 만나러 뉴욕에 왔다. 공교롭게도 팀 역시 타이치를 매일 수련하고 있었다. 티피 세러모니와 타이치는 두 사람을 엮어 준 주요한 고리였다. 무엇보다 시화씨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팀의 넉넉한 성품이었다.
“내가 힘들고 외로웠을 때 인내심을 갖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 준 사람이에요. 내가 보고 싶으면 외국에 가는 시간인 8시간, 10시간을 마다치 않고 보러 와주었고요. 가진 건 많지 않지만 늘 사물의 본질을 보려고 노력하고, 당장 어려움에 굽히지 않고 멀리 보며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게 잘될 거라며 나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거죠.”
누구나 자신이 힘든 시기에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줄 수있다. 뉴욕에 혼자 살면서 힘들었던 그녀에게 팀은 단순히 ‘적절한’ 시기에 나타났던 사람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삶의 방식 (Way of Life)은 그녀와 같았다. 이런 그를 보며 시화씨는 ‘내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팀의 이야기 - 시화는 내면이 강한 여자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보호 지역 내 많은 인디언처럼 너무 무미건조하고 순탄해서 삶의 의미를 쉽게 찾지 못했다. 정부의 보조금으로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주류로 나아가 큰 꿈을 펼칠 기회는 적었다.
그들의 조상은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고 하늘과 땅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넓고 크게 생활했었다. 그 조상들이 대륙에 이주한 백인들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은 후 이제는 제한된 공간과 제한된 선택만이 주어지는 삶이 인디언의 운명이었다. 팀은 “어린 시절의 나는 알코올에 의존했고 폭력적이었고 많은 사고를 쳤던 문제아”라고 고백했다. 그는 같은 마을 인디언 여성과 이른 나이에 결혼해 두 명의 딸도 낳았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와 아내 모두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었다. 결국, 아내는 술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결혼을 하고 다시 한 명의 자녀를 얻고 나서는 조금 안정을 찾았다. 그는 뉴멕시코에 있는 인디언 아트 스쿨에서 조각을 배웠었다. 중년이 된 그는 돌을 조각하는 일에 전념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40대 중반에 티피 세러모니를 접하게 되었다. “인디언이라면 누구나 이런 종류의 의식을 어려서부터 익히며 자라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40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티피 세러모니를 본 적도 없어요. 뉴멕시코에서 여성이 지도하는 의식에 참석한 뒤 비로소 나의 근본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모든 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기도를 드리는 자리입니다. 나무와 물과 땅과 불, 모든 자연이 결국 하나이고 모든 삶의 근본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2005년의 한 세러모니에서 아름다운 동양인 여성을 만나 첫눈에 반했다. 작은 체구에서 강한 기운과 밝은 빛이 나오는 것 같은 그 여인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연락처도 없고 다시 만날 기약도없었다. 두 번째 부인과도 이혼한 뒤 얼마 뒤에 다른 세러모니에서 그여인을 다시 만났다. 그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왜 시화씨에게 반했냐는 질문에 그는 짧게 대답했다. “시화는 정말 아름답고 내면이 강한 여자였으니까요. 저는 그걸 느꼈어요”
어린 아들의 부탁- 엄마 아빠 결혼하세요
두 사람이 만나고 1년 뒤 시화씨는 임신을 했다. 뉴욕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도 잠시 생각했지만 결국 인디언 마을로 들어가기로 했다. 태어날 아이를 위한 선택이었다. 마을에 제대로 된 거처를 얻기 전, 두 사람은 창고와 마찬가지인 팀의 작업실에서 몇 달을 지냈다. 몸을 눕힐 침대는 있었지만 조각 중인 돌들이 널려 있고 화장실 마저 없는 공간이었다.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하는 임산부 시화씨는 급한 대로 양동이를 사용했고, 팀은 아침마다 양동이를 갈았다. 그는 “곧 집이 생길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아이가 태어나기 정확히 2주 전에 집을 얻었다. 아들 찰리가 태어났다. 엄마는 아들에게 ‘환희’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줬고 아빠는 인디언 말로 ‘천둥소리’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제는 한국의 부모에게 알려야 할때가 왔다. 시화씨는 보수적인 경상도 부모 밑에서 막내딸로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특히 엄마 박덕조 여사는 뉴욕에서 혼자 사는 딸이 늘 걱정이었다. 시화씨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이혼을 두 번이나 한 인디언 남성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차마 부모에게 하지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부모님이 LA에 있는 큰 오빠 집에 왔을 때, 시화씨는 팀과 어린 찰리를 부모님에게 소개했다. 기절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딸을 빼닮은 찰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정엄마는 “아이까지 있는데 어찌하겠노.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면 셋이서 잘 살아라”고 만 했다.
