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중에서 영감님들에게 자극 받다
얼마 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패션 포토그래퍼 빌 커닝햄 (Bill Cunningham)은 내가 인생의 롤 모델로 여기는 사람의 하나였다. 뉴욕타임스 주말 패션 면에 실리는 그의 길거리 패션 사진과 짧은 글들이 좋아서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3년 전 <빌 커닝행의 뉴욕>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후 작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 그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빌 커닝행은 사망직전까지 지난 수십 년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전거로 뉴욕을 누비며, 구식 필름 카메라로 거리의 행인과 유명인들의 패션을 촬영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촬영을 거르지 않았다. 비가 오면 우비와 장화 패션, 눈이 오면 스노우 패션을 찍느라 더 분주했다. 구식 카메라와 자전거 그리고 초록색 점퍼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일반인들의 빈축을 사는 화려함 위주의 패션 세계에서 빌 커닝햄은 너무나 소탈한 사람이기도 했다.
패션계의 여제인 애나 윈터 보그지 편집장이 “우리는 모두 빌을 위해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선다”고 말할 정도로 알아주는 작가였지만, 그의 실제 삶은 수도승에 비견될 정도로 검소했다. 직업상 수많은 파티와 패션 이벤트에 초대받았지만, 파티장에서 제공하는 와인과 그 비싼 진수성찬에 포크 하나 안대는 걸로 유명하다. 늘 사진만 찍고 파티장을 떠났다. 뉴욕타임스 회장은 그의 80회 생일날 직접 사무실에서 파티를 열어줄 정도로 빌 커닝햄을 존중했다. 빌 커닝햄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띵’하고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있었다.
나이를 따지지 않는 미국에서 15년 이상을 살았던 내가 그 문화를 체화하지 못한 채 너무나 한국적인 ‘조로(早老)현상’을 겪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직 50살도 아닌 데 너무 많은 걸 접어놓고 혹은 미리 내려놓고 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자책이었다. 몇 편의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만든 경험으로 이력서에 독립영화감독이라는 말을 써놓지만 나는 카메라(비디오)를 상당히 늦게 잡은 편이다.
직접 내 손으로 처음 촬영이란 것을 해본 것이 31살 때였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지만, 실습은 커녕 카메라를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고 심지어 ‘방송제작론’도 오로지 책으로만 배웠다.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커리큘럼에 방송국 견학 한번 없었다.) 물론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소위 방송이란 명칭이 붙는 학과의 학생 대부분에게 9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의 대학 상황은 그랬다. 직장 생활을 광고회사 PD로 시작하고 제작 업무를 맡았지만, 당연히 카메라는 촬영기사의 몫이었다. 조감독 시절 ‘도대체 카메라는 어떻게 생겨먹었나’ 궁금해 슬쩍 만져 보려고 하면, 촬영 감독님도 아닌 조수가 먼저 인상을 쓰면서 나를 마치 보물단지에 손대는 도둑놈이나 발견한 듯이 소리지르며 질색을 했다.
“조심해요. 뷰파인더 함부로 들여보다가 뒤통수 얻어맞은 조감독 한 두 명아니야.”
'입봉'을 하고 나서야 가끔 뷰파인더를 통해 프레임을 확인했지만, 대부분은 모니터만 지켜볼 뿐이었다.
뉴욕에 영화 유학을 와서 처음 만져 본 카메라가 90년대 후반 당시에도 골동품 취급을 받던 16밀리 볼렉스였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리고 이미 디지털 시대였다. 소니 6밀리 디지털 캠과 매킨토시를 사고 나니 세상이 내것 같았다. ‘내가 직접 하는 촬영과 편집’이라는 이전까지는 몰랐던 재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 후 약 7년간, 나는 직업이 VJ가 아닌 사람치고는 정말 카메라를 항상 지니고 살았다.
특히 지하철 음악가들의 다큐멘터리를 몇 년간에 걸쳐 만들었을 때는 특정한 촬영일과 장소가 따로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림이 될 만한 상황을 놓칠 수가 없어서 언제나 카메라 가방을 휴대하고 다녔다. 그러던 내가 마지막으로 작업을 위해 촬영을 한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 이후로는 그저 캠코더로 아이가 자라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 유일한 촬영이었다. 혹시 누가 영화 만드는 건 포기했냐고 물어보면 세상의 모든 감독 지망생들처럼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진전도 없는 시나리오를 계속 끄적거리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운 좋게 늦은 나이에 감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전처럼 카메라를 들고 하루종일, 정신없이 거리와 지하철역을 헤매고 다니는 일은 다시 없을 거라고 이미 단정 지었다.
