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업이 끝난 후 초등학교 앞은 늘 잡상인들로 북적였단다. 빨간색 고무대야에 옥수수와 떡을 한가득 담아와 파는 나이든 촌부와 호박맛 쫀드기와 아폴로 같은 불량식품을 파는 젊은 아낙네는 매일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앉아 배고픈 아이들에게 손짓하곤 했지. 키다리 아저씨가 팔던 신밧드의 모험과 프로야구단 종이 딱지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잇거리였단다.
여느 때와 같이 학교 정문을 나서서 집에 가는데 유난히 아이들로 북적이던 행상이 눈에 들어왔어. 호기심에 “무엇을 파는 곳인가?” 하고 가봤더니, “세상에나!” 반짝반짝 빛나는 워키토키 무전기가 있는 거야. 장난감이 귀하던 시절이었는데 촌 동네 시골 아이들에게 워키토키는 가장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지.
그때 텔레비전에서 최불암이라는 배우가 주연하던 ‘수사반장’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이드라마를 시청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시리즈야. 또 ‘전우’라는 반공 드라마도 큰 인기를 얻었지. 범죄와 전쟁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랫동네 아이들과 나무로 가짜 총을 만들어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전쟁놀이를 하곤 했어. 최불암 아저씨를 좋아해서 ‘나도 커서 형사가 되어야지’라고 미래의 꿈을 그려보기도 했단다.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노점상 아저씨가 꿈에 그리던 워키토키 무전기를 팔고 있었어. 그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워키토키를 공짜로 가져갈 수 있다는 거야. 20권짜리 한국역사전집을 사게 되면 10권짜리 삼국지 전집과 워키토키 두 대를 무료로 준다고 하더군. 그것도 당장 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대신 부모님 이름과 집 주소를 카드에 적어주면 워키토키를 당장 집에 가져갈 수 있고, 역사전집과 삼국지 책은 며칠 후 집으로 배달해준다고 하시더라고.
책을 잘 읽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책이나 삼국지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지. 대신, 그 멋진 워키토키를 받아서 다음날 전쟁놀이할 때 갖고 놀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 거야. 그래서 덜컥 계약을 해버렸지. 나 말고도 여러 명의 아이가 계약하더라고. 아이들이 너도나도 사니까 좀 대담해져서 나중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거지.
노란색 워키토키 두 대를 들고 집에 가는데 너무 신났단다. “와! 내일 동네 근영이 형과 근수에게 자랑해야지”라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지. 집에 가는 내내 두 손에 들고 있던 워키토키에서 한시도 눈을 뗄수가 없었어.

집에 돌아와서는 조금 걱정이 되더라고. 부모님이 “그거 어디서 났어?”라고 물어보시면 곤란하니까 살림살이와 쌀을 넣어두는 광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지. 그리고는 이웃집 아이들과 목장 산에 올라가 전쟁 놀이를 할 때나 학교에 갈 때 몰래 꺼내서 갖고 놀곤 했었어.
사건은 며칠 뒤 터지고 말았어. 워키토키를 준 아저씨가 털털거리는 신작로를 따라 ‘딸딸이’ 오토바이를 타고 한국역사전집 20권과 삼국지 10권을 집으로 배달해준 거야. 당연히 부모님은 주문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겠지. 그런데 그 월부장사 아저씨가 계약서를 들이대고 다짜고짜 책을 놓고 간 거야. 아마 협박도 했겠지. “이거 안 사게 되면 큰일난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부모님이 제대로 따지기나 했겠어? 할 수 없이 책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날 이후로 월부장사 키다리 아저씨는 매달 노란색 월부 카드를 들고 돈을 받으러 오셨어. 책이 집에 배달되는 날 엄청 혼나서 뒷산에 만들어 놓은 아지트 오두막으로 피신을 가야 했지. 문제는 매달 오천 원의 월부금을 받으러 올 때마다 또 혼이 났다는 거야. 그때 오천 원은 아주 큰 가치가 있었단다. 특히 현금이 부족한 시골에서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어. 아이들 여럿을 힘겹게 키우던 부모님에게 심각한 경제적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노란색 월부 카드와 통통거리던 아저씨의 오토바이 소리, 그리고 잔뜩 화가 나 계셨던 부모님의 얼굴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단다. 월부장사 아저씨가 오시기 며칠 전부터 소화가 잘 안 되고 불안해지더라고. 아저씨가 매달 같은 날 오시기 때문에 미리 계산해 두었다가 일부러 집에 늦게 오거나 산속으로 피신을 가곤 했었지.