물론 그때 시화씨 부모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화씨의 아버지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다) 시화의 기대만큼 인디언 마을에서 찰리는 밝고 건강하게 컸다. 말 그대로 자연을 벗 삼으며 도시의 아이들은 겪어 보지 못할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 (시화씨 부부의 집에서 찰리를 처음 봤을 때 아이는 쌀쌀한 늦가을 날씨에도 반소매 차림과 맨발로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몇 달 전 6살이 된 찰리가 갑자기 말했다. “엄마 아빠가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인디언들은 아이가 생기면 결혼식 없이 그냥 평생 사는 경우가 많다. 팀도 정식 결혼식을 해본 적이 없다. 어린 찰리가 결혼이란 개념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부모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시화씨가 몇 번을 물어봐도 아들의 대답은 늘 “그냥”이었다. 두 사람은 아들의 바람대로 동거 6년 만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1박 2일의 결혼식 - 한번은 신에게, 한번은 주 정부에게
노시화와 팀 쉐이의 결혼식은 토요일인 11월 4일 해 질 녘에 시작해서 5일 해 질 녘에 끝났다. 꼬박 하루가 걸린 셈이다. 토요일 진행된 티피세러모니는 ‘신에게 드리는 결혼 신고’이며 일요일 결혼식은 ‘합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주 정부에 신고’한 것이었다.
티피 세러모니와 결혼식이 열린 장소는 마을회관 격인 ‘니베준(Nibezun) 센터’ 내 마당과 마굿간이었다 (원래 야외 결혼식을 계획했지만 추운 날씨 탓에 실내로 옮겼다). 팀과 인디언 동료들은 결혼식에 앞서 센터 마당에 5m 기둥 12개를 박고 천을 둘러 티피를 설치했다.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불을 지피기 위한 장작은 팀이 이미 며칠 전부터 차곡차곡 준비했다. 박덕조씨도 도착해 딸과 함께 잔치 음식을 준비했다. 인디언들이 즐기는 무스(큰 사슴) 고기와 야생 칠면조 고기가 들어간 잡채와 만둣국과 양배추 김치를 만들었다.
딸의 결혼식 음식을 만드는 친정엄마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착잡했지만, 손자를 볼 때마다 여느 할머니와 다를 바 없는 인자한 웃음이 저절로나왔다. 시화씨의 친구들은 들판에서 야생화를 따서 부케를 만들고, 제빵사인 팀의 동생은 웨딩 케이크를 구웠다.
4일 오후 어둠이 깔리자 시화씨 가족과 20여 명의 인디언들은 티피 안으로 들어갔다. 주문과 기도 소리가 들리고 북소리가 흘러나왔고 의식은 12시간이 넘게 지속되었다. 참석자 중 몇 명이 새벽에 나와 물과 야생 베리와 무스 수육을 챙겨 다시 티피 안으로 들어갔다. 한 줌씩, 한 모금씩 돌려가며 먹고 마신다고 한다. 일요일 오전 결혼식 하객들의 차량이 센터 안으로 줄을 잇고 들어올 때까지 세러모니는 계속 되었다. 결혼식 예정시간이 오후 12시를 한 시간 앞두고서야 사람들은 티피에서 나왔다. 화장이 잘 받으라고 신부는 결혼 전날 푹 자야 하는데, 시화씨는 꼬박 밤을 새운 부스스한 얼굴로 엄마가 준비해 온 한복을 입고 곧장 식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의식의 기운을 듬뿍 받은 시화씨의 얼굴은 밝고 활기찼다.