한국이 유난히 조로현상이 심한 사회라는 건 인정할 것이다. 꼭 직장인들의 사오정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50~60대가 되어야 완숙하게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조차 40대가 고비다. 헐리우드에선 70대 감독과 70대 촬영기사가 머리를 맡대고 씬 구성을 하는 모습이 흔하지만, 한국의 CF, 영화, 방송 등 프로덕션 분야에서 노인 측에 드는 전문가를 찾기 힘들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만났던 방송국 PD 동기들은 대부분 현장을 떠나‘관리직’이 되어 있었다. 아직 몸도 마음도 청년들인 40대 후반이지만 “20년 현장 일했으면 책상에 앉아서 일해야 할 때”라는 조직문화가 느껴졌다. 그 중 한 명은 다시 촬영장으로 보내달라고 회사와 투쟁을 하고 있었다. 이제 50대 초반인 언론계 선배들 역시 대부분 직함이 부장이나 위원이고 ‘데스크’를 하고 있다. 그 나이와 경력이라면 언론의 꽃인 탐사 보도를 가장 잘할 수 있는 노련한 기자들인데… 뛰어다니며 쫓아다니며 취재하기엔 이미 늙었단 뜻인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빌 커닝햄이라는 사람의 예를 들었지만, 뉴욕이라는 특수한 장소와 예술가라는 특정한 직업상, 게다가 이미 명성과 지위를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 아니겠냐고. 혹은 일 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기회만 되면 누구나 그러고 싶어 한다고. 하지만 필자는 이곳에서 로컬 기자로 일하면서 취재 현장에서 정말 많은 50~60대 노장들을 만났다. 그런데 모두 미국인 주류 언론 기자 아니면 중국인, 폴란드인, 쿠바인 등 각 커뮤니티 미디어의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은퇴할 때까지 현장에서 사진 찍고 취재하는 걸 당연히 여겼다.
현장에서 가장 젊은 사람들은 늘 20~30대인 한인 기자들이었다. 이곳에서도 40대가 중반이 넘으면 벌써 현장을 떠나 데스크로 간다. ‘조로’는 지형을 떠나 분명히 한국적인 마인드다. 주변에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웨딩 촬영으로 활발하게 일하던 후배를 만났는데 이미 카메라는 손을 놓고 어린 사람을 시킨단다.
이유는, “인제 그만 해야죠, 그런 일은.”
한국 뉴스 채널에 보낼 촬영일을 열심히 하는 후배도 같은 말을 한다.
“이제 저도 40 중반인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하겠어요….”
언제까지? 카메라 들고 다닐 힘이 있을 때까지. 바로 조나스 메카스 감독처럼.
최근 내 뒤통수를 또 한 번 호되게 때린 영감님이 조나스 메카스 감독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감독은 아니지만 60~70년대 아방가르드 시대를 관통하며 앤디 워홀, 존 레논, 오노 요코 등과도 작업했던 뉴욕 독립 영화의 대부다. 여전히 뉴욕의 인디 시네마 보급의 보루 역할을 하는 ‘앤솔로지 필름 어카이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90살이 넘은 그는 여전히 1년에 3~4편의 단편들을 찍고 있다. 필자는 이 영감님을 직접 본 적 있다. 1999년 학교 수업시간에 특별 강사로 왔었다. 감독이 만든 이중노출을 주로 사용해 찍은 시각적으로 현란한 단편 영화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조나스 메카스는 그때가 이미 77세였고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 접한 실험영화에 감탄하고, 처음 만져 본 필름 카메라에 재미를 들이던 그 시절, 비싼 외화를 쓰면서 이 먼 곳까지 와서 진짜 배워야 할 것에는 막상 바로 눈앞에서 대하면서도 무감각했던 것 같다. 내일모레 팔순 노인이 저렇게 열정적으로 현장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나는 더 자극받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50살이 되기도 전에 그렇게 미리 꺾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일이 있을 것이다. 뭔가를 계속 추구하는 것이 끈기와 집념으로 보이기보다는 미련과 집착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적지않다. 나잇값,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데 남들이 뭐라고 해도 자신만 좋으면 계속해야 하는 일들을 실제로 남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자신이 스스로 먼저 “이제는 늦었다”고 규정하는 일이 더 많지는 않은가? 꼭 예술가나 작가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멋지게 늙어가고 있는 영감님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성공한 삶은 아닐지 몰라도 결코 실패한 인생일 수는 없다. 죽을 때까지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면. (영감님이라는 단어에 성적인 구별은 없습니다)
글 박원영
에스카사 편집부
꼰대 감독의 뉴욕 잠입 생존기 ‘투덜투덜 뉴욕, 뚜벅뚜벅 뉴욕’ 중에서 영감님들에게 자극 받다
얼마 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패션 포토그래퍼 빌 커닝햄 (Bill Cunningham)은 내가 인생의 롤 모델로 여기는 사람의 하나였다. 뉴욕타임스 주말 패션 면에 실리는 그의 길거리 패션 사진과 짧은 글들이 좋아서 흥미를 갖기 시작했고, 3년 전 <빌 커닝행의 뉴욕>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후 작가 이전에 한 인간으로 그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빌 커닝행은 사망직전까지 지난 수십 년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전거로 뉴욕을 누비며, 구식 필름 카메라로 거리의 행인과 유명인들의 패션을 촬영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촬영을 거르지 않았다. 비가 오면 우비와 장화 패션, 눈이 오면 스노우 패션을 찍느라 더 분주했다. 구식 카메라와 자전거 그리고 초록색 점퍼가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일반인들의 빈축을 사는 화려함 위주의 패션 세계에서 빌 커닝햄은 너무나 소탈한 사람이기도 했다.
