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중에서

▲ 뉴욕의 길 그리니치 빌리지의 미네타 레인
뉴욕은 광장의 문화가 아닌 길의 문화다. 스트리트과 애비뉴의 문화다. 모든 일은 길에서 벌어진다. 한정된 단위 면적안에 이렇게 길이 많은 도시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뉴욕은 걸어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도시다. 그런데 이런 길의 도시 뉴욕에 막상 골목길이라고 부를 만한 길은 없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한국의 한 잡지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그 원고의 주제가 ‘골목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고민 없이 어떤 골목길을 주제로 글을 써볼까 생각해 봤는데…. 막상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뉴욕에 사는 분들은 물론 유학이나 여학 연수 등으로 뉴욕에서 살다 간 분들은 아마 그렇게 반박할 것이다.

“무슨 말이야, 뉴욕에 골목길이 없다니. 내가 가 본 곳만 해도….”
그 다음에 갑자기 말이 좀 막히지 않으시나요? 물론 영어로 골목을 지칭하는 Alley 나 Lane이라고 붙어 있는 길은 있다. Road, Drive, Place 등 좁은 길에 붙어 있는 명칭도 많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정서상에 골목이라고 부를만한 골목이 뉴욕시에 있나요? 우리의 골목 시장을 연상시키는 벼룩시장 골목도 다닌 적 있으시겠지만, 그 역시 ‘스트리트’에 잠시 허락을 구하고 한정된 시간만 손님으로 찾아오는 골목일 뿐이다.

그럼 우리가 골목이라고 부르는 공통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도시공학적인 개념이 아니고 다분히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개념일 것이다. 우선 당연히 좁아야 한다. 평평하지 않고 경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로등이 있어야 한다. 예전이라면 연탄재 정도, 요즘도 쓰레기 더미 정도는 있어야 한다. 즉, 부유함보다는 가난함이나 최소한 소박한 동네의 분위기여야 한다.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을 지나 자기 집으로 향하는 부잣집 사모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하지만 지저분하더라도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어야 한다. 외롭더라도 위험하지는 않아야 한다. 외국 영화의 골목이 미스테리 영화의 배경이라면 우리의 골목은 로맨틱 영화의 배경으로 더 어울린다. 그리고, 차가 다닐 수 없어야 진짜 좁고 가파른 골목길이다.
이런 모든 조건을 갖춘 골목길을 나는 아직 뉴욕에서 보지 못했다. 다른 나라는 많이 다녀보지 못했지만 간접 경험으로 보면, 유럽이나 중동 지역의 오래된 골목과 비교해도 미국은 골목이라는 문화 자체가 거의 없다. 몇 안 되는 미국인 친구이자 뉴욕 토박이 유태인인 데이빗 이라는 녀석에게도 물어봤다. 질문의 내용조차 잘 파악하지 못하는 거로 봐서 내 짐작이 크게 틀리진 않은 것 같다.

