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벽을 넘어 만(卍)자와 십자가의 대화

종교의 벽을 넘어 만(卍)자와 십자가의 대화


지난 2월 26일 미국 워싱턴 연화정사(주지 · 성원 스님, 캐롤라이나 대학 교수)에서 조금 특별한 법회가 있었다. 연화정사는 매월 열린 법회를 통해 사회 각층의 다양한 인사를 초대하여 강연회를 갖는데 2월에는 ‘불교와 천주교의 만남’을 주제로 법회를 열어 장기풍 평화신문 미주지사 전 주간을 초청해 강연을 들었다. 장기풍 전 주간은 ‘세계 곳곳에 끊이지 않는 분쟁을 위해서라도 모든 종교는 평화를 지향해야 한다.’ 며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진리는 사랑과 평화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세계평화는 종교평화에서 시작하기에 각 종교 간에 벽을 허물고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면서 이와 같은 요지로 강연을 이어갔다.


기독교는 그리스도교라는 뜻으로 천주교 성공회 정교회 개신교 등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파를 말한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실증적 증명을 통해 얻은 합리적인 지식으로 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체험을 통해 얻은 실천적 지혜로 사는 것이다. 전자는 논리적 실험을 통해 얻은 과학발전으로 문명사회를 낳았고, 후자는 추론과 삶의 지혜에 기초해 다양한 형태의 종교와 공동체를 만들었다. 현대사회는 모든것이 증명되고 확인되어야 진실이라고 믿지만 우리는 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수많은 신앙 속에서 살고 있다. 공자의 손자 자사는 중용 첫머리에서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라고 했다. 즉 하늘의 명을 따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본성을 따르는 것이 도며 도를 닦는 것이 교라는 것이다. 따라서 도를 닦는 것이 교육이며 종교다. 불교나 천주교나 모두 도를 닦는 고등 종교들이다.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 세상 모든 종교는 평화를 추구한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의 뿌리인 아브라함 시대 최초의 사제는 살렘왕 멜키세덱이다. 살렘은 평화를 뜻한다. 유대인들의 인사는 살롬이다. 천주교에서는 미사 때마다 신자들이 Peace be with You! 하며 평화의 인사를 한다. 이렇듯 모든 종교가 평화를 외치는데 세계는 끊임없는 전쟁 속에 살고 있다. 천주교의 부끄러운 역사는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2백년에 걸쳐 10차례나 십자가를 앞세워 전쟁을 일으킨 십자군 사건이다. 불교도 다른 종교지역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유혈충돌을 일으켰다. 몇 년 전 조부시 전 대통령은 이슬람과의 전쟁을 성전이라고 했고 트럼프 대통령

도 반이슬람 정책을 취하고 있다. 성전이란 미명아래 같은 아브라함 종교끼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살육하는 것이다. 나치의 유대인 학살과 극우주의도 시오니즘을 거부하면서 생긴 일이다,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종교가 없어져야 한다는 역설도 성립한다. 이러한 모든 갈등과 전쟁의 원인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우주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과 이념 종교 다른 문화와 피부색까지 배척한다. 서로 차이점보다 공통점 찾아 다른 생각들을 합리적으로 판단할때 많은 갈등이 소멸되리라 믿는다.


천주교와 불교는 많이 다르다. 그러나 공통점이 더 많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이고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교리로 정립한 분은 사도 바오로다. 성서에서 그분은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라고 정의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성 소멸된다고 한다. 크게 다르지 않다. 기독교는 하느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셨다고 믿는다. 천주교는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시작도 마침도, 변하심도 없다고 가르친다. 무시무종(無始無終)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불교는 연기법을 가르친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생기고 소멸되는 것으로 시작도 마침도 없다고 한다. 역시 무시무종이다. 부처님은 모든 인연은 자신이나 다른 깨달은 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여래가 세상에 출현하고 않음에 관계없이 우주(법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법칙으로 자신은 이 우주적 법칙을 완전히 깨닫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 연기설의 형태로 드러낸 것일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기독교도 예수님은 세상창조 이전부터 하느님과 함께 있었던 독생자로 인간을 구원하시려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태어났다고 가르친다.


법당에는 보통 법신ㆍ보신ㆍ화신의 세 부처님을 모신다. 법신은 법으로서의 부처님을 뜻하는 말로, 비로자나불로 나타낸다. 보신은 수행을 통해 무궁무진한 공덕을 갖춘 부처님으로, 아미타불로 표현된다. 화신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여러 형상으로 나타나는 부처님을 말한다. 즉 하나의 부처님이 하시는 역할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다. 기독교도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은 같은 하느님이시되 하시는 역할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부르지만 우리는 삼위가 한 분이심을 믿음으로 고백한다. 불교의 상징인 만(卍)자는 길상만덕(吉祥萬德) 기쁜 소식, 상서로운 조짐, 행운의 징표를 의미한다. 기독교도 복음을 다른 이름으로 기쁜소식이라 부른다. 불교는 처처불상 사사불공(處處佛像 事事佛供) 우주전체가 법계이며 부처님은 아니 계신 곳이 없으니 매사 공양을 드리라고 한다. 기독교도 하느님은 영원하시고 아니 계신 곳이 없으니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무엇이 다른가. 기독교는 10계명이 있고 불교는 5계가있다. 그 중 살생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말하지 말라 네 가지는 십계명과 오계에 똑같은 문장으로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이 열두 제자를 비롯해 많은 제자들 두셨던 것처럼 부처님도 열 분의 직계제자를 두셨다.