패션계의 여제인 애나 윈터 보그지 편집장이 “우리는 모두 빌을 위해 옷을 입고 거리에 나선다”고 말할 정도로 알아주는 작가였지만, 그의 실제 삶은 수도승에 비견될 정도로 검소했다. 직업상 수많은 파티와 패션 이벤트에 초대받았지만, 파티장에서 제공하는 와인과 그 비싼 진수성찬에 포크 하나 안대는 걸로 유명하다. 늘 사진만 찍고 파티장을 떠났다. 뉴욕타임스 회장은 그의 80회 생일날 직접 사무실에서 파티를 열어줄 정도로 빌 커닝햄을 존중했다. 빌 커닝햄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띵’하고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있었다.
나이를 따지지 않는 미국에서 15년 이상을 살았던 내가 그 문화를 체화하지 못한 채 너무나 한국적인 ‘조로(早老)현상’을 겪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직 50살도 아닌 데 너무 많은 걸 접어놓고 혹은 미리 내려놓고 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자책이었다. 몇 편의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만든 경험으로 이력서에 독립영화감독이라는 말을 써놓지만 나는 카메라(비디오)를 상당히 늦게 잡은 편이다.
직접 내 손으로 처음 촬영이란 것을 해본 것이 31살 때였다. 신문방송학을 전공했지만, 실습은 커녕 카메라를 구경조차 해 본 적이 없고 심지어 ‘방송제작론’도 오로지 책으로만 배웠다.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커리큘럼에 방송국 견학 한번 없었다.) 물론 나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소위 방송이란 명칭이 붙는 학과의 학생 대부분에게 90년대 이전만 해도 한국의 대학 상황은 그랬다. 직장 생활을 광고회사 PD로 시작하고 제작 업무를 맡았지만, 당연히 카메라는 촬영기사의 몫이었다. 조감독 시절 ‘도대체 카메라는 어떻게 생겨먹었나’ 궁금해 슬쩍 만져 보려고 하면, 촬영 감독님도 아닌 조수가 먼저 인상을 쓰면서 나를 마치 보물단지에 손대는 도둑놈이나 발견한 듯이 소리지르며 질색을 했다.
“조심해요. 뷰파인더 함부로 들여보다가 뒤통수 얻어맞은 조감독 한 두 명아니야.”
'입봉'을 하고 나서야 가끔 뷰파인더를 통해 프레임을 확인했지만, 대부분은 모니터만 지켜볼 뿐이었다.
뉴욕에 영화 유학을 와서 처음 만져 본 카메라가 90년대 후반 당시에도 골동품 취급을 받던 16밀리 볼렉스였다. 신기하고 재밌었다. 그리고 이미 디지털 시대였다. 소니 6밀리 디지털 캠과 매킨토시를 사고 나니 세상이 내것 같았다. ‘내가 직접 하는 촬영과 편집’이라는 이전까지는 몰랐던 재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 후 약 7년간, 나는 직업이 VJ가 아닌 사람치고는 정말 카메라를 항상 지니고 살았다.
특히 지하철 음악가들의 다큐멘터리를 몇 년간에 걸쳐 만들었을 때는 특정한 촬영일과 장소가 따로 없었다. 조금이라도 그림이 될 만한 상황을 놓칠 수가 없어서 언제나 카메라 가방을 휴대하고 다녔다. 그러던 내가 마지막으로 작업을 위해 촬영을 한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 이후로는 그저 캠코더로 아이가 자라는 것을 기록하는 것이 유일한 촬영이었다. 혹시 누가 영화 만드는 건 포기했냐고 물어보면 세상의 모든 감독 지망생들처럼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진전도 없는 시나리오를 계속 끄적거리고 있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운 좋게 늦은 나이에 감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전처럼 카메라를 들고 하루종일, 정신없이 거리와 지하철역을 헤매고 다니는 일은 다시 없을 거라고 이미 단정 지었다.