한 달쯤 지난 후 옅은 녹색 책장에 꽂아 두었던 삼국지 책을 읽기 시작했어. 어차피 저질러진 일이니까 다시 책을 반납할 수도 없던 상황이었어. 그래서 “비싼 돈 주고 산 책이고 이것 때문에 맨날 혼나는데 읽기라도 하자”라는 마음이 생기더라고.
삼국지 책을 읽다 보니 이야기 속에 점점 빠져들게 되더라고. 유비와 관우, 장비, 제갈량, 조조와 사마염 같은 수많은 인물을 만나게 되고, 긴장감 넘치는 전쟁과 혀를 내두르는 책략, 신의와 배신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마치 책 내용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다가왔어. 훌륭한 주군 유비의 인격에 감탄하게 되고, 용맹한 장수들의 무용담에 눈을 뗄 수가 없었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드라마나 토요 명화만큼 재미가 있더라고.
나른한 오후, 삼국지를 다 읽고 나서 심심하던 차에 책장에 있던 역사 전집 첫 번째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지. 연두색 책표지에 조잡하게 디자인이 된 책이었어. 지은이도 정확히 누군지 모르겠고 유명 출판사가 발행한 책 같지는 않았어. 하여튼 첫 장을 펴는 순간 단군신화부터 고조선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적혀 있었단다.
첫 번째 책을 다 읽은 후 두 번째, 세 번째, 그러다 보니 전집 20권을 모조리 읽게 된 거야. 한국의 역사를 고대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 그리고 현대에게 이르기까지 생생히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단다.
그 후 집에 다른 책이 별로 없어서 삼국지와 역사전집을 수십 번 읽게 되었어. 하도 읽으니까 나중에는 책이 너덜너덜해지더라고. 그 책을 검은색 전기 테이프로 붙여서 읽고 또 읽곤 했지. 머릿 속에서 책 내용이 파노라마 드라마처럼 기억이 날 정도가 되었단다.
할부기간 12개월이 다 끝나서 드디어 월부금의 공포에서 해방이 되었단다. 얼마나 기쁘던지! 솔방울을 따서 떡방앗간에 팔고 미꾸라지를 아랫동네 메기 양식장에 납품하면서 받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좀 보태기도 했었지. “그래도 양심이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대부분 월부금은 부모님의 팍팍한 주머니에서 나오긴 했지만, 나도 뿌듯한 마음이 들더라고. 그리고 이제는 매달 혼나는 일도 없어지게 되니까 십 년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느낌이었어. 책도 완전히 내 것이 되었잖아!

그런데 나중에 놀라운 일이 생긴 거야. 중학교에 들어가서 국사라는 과목의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첫 번째 시험에서 백 점을 맞은 거야. 물론 수학과 같은 다른 과목은 점수가 낮았지만, 유독 국사에서만 탁월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거야. 당연히 역사책 이십 권을 너덜너덜 해어질 때까지 읽은 덕이었어. 평생 어떤 시험에서 만점을 맞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국사시험 점수는 기적이었던 거지.
백 점 맞은 시험지를 자랑스럽게 가방에 넣고 집에 돌아왔어. 부모님에게 엄청 자랑했지. 보란 듯이 말이야. 일 년 내내 꾸중을 들을 보람이 생기더라고. 한동안 낡은 책상 위에 시험지를 붙여놓고 매일 매일 쳐다보곤 했단다.
놀라운 변화는 삼국지와 역사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다른 책에도 관심이 생겼던 거야.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에 학급마다 문고가 있었어. 담임이셨던 김기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게 하려고 ‘독서장’이라는 조그만 명찰을 읍내에서 사 오셔서 매달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아이들에게 시상하곤 했지.