결혼식은 전통 한국식과 전통 인디언식 그리고 현대식이 어울린 종합 의식이었다. 주례가 축사한 뒤 두 사람은 맞절했고 서로 반지를 교환한 뒤 부부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서약하는 시화씨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인디언 주민들이 축가를 했고 이어 신부 측에선 박덕조씨가 나와서 아리랑을 불렀다. 주례는 인디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나뭇잎을 태운 뒤 그 향을 동서남북으로 흩뿌리는것으로 식을 마무리 지었다. 인디언 전통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피로연이 벌어졌다. 시화씨는 무대에 나와 흥겹게 춤을 추며 사람들과 포옹을 했다. 눈물을 보였던 신부는 간데없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의 새 신부만이 식장에서 춤을 추었다.
결혼식 다음 날 - 우리 가족 정말 잘 살 거예요
부부는 니부젠 센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촬영팀에게 마을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산책을 하는 것으로 결혼식 다음 날 아침을 보냈다. 카누를 타고 강을 건너가 인디언 아일랜드 안쪽에 있는 자신들의 땅을 보여주었고, 팀의 조각품이 전시된 페노스콥 리버 공원을 산책했다. 시화씨는 티피 세러모니에서 “나무와 물, 땅, 불 모든 신에게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팀은 니부젠 센터장으로서 방황하고 고통받는 인디언 젊은이들이 없게 하도록 여생을 인디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부부의 가장 큰 헌신의 대상은 아들 찰리이다. 나이 많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아버지로서 팀은 이제 아들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했다. 큰 수입이 없는 그가 벌써 아들 통장에 1만5천 달러의 돈을 저축해놓았다. 한푼이라도 생기면 모두 아들을 위해 모으는 것이다. 1주일간의 촬영이 모두 끝난 뒤 부부는 강변 오솔길을 손을 잡고 다정히 걸어갔다.
에스카사 편집부
인디언 아일랜드 부부, 노시화 & 팀 쉐이
그들만의 특별한 러브 스토리 6년만의 결혼식으로 꽃을 피우다
지난 11월 5일 네이티브 아메리칸들의 보호구역인 메인주 인디언 아일랜드(Penobscot)에서 조금 특별한 결혼식이 열렸다. 신부는 뉴욕에서 무용수로 활동했고 현재는 메인주 뱅고시에서 탱고와 태극권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45세의 한인 노시화씨이고 신랑은 인디언 인권보호자이자 돌 조각 아티스트인 62세의 팀 쉐이(Tim Shay)씨이다.
이들에겐 인디언 이름인 ‘천둥 노래’, 한국 이름‘환희’인 6세 아들 찰리가 있다. 부부의 적지 않은 나이 차이도 놀랍지만, 더 흥미로운 사실은 남편 팀이 이미 2번 결혼했던 경험뿐만 아니라 여러 명의 자녀, 손주까지 있다는거다. 마산에서 태어난 한국인 여성이 어떤 인연으로 이런 ‘범상치 않은’ 경력의 인디언 남성과 사랑에 빠져 뒤늦은 결혼식을 올리게 된 것일까? 한국의 종편 TV 조선의 프로그램 <사랑은 아무나 하나> 제작진은 결혼식1주일 전부터 이들 부부의 결혼 준비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SCASA도 그들의 감동적인 결혼식을 방송팀과 함께 현장에서 지켜볼 기회를 얻었다.
티피(Tipi) 세러모니가 맺어 준 인연- 인디언 텐트에서의 첫 만남
노시화씨 가족이 LA로 이민 온 것은 1987년이다. 3남매의 막내였던 시화씨는 당시15살. 전형적인 1.5세인 셈이다. 불과 몇천 달러 정도의 돈을 갖고 미국에 온 가족은 햄버거 가게를 시작했다. 밤낮으로 일에만 몰두하며 10년 정도 사업을 하면서 제법 돈이 모였다. 힘든 미국 생활에 지쳤던 부모는 고향인 마산에서 숙박업을 시작하기로 하고 역이민을 했다. 하지만 이미 UC 어바인을 졸업하고 무용수의 길을 걷고 있던 시화씨는 한국이 아닌 뉴욕으로 왔다. 그녀가 정착한 곳은 퀸즈 서니사이드였다.
시화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선생님을 따라 학원을 옮겨 다니며 무용을 배우고, 밤에는 서빙 등 파트타임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기회가 되는 무대는 어디라도 섰다. 그러다가 큰 무대를 앞둔 시점에서 연습 중 다리를 심하게 다쳤다. 회복이 된다 하더라도 완벽하게 몸이 돌아올 수 없는 상태였다. 전업 댄서의 길이 어려워진 상태에서 시화씨는 생활을 위해 차선을 생각했다. 무용으로 단련된 몸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타이치(태극권)를 배우고 강습을 시작했다.