한국이 유난히 조로현상이 심한 사회라는 건 인정할 것이다. 꼭 직장인들의 사오정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50~60대가 되어야 완숙하게 가장 잘할 수 있는 영역조차 40대가 고비다. 헐리우드에선 70대 감독과 70대 촬영기사가 머리를 맡대고 씬 구성을 하는 모습이 흔하지만, 한국의 CF, 영화, 방송 등 프로덕션 분야에서 노인 측에 드는 전문가를 찾기 힘들다.
몇 년 전 한국에서 만났던 방송국 PD 동기들은 대부분 현장을 떠나‘관리직’이 되어 있었다. 아직 몸도 마음도 청년들인 40대 후반이지만 “20년 현장 일했으면 책상에 앉아서 일해야 할 때”라는 조직문화가 느껴졌다. 그 중 한 명은 다시 촬영장으로 보내달라고 회사와 투쟁을 하고 있었다. 이제 50대 초반인 언론계 선배들 역시 대부분 직함이 부장이나 위원이고 ‘데스크’를 하고 있다. 그 나이와 경력이라면 언론의 꽃인 탐사 보도를 가장 잘할 수 있는 노련한 기자들인데… 뛰어다니며 쫓아다니며 취재하기엔 이미 늙었단 뜻인가?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빌 커닝햄이라는 사람의 예를 들었지만, 뉴욕이라는 특수한 장소와 예술가라는 특정한 직업상, 게다가 이미 명성과 지위를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가능한 경우 아니겠냐고. 혹은 일 할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기회만 되면 누구나 그러고 싶어 한다고. 하지만 필자는 이곳에서 로컬 기자로 일하면서 취재 현장에서 정말 많은 50~60대 노장들을 만났다. 그런데 모두 미국인 주류 언론 기자 아니면 중국인, 폴란드인, 쿠바인 등 각 커뮤니티 미디어의 기자들이었다. 그들은 은퇴할 때까지 현장에서 사진 찍고 취재하는 걸 당연히 여겼다.
현장에서 가장 젊은 사람들은 늘 20~30대인 한인 기자들이었다. 이곳에서도 40대가 중반이 넘으면 벌써 현장을 떠나 데스크로 간다. ‘조로’는 지형을 떠나 분명히 한국적인 마인드다. 주변에 비슷한 일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웨딩 촬영으로 활발하게 일하던 후배를 만났는데 이미 카메라는 손을 놓고 어린 사람을 시킨단다.
이유는, “인제 그만 해야죠, 그런 일은.”
한국 뉴스 채널에 보낼 촬영일을 열심히 하는 후배도 같은 말을 한다.
“이제 저도 40 중반인데 언제까지 이 일을 하겠어요….”
언제까지? 카메라 들고 다닐 힘이 있을 때까지. 바로 조나스 메카스 감독처럼.
최근 내 뒤통수를 또 한 번 호되게 때린 영감님이 조나스 메카스 감독이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감독은 아니지만 60~70년대 아방가르드 시대를 관통하며 앤디 워홀, 존 레논, 오노 요코 등과도 작업했던 뉴욕 독립 영화의 대부다. 여전히 뉴욕의 인디 시네마 보급의 보루 역할을 하는 ‘앤솔로지 필름 어카이브’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90살이 넘은 그는 여전히 1년에 3~4편의 단편들을 찍고 있다. 필자는 이 영감님을 직접 본 적 있다. 1999년 학교 수업시간에 특별 강사로 왔었다. 감독이 만든 이중노출을 주로 사용해 찍은 시각적으로 현란한 단편 영화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조나스 메카스는 그때가 이미 77세였고 여전히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 접한 실험영화에 감탄하고, 처음 만져 본 필름 카메라에 재미를 들이던 그 시절, 비싼 외화를 쓰면서 이 먼 곳까지 와서 진짜 배워야 할 것에는 막상 바로 눈앞에서 대하면서도 무감각했던 것 같다. 내일모레 팔순 노인이 저렇게 열정적으로 현장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나는 더 자극받았어야 했다. 그랬다면 50살이 되기도 전에 그렇게 미리 꺾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새로 시작하기에는 너무 늦은 일이 있을 것이다. 뭔가를 계속 추구하는 것이 끈기와 집념으로 보이기보다는 미련과 집착으로 비춰지는 경우도 적지않다. 나잇값, 분명히 해야 한다. 그런데 남들이 뭐라고 해도 자신만 좋으면 계속해야 하는 일들을 실제로 남들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자신이 스스로 먼저 “이제는 늦었다”고 규정하는 일이 더 많지는 않은가? 꼭 예술가나 작가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멋지게 늙어가고 있는 영감님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성공한 삶은 아닐지 몰라도 결코 실패한 인생일 수는 없다. 죽을 때까지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산다면. (영감님이라는 단어에 성적인 구별은 없습니다)
글 박원영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