천주교에는 구약 46권 신약 27권 등 신구약 73권이 있다. 개신교는 구약 가운데 그리스역 7권을 제외한 66권이다. 정경 외에도 아포크리파라고 불리는 외경 신구약 문헌 수백 개가 있다. 불교도 제자인 아난타와 우파리가 기억을 더듬어 구술한 것을 받아 적은 것이 아함경의 기초가 되고 수백 개 경전이 있다. 불교 경전의 핵심은 조금 전 염불한 반야심경 260자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배웠다. 불교의 피안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이다. 기독교에서도 성서를 해석하시는 분들마다 주장이 있겠지만 요한복음 17장을 모든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내용은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 제자들을 위한 기도 믿는 이들을 위한 기도이다. 결론은 “아버지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소서” 즉 기독교 신앙의 최대 목표는 하느님과 하나 되는 것이다.


흔히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비이고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랑이라고 한다. 자비와 사랑은 같은 말이다. 불교와 천주교의 가장 큰 공통점은 수도영성이다. 불교에서는 수도방법으로 간화선 묵조선 위파사나 등 다양하다. 천주교도 관상기도(묵조선) 이냐시오 묵상법(간화선에 가까움) 등 다양하다. 노동하면서 수도하는 것은 불교 천주교가 똑같다. 천주교는 “Ora et Lavora”라는 베네딕도가 가르친 “기도하며 일하라”가 기본이다. 참선과 관상 중 등 분심 또는 마(魔)가 일어날 때 대처방법은 천주교나 불교이나 용어만 다르다. 불교에서는 한거정처(閑居靜處)라고 한적하고 조용한 장소에서 수도하라고 가르친다. 스님들은 겨울에는 동안거 여름에는 하안거로 한적한곳에서 두문불출 수도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천주교에는 피세정념(避世瀞念)이란 것이 있다. 줄여서 피정이다.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 단식하며 기도하셨고 제자들에게 한적한 곳으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특히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게세마니 동산에 간절히 기도하시면서 준비하셨다. 천주교에서는 모든 사제 수도자들은 1년에 열흘 이상 의무화 되었고 신자들에게도 피정을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천주교에서는 인간의 모든 죄의 뿌리를 칠죄종(七罪宗) 일곱 가지로 나눈다. 교오(驕傲), 간린(慳吝), 미색(迷色), 탐도(貪蹈), 질투(嫉妬), 분노(憤怒), 해태(懈怠) 일곱 가지에서 모든 죄가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불교에서도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말한다. 오욕이란 재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색욕을 말하고 칠정은 기쁨, 성냄, 근심,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을 말한다. 분류의 차이지 비슷한 내용이다. 염경기도는 유대교와 이슬람 가톨릭의 공통적 기도다. 즉 가톨릭에서는 묵주로 불교는 염주로 한다. 대단히 효과 있는 기도다. 기독교에서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는 것처럼 불교에서도 수계를 한다. 천주교에서는 세례를 받을 때 죄악을 끊어버리고 하느님 믿겠다고 서약하면서 자신의 지표로 삼을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정한다. 마찬가지로 불교에서도 계를 받을 때 삶의 지표가 될 수 있는 의미 있는 법명을 받고 불, 법, 승 삼보에 귀의하고 오계를 지킬 것을 서약한다. 천주교와 불교의 공통점이다. 불자들의 수행 단계를 말하는 육바라밀(六波羅蜜)도 기독교 교리와 다르지 않다.


보시바라밀(布施波羅蜜) 성경에는 가난한 이웃을 위해 베풀라는 말이 수없이 많다. 불교도 베푸는 것이 수행의 기본이다. 지계바라밀(持戒波羅蜜) 기독교는 모든 계명을 요약하면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이웃사랑 실천이 기독교인의 지계다.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 성경에서는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고 가르친다. 정진바라밀(精進波羅蜜) 성경에는 “직무에 전념하고 정성을 다하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꾸준히 자신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기독교의 정진이다. 선정바라밀(禪定波羅蜜) 예수님은 수시로 한적한 곳을 찾아 선정삼매에 드셨다. 제자들에게도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라는 가르치신다. 천주교에서는 강력히 권하는 피정이 선정의 과정이다.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 불교와 기독교는 모두 지혜를 최고의 가치로 구한다다. 육바라밀 수행의 목표는 지혜 즉 반야(般若)바라밀이다. 불자들은 지혜의 깨우침을 얻으려고 수행한다. 성경 집회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솔로몬은 지혜의 상징으로 알려진다. 구약 열왕기서는 솔로몬이 하느님께 지혜를 구하는 장면을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록했다. 즉 지혜는 ‘듣는 마음’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말보다 앞서 듣는 자세가 선행되어야 한다. 새소리 바람소리에서도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지혜를 얻는 방법이다. 수도하시는 스님들이나 천주교 수도자들이 고요한 침묵 중에 묵상과 관상에 몰입하는 이유이다.


이처럼 천주교와 불교는 서양과 동양에서 시작된 종교이지만 진리라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진리를 찾는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다종교 다문화시대에 살고 있다. 종교인들이 서로 이해하고 대화하는것이 국가 화합과 나가서는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2천년 넘는 역사상 종교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창시자인 예수님과 부처님은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글 장지풍 스테파노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