책 읽는 습관이 생긴 데다가 독서장을 받을 욕심으로 열심히 학급 문고에서 책을 빌려다가 읽기 시작했어. ‘80 간의 세계 일주’, ‘피노키오’, 신밧드의 모험과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으로 유명한 천일야화’를 밤새도록 읽었던 기억이 난단다. 그 덕분에 매달 독서장을 받으며 자존감이 쑥쑥 자라게 되었던 거야. 지식과 교양도 부쩍 늘게 되었단다.
워키토키를 갖고 싶었던 욕심에서 시작되었지만, 역사전집과 삼국지 책은 오히려 책을 읽는 습관을 갖게 했단다. 한 번 시작된 좋은 습관은 평생 간직하게 되면 이득이 많단다. 책 읽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다른 학과 공부에도 흥미를 붙이게 된 거야. 학교 수업에도 열심히 참여하게 되고 성적도 조금씩 올라가게 되었어. 암기력이 좋아져서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암기과목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가 있었지.
안 좋은 일이나 실수를 하게 되면 계속 후회를 하고 화를 품는 경우가 종종 생긴단다. 그러면 마음속에 앙금이 오래 남지. 대신, 얼른 받아들이게 되면 마음도 훨씬 편해지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득이 생겨나기도한단다.
세상의 모든 일이나 현상에는 좋고 나쁨이 동시에 존재한단다. 나쁜 것을 잘 인내하며 받아들이고, 좋은 점에 마음을 두게 되면 모든 것이 좋을 수 있단다. 잠시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인격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고 겸손도 덤으로 배울 수가 있게 된단다.
그때 갖고 놀던 워키토키는 금방 고장 나서 버렸지만, 책을 읽으면서 얻은 지식과 좋은 습관은 지금도 늘 간직하고 있단다.
글 윤성민 박사
에스카사 편집부
수업이 끝난 후 초등학교 앞은 늘 잡상인들로 북적였단다. 빨간색 고무대야에 옥수수와 떡을 한가득 담아와 파는 나이든 촌부와 호박맛 쫀드기와 아폴로 같은 불량식품을 파는 젊은 아낙네는 매일 어김없이 같은 자리에 앉아 배고픈 아이들에게 손짓하곤 했지. 키다리 아저씨가 팔던 신밧드의 모험과 프로야구단 종이 딱지는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놀잇거리였단다.
여느 때와 같이 학교 정문을 나서서 집에 가는데 유난히 아이들로 북적이던 행상이 눈에 들어왔어. 호기심에 “무엇을 파는 곳인가?” 하고 가봤더니, “세상에나!” 반짝반짝 빛나는 워키토키 무전기가 있는 거야. 장난감이 귀하던 시절이었는데 촌 동네 시골 아이들에게 워키토키는 가장 갖고 싶었던 물건이었지.
그때 텔레비전에서 최불암이라는 배우가 주연하던 ‘수사반장’이라는 텔레비전 드라마가 큰 인기를 끌고 있었어. 전 국민의 절반 이상이 이드라마를 시청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시리즈야. 또 ‘전우’라는 반공 드라마도 큰 인기를 얻었지. 범죄와 전쟁드라마를 재미있게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아랫동네 아이들과 나무로 가짜 총을 만들어 산과 들을 뛰어다니며 전쟁놀이를 하곤 했어. 최불암 아저씨를 좋아해서 ‘나도 커서 형사가 되어야지’라고 미래의 꿈을 그려보기도 했단다.
그런데 내 눈앞에 있는 노점상 아저씨가 꿈에 그리던 워키토키 무전기를 팔고 있었어. 그 아저씨의 말에 의하면 워키토키를 공짜로 가져갈 수 있다는 거야. 20권짜리 한국역사전집을 사게 되면 10권짜리 삼국지 전집과 워키토키 두 대를 무료로 준다고 하더군. 그것도 당장 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말이야. 대신 부모님 이름과 집 주소를 카드에 적어주면 워키토키를 당장 집에 가져갈 수 있고, 역사전집과 삼국지 책은 며칠 후 집으로 배달해준다고 하시더라고.