무용수의 꿈은 좌절되고, 가족과 친구가 없는 뉴욕에서 강습으로 힘겹게 살아가며 시화씨의 몸과 마음은 갈수록 지쳐갔다. “TV에서 한국 드라마를 볼 때 친구들끼리 술 마시는 장면이 나오면, 내가 직접 겪어보지도 못한 모습인데도 갑자기 참기 힘든 외로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시화씨는 말했다. 그러던 2005년, 시화씨가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참석한 것이 ‘티피 세러모니’였다.
‘티피 세러모니’는 인디언들의 전통 텐트 가옥인 티피(Tipi) 안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밤새도록 기도와 대화를 하고 차와 담배를 나누는 영적인 의식이다. 태극권을 연마하며 기와 영적인 에너지의 중요성을 체험하던 시화씨는 티피 세러모니가 준 경험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미래의 남편인 팀 쉐이를 처음 만났다. 시화씨는 “당시 팀에게 아무런 감정도 느낌도 없었고 게다가 그 사람은 아내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둘은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는 사이로 헤어졌다.
노시화의 이야기- 팀은 마음이 넓은 사람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4년 후인 2009년. 역시 뉴욕주 업스테이트에서 열린 티피 세러모니에서였다. 그 기간 큰 변화가 있었다면 팀이 이혼하고 싱글이 된 상태였고, 변화가 없던 것은 시화씨의 여전히 외로운 뉴욕 생활이었다. 세러모니를 마치고 팀이 시화씨에게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말한다. 시화씨는 많이 놀랐다.
“팀이 거주하는 메인은 세러모니 장소에서 8시간 운전해야 하는 거리였어요. 저는 브루클린에 살고 있었고요. 집과 반대 방향으로 4시간을 더 운전해야 하는 수고를 해주겠다는 것이니 나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두 사람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팀은 이후 8시간 이상의 운전을하며 시화씨를 만나러 뉴욕에 왔다. 공교롭게도 팀 역시 타이치를 매일 수련하고 있었다. 티피 세러모니와 타이치는 두 사람을 엮어 준 주요한 고리였다. 무엇보다 시화씨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팀의 넉넉한 성품이었다.
“내가 힘들고 외로웠을 때 인내심을 갖고 나의 이야기를 들어 준 사람이에요. 내가 보고 싶으면 외국에 가는 시간인 8시간, 10시간을 마다치 않고 보러 와주었고요. 가진 건 많지 않지만 늘 사물의 본질을 보려고 노력하고, 당장 어려움에 굽히지 않고 멀리 보며 낙관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게 잘될 거라며 나에게 희망을 주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에 믿고 의지할 수 있었던 거죠.”
누구나 자신이 힘든 시기에는 옆에 있는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줄 수있다. 뉴욕에 혼자 살면서 힘들었던 그녀에게 팀은 단순히 ‘적절한’ 시기에 나타났던 사람 정도가 아니었다. 그의 삶의 방식 (Way of Life)은 그녀와 같았다. 이런 그를 보며 시화씨는 ‘내 안에 있는 나를 발견한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팀의 이야기 - 시화는 내면이 강한 여자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보호 지역 내 많은 인디언처럼 너무 무미건조하고 순탄해서 삶의 의미를 쉽게 찾지 못했다. 정부의 보조금으로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고 주류로 나아가 큰 꿈을 펼칠 기회는 적었다.