구글에서 뉴욕의 골목길을 키워드로 이미지 검색을 해봤다. 헬렌 레빗이란 사진작가의 이미지들이 가장 먼저 나온다. 20세기 초반 할렘과 브루클린 빈민가 거리에서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물놀이를 하는 흑백 사진들이다. 귀하고 정겨운 사진들이지만, 차가 귀하던 시절 널찍한 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일 뿐 골목길의 풍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
헬렌 레빗의 사진 속 거리가 내게 진정한 골목이 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결국 이 사진 속 주인공들이 거리가 아닌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골목은 그곳에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실체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실체는 아이러니하게도 골목의 탄생이 주체적인 목적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건물들의 부산물이라는 것에 있다. 무슨 말이냐면, 골목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겨나는 것이다.
집을 지어야 하는데 마주 보는 집들의 벽이나 문이 서로 붙을 수는 없으니 당연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 사람이 다닐 만한 통로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게 골목이다. 폭도 일정하지 않았고 곡선으로 이어졌다. 뉴욕의 길들은 아무리 좁아도 탄생 과정이 다르다. 계획적이었다. 그래서 뉴욕의 모든 길은 다 이름이 있다. 단지 숫자로만 표시되더라도 어쨌든 이름과 명칭이 없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국의 골목길에는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름도 없이 태어난 부산물로서의 길. 그 외로움과 천박함이 보이지 않는다면, 개발 도상국 시대 한국에서 자란 세대들에겐 골목길이 아니다.
그래도 뉴욕에서 가장 골목다운 골목을 소개하라면 나는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미네타 레인 (Minetta Lane)을 꼽겠다. 좁고 구부정하며 주위 건물들이 세련된 낡음을 가진 운치 있는 길이다. 봄과 가을이 되면 특히 꽃과 단풍의 모습을 충분히 연출해준다. 뉴욕대 인근이어서 조금만 벗어나면 바와 레스토랑도 즐비하다. 무엇보다 Wha, Comedy Cellar 등 유서 깊은 공연장들이 인근이다. 수많은 예술가와 작가가 거리를 누비던 예전 그리니치 빌리지의 향취를 간직한 골목이다.
글 박원영
에스카사 편집부
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중에서
▲ 뉴욕의 길 그리니치 빌리지의 미네타 레인
뉴욕은 광장의 문화가 아닌 길의 문화다. 스트리트과 애비뉴의 문화다. 모든 일은 길에서 벌어진다. 한정된 단위 면적안에 이렇게 길이 많은 도시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래서 뉴욕은 걸어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도시다. 그런데 이런 길의 도시 뉴욕에 막상 골목길이라고 부를 만한 길은 없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한국의 한 잡지사로부터 원고 청탁을 받았는데 그 원고의 주제가 ‘골목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큰 고민 없이 어떤 골목길을 주제로 글을 써볼까 생각해 봤는데…. 막상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뉴욕에 사는 분들은 물론 유학이나 여학 연수 등으로 뉴욕에서 살다 간 분들은 아마 그렇게 반박할 것이다.
“무슨 말이야, 뉴욕에 골목길이 없다니. 내가 가 본 곳만 해도….”
그 다음에 갑자기 말이 좀 막히지 않으시나요? 물론 영어로 골목을 지칭하는 Alley 나 Lane이라고 붙어 있는 길은 있다. Road, Drive, Place 등 좁은 길에 붙어 있는 명칭도 많다. 하지만 정말 ‘우리’의 정서상에 골목이라고 부를만한 골목이 뉴욕시에 있나요? 우리의 골목 시장을 연상시키는 벼룩시장 골목도 다닌 적 있으시겠지만, 그 역시 ‘스트리트’에 잠시 허락을 구하고 한정된 시간만 손님으로 찾아오는 골목일 뿐이다.
그럼 우리가 골목이라고 부르는 공통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도시공학적인 개념이 아니고 다분히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개념일 것이다. 우선 당연히 좁아야 한다. 평평하지 않고 경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가로등이 있어야 한다. 예전이라면 연탄재 정도, 요즘도 쓰레기 더미 정도는 있어야 한다. 즉, 부유함보다는 가난함이나 최소한 소박한 동네의 분위기여야 한다. 좁고 지저분한 골목길을 지나 자기 집으로 향하는 부잣집 사모님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가?
하지만 지저분하더라도 험악한 분위기는 아니어야 한다. 외롭더라도 위험하지는 않아야 한다. 외국 영화의 골목이 미스테리 영화의 배경이라면 우리의 골목은 로맨틱 영화의 배경으로 더 어울린다. 그리고, 차가 다닐 수 없어야 진짜 좁고 가파른 골목길이다.
이런 모든 조건을 갖춘 골목길을 나는 아직 뉴욕에서 보지 못했다. 다른 나라는 많이 다녀보지 못했지만 간접 경험으로 보면, 유럽이나 중동 지역의 오래된 골목과 비교해도 미국은 골목이라는 문화 자체가 거의 없다. 몇 안 되는 미국인 친구이자 뉴욕 토박이 유태인인 데이빗 이라는 녀석에게도 물어봤다. 질문의 내용조차 잘 파악하지 못하는 거로 봐서 내 짐작이 크게 틀리진 않은 것 같다.
구글에서 뉴욕의 골목길을 키워드로 이미지 검색을 해봤다. 헬렌 레빗이란 사진작가의 이미지들이 가장 먼저 나온다. 20세기 초반 할렘과 브루클린 빈민가 거리에서 아이들이 야구를 하고 물놀이를 하는 흑백 사진들이다. 귀하고 정겨운 사진들이지만, 차가 귀하던 시절 널찍한 거리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일 뿐 골목길의 풍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
헬렌 레빗의 사진 속 거리가 내게 진정한 골목이 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결국 이 사진 속 주인공들이 거리가 아닌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골목은 그곳에 사람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자체가 실체로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실체는 아이러니하게도 골목의 탄생이 주체적인 목적에 의해서가 아닌 다른 건물들의 부산물이라는 것에 있다. 무슨 말이냐면, 골목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겨나는 것이다.
집을 지어야 하는데 마주 보는 집들의 벽이나 문이 서로 붙을 수는 없으니 당연히 거리를 두어야 한다. 사람이 다닐 만한 통로 정도는 있어야 한다. 그게 골목이다. 폭도 일정하지 않았고 곡선으로 이어졌다. 뉴욕의 길들은 아무리 좁아도 탄생 과정이 다르다. 계획적이었다. 그래서 뉴욕의 모든 길은 다 이름이 있다. 단지 숫자로만 표시되더라도 어쨌든 이름과 명칭이 없는 길은 처음부터 없었다. 지금은 아니지만, 한국의 골목길에는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이름도 없이 태어난 부산물로서의 길. 그 외로움과 천박함이 보이지 않는다면, 개발 도상국 시대 한국에서 자란 세대들에겐 골목길이 아니다.
그래도 뉴욕에서 가장 골목다운 골목을 소개하라면 나는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미네타 레인 (Minetta Lane)을 꼽겠다. 좁고 구부정하며 주위 건물들이 세련된 낡음을 가진 운치 있는 길이다. 봄과 가을이 되면 특히 꽃과 단풍의 모습을 충분히 연출해준다. 뉴욕대 인근이어서 조금만 벗어나면 바와 레스토랑도 즐비하다. 무엇보다 Wha, Comedy Cellar 등 유서 깊은 공연장들이 인근이다. 수많은 예술가와 작가가 거리를 누비던 예전 그리니치 빌리지의 향취를 간직한 골목이다.
글 박원영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