그들의 조상은 드넓은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고 하늘과 땅의 경계를 구분하지 않고 넓고 크게 생활했었다. 그 조상들이 대륙에 이주한 백인들로부터 가혹한 탄압을 받은 후 이제는 제한된 공간과 제한된 선택만이 주어지는 삶이 인디언의 운명이었다. 팀은 “어린 시절의 나는 알코올에 의존했고 폭력적이었고 많은 사고를 쳤던 문제아”라고 고백했다. 그는 같은 마을 인디언 여성과 이른 나이에 결혼해 두 명의 딸도 낳았다. 하지만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그와 아내 모두 심각한 알코올 중독이었다. 결국, 아내는 술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두 번째 결혼을 하고 다시 한 명의 자녀를 얻고 나서는 조금 안정을 찾았다. 그는 뉴멕시코에 있는 인디언 아트 스쿨에서 조각을 배웠었다. 중년이 된 그는 돌을 조각하는 일에 전념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40대 중반에 티피 세러모니를 접하게 되었다. “인디언이라면 누구나 이런 종류의 의식을 어려서부터 익히며 자라는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40살이 될 때까지 한 번도 티피 세러모니를 본 적도 없어요. 뉴멕시코에서 여성이 지도하는 의식에 참석한 뒤 비로소 나의 근본을 찾은 느낌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모든 신에게 도움을 청하고 기도를 드리는 자리입니다. 나무와 물과 땅과 불, 모든 자연이 결국 하나이고 모든 삶의 근본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2005년의 한 세러모니에서 아름다운 동양인 여성을 만나 첫눈에 반했다. 작은 체구에서 강한 기운과 밝은 빛이 나오는 것 같은 그 여인이 오랫동안 잊히지 않았다. 하지만 연락처도 없고 다시 만날 기약도없었다. 두 번째 부인과도 이혼한 뒤 얼마 뒤에 다른 세러모니에서 그여인을 다시 만났다. 그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왜 시화씨에게 반했냐는 질문에 그는 짧게 대답했다. “시화는 정말 아름답고 내면이 강한 여자였으니까요. 저는 그걸 느꼈어요”
어린 아들의 부탁- 엄마 아빠 결혼하세요
두 사람이 만나고 1년 뒤 시화씨는 임신을 했다. 뉴욕에서 함께 생활하는 것도 잠시 생각했지만 결국 인디언 마을로 들어가기로 했다. 태어날 아이를 위한 선택이었다. 마을에 제대로 된 거처를 얻기 전, 두 사람은 창고와 마찬가지인 팀의 작업실에서 몇 달을 지냈다. 몸을 눕힐 침대는 있었지만 조각 중인 돌들이 널려 있고 화장실 마저 없는 공간이었다. 화장실에 자주 가야 하는 임산부 시화씨는 급한 대로 양동이를 사용했고, 팀은 아침마다 양동이를 갈았다. 그는 “곧 집이 생길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아이가 태어나기 정확히 2주 전에 집을 얻었다. 아들 찰리가 태어났다. 엄마는 아들에게 ‘환희’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줬고 아빠는 인디언 말로 ‘천둥소리’라는 이름을 지었다.
이제는 한국의 부모에게 알려야 할때가 왔다. 시화씨는 보수적인 경상도 부모 밑에서 막내딸로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특히 엄마 박덕조 여사는 뉴욕에서 혼자 사는 딸이 늘 걱정이었다. 시화씨는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고 이혼을 두 번이나 한 인디언 남성의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차마 부모에게 하지못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이가 태어난 것이다.
부모님이 LA에 있는 큰 오빠 집에 왔을 때, 시화씨는 팀과 어린 찰리를 부모님에게 소개했다. 기절이라도 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담담했다. 아마도 딸을 빼닮은 찰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친정엄마는 “아이까지 있는데 어찌하겠노.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면 셋이서 잘 살아라”고 만 했다.
물론 그때 시화씨 부모의 심정이 어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시화씨의 아버지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떴다) 시화의 기대만큼 인디언 마을에서 찰리는 밝고 건강하게 컸다. 말 그대로 자연을 벗 삼으며 도시의 아이들은 겪어 보지 못할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 (시화씨 부부의 집에서 찰리를 처음 봤을 때 아이는 쌀쌀한 늦가을 날씨에도 반소매 차림과 맨발로 마당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몇 달 전 6살이 된 찰리가 갑자기 말했다. “엄마 아빠가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인디언들은 아이가 생기면 결혼식 없이 그냥 평생 사는 경우가 많다. 팀도 정식 결혼식을 해본 적이 없다. 어린 찰리가 결혼이란 개념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부모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시화씨가 몇 번을 물어봐도 아들의 대답은 늘 “그냥”이었다. 두 사람은 아들의 바람대로 동거 6년 만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1박 2일의 결혼식 - 한번은 신에게, 한번은 주 정부에게
노시화와 팀 쉐이의 결혼식은 토요일인 11월 4일 해 질 녘에 시작해서 5일 해 질 녘에 끝났다. 꼬박 하루가 걸린 셈이다. 토요일 진행된 티피세러모니는 ‘신에게 드리는 결혼 신고’이며 일요일 결혼식은 ‘합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주 정부에 신고’한 것이었다.
티피 세러모니와 결혼식이 열린 장소는 마을회관 격인 ‘니베준(Nibezun) 센터’ 내 마당과 마굿간이었다 (원래 야외 결혼식을 계획했지만 추운 날씨 탓에 실내로 옮겼다). 팀과 인디언 동료들은 결혼식에 앞서 센터 마당에 5m 기둥 12개를 박고 천을 둘러 티피를 설치했다. 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불을 지피기 위한 장작은 팀이 이미 며칠 전부터 차곡차곡 준비했다. 박덕조씨도 도착해 딸과 함께 잔치 음식을 준비했다. 인디언들이 즐기는 무스(큰 사슴) 고기와 야생 칠면조 고기가 들어간 잡채와 만둣국과 양배추 김치를 만들었다.
딸의 결혼식 음식을 만드는 친정엄마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착잡했지만, 손자를 볼 때마다 여느 할머니와 다를 바 없는 인자한 웃음이 저절로나왔다. 시화씨의 친구들은 들판에서 야생화를 따서 부케를 만들고, 제빵사인 팀의 동생은 웨딩 케이크를 구웠다.
4일 오후 어둠이 깔리자 시화씨 가족과 20여 명의 인디언들은 티피 안으로 들어갔다. 주문과 기도 소리가 들리고 북소리가 흘러나왔고 의식은 12시간이 넘게 지속되었다. 참석자 중 몇 명이 새벽에 나와 물과 야생 베리와 무스 수육을 챙겨 다시 티피 안으로 들어갔다. 한 줌씩, 한 모금씩 돌려가며 먹고 마신다고 한다. 일요일 오전 결혼식 하객들의 차량이 센터 안으로 줄을 잇고 들어올 때까지 세러모니는 계속 되었다. 결혼식 예정시간이 오후 12시를 한 시간 앞두고서야 사람들은 티피에서 나왔다. 화장이 잘 받으라고 신부는 결혼 전날 푹 자야 하는데, 시화씨는 꼬박 밤을 새운 부스스한 얼굴로 엄마가 준비해 온 한복을 입고 곧장 식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의식의 기운을 듬뿍 받은 시화씨의 얼굴은 밝고 활기찼다.
결혼식은 전통 한국식과 전통 인디언식 그리고 현대식이 어울린 종합 의식이었다. 주례가 축사한 뒤 두 사람은 맞절했고 서로 반지를 교환한 뒤 부부의 의무를 다하겠다는 서약을 했다. 서약하는 시화씨의 목소리가 떨리고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인디언 주민들이 축가를 했고 이어 신부 측에선 박덕조씨가 나와서 아리랑을 불렀다. 주례는 인디언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나뭇잎을 태운 뒤 그 향을 동서남북으로 흩뿌리는것으로 식을 마무리 지었다. 인디언 전통 밴드의 음악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피로연이 벌어졌다. 시화씨는 무대에 나와 흥겹게 춤을 추며 사람들과 포옹을 했다. 눈물을 보였던 신부는 간데없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의 새 신부만이 식장에서 춤을 추었다.
결혼식 다음 날 - 우리 가족 정말 잘 살 거예요
부부는 니부젠 센터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촬영팀에게 마을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산책을 하는 것으로 결혼식 다음 날 아침을 보냈다. 카누를 타고 강을 건너가 인디언 아일랜드 안쪽에 있는 자신들의 땅을 보여주었고, 팀의 조각품이 전시된 페노스콥 리버 공원을 산책했다. 시화씨는 티피 세러모니에서 “나무와 물, 땅, 불 모든 신에게 우리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간절하게 기도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팀은 니부젠 센터장으로서 방황하고 고통받는 인디언 젊은이들이 없게 하도록 여생을 인디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부부의 가장 큰 헌신의 대상은 아들 찰리이다. 나이 많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아버지로서 팀은 이제 아들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고 했다. 큰 수입이 없는 그가 벌써 아들 통장에 1만5천 달러의 돈을 저축해놓았다. 한푼이라도 생기면 모두 아들을 위해 모으는 것이다. 1주일간의 촬영이 모두 끝난 뒤 부부는 강변 오솔길을 손을 잡고 다정히 걸어갔다.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