책을 잘 읽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책이나 삼국지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지. 대신, 그 멋진 워키토키를 받아서 다음날 전쟁놀이할 때 갖고 놀면 너무 재미있을 것 같은 거야. 그래서 덜컥 계약을 해버렸지. 나 말고도 여러 명의 아이가 계약하더라고. 아이들이 너도나도 사니까 좀 대담해져서 나중 일은 생각도 하지 않았던 거지.
노란색 워키토키 두 대를 들고 집에 가는데 너무 신났단다. “와! 내일 동네 근영이 형과 근수에게 자랑해야지”라는 생각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지. 집에 가는 내내 두 손에 들고 있던 워키토키에서 한시도 눈을 뗄수가 없었어.
집에 돌아와서는 조금 걱정이 되더라고. 부모님이 “그거 어디서 났어?”라고 물어보시면 곤란하니까 살림살이와 쌀을 넣어두는 광 깊숙한 곳에 숨겨놓았지. 그리고는 이웃집 아이들과 목장 산에 올라가 전쟁 놀이를 할 때나 학교에 갈 때 몰래 꺼내서 갖고 놀곤 했었어.
사건은 며칠 뒤 터지고 말았어. 워키토키를 준 아저씨가 털털거리는 신작로를 따라 ‘딸딸이’ 오토바이를 타고 한국역사전집 20권과 삼국지 10권을 집으로 배달해준 거야. 당연히 부모님은 주문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겠지. 그런데 그 월부장사 아저씨가 계약서를 들이대고 다짜고짜 책을 놓고 간 거야. 아마 협박도 했겠지. “이거 안 사게 되면 큰일난다고.”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한 부모님이 제대로 따지기나 했겠어? 할 수 없이 책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거야.
그날 이후로 월부장사 키다리 아저씨는 매달 노란색 월부 카드를 들고 돈을 받으러 오셨어. 책이 집에 배달되는 날 엄청 혼나서 뒷산에 만들어 놓은 아지트 오두막으로 피신을 가야 했지. 문제는 매달 오천 원의 월부금을 받으러 올 때마다 또 혼이 났다는 거야. 그때 오천 원은 아주 큰 가치가 있었단다. 특히 현금이 부족한 시골에서는 어마어마한 돈이었어. 아이들 여럿을 힘겹게 키우던 부모님에게 심각한 경제적 타격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거야.
노란색 월부 카드와 통통거리던 아저씨의 오토바이 소리, 그리고 잔뜩 화가 나 계셨던 부모님의 얼굴이 지금도 또렷이 기억난단다. 월부장사 아저씨가 오시기 며칠 전부터 소화가 잘 안 되고 불안해지더라고. 아저씨가 매달 같은 날 오시기 때문에 미리 계산해 두었다가 일부러 집에 늦게 오거나 산속으로 피신을 가곤 했었지.
한 달쯤 지난 후 옅은 녹색 책장에 꽂아 두었던 삼국지 책을 읽기 시작했어. 어차피 저질러진 일이니까 다시 책을 반납할 수도 없던 상황이었어. 그래서 “비싼 돈 주고 산 책이고 이것 때문에 맨날 혼나는데 읽기라도 하자”라는 마음이 생기더라고.
삼국지 책을 읽다 보니 이야기 속에 점점 빠져들게 되더라고. 유비와 관우, 장비, 제갈량, 조조와 사마염 같은 수많은 인물을 만나게 되고, 긴장감 넘치는 전쟁과 혀를 내두르는 책략, 신의와 배신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마치 책 내용이 실제 일어나고 있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다가왔어. 훌륭한 주군 유비의 인격에 감탄하게 되고, 용맹한 장수들의 무용담에 눈을 뗄 수가 없었지. 텔레비전에 나오는 드라마나 토요 명화만큼 재미가 있더라고.
나른한 오후, 삼국지를 다 읽고 나서 심심하던 차에 책장에 있던 역사 전집 첫 번째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지. 연두색 책표지에 조잡하게 디자인이 된 책이었어. 지은이도 정확히 누군지 모르겠고 유명 출판사가 발행한 책 같지는 않았어. 하여튼 첫 장을 펴는 순간 단군신화부터 고조선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재미있는 역사적 사건들이 적혀 있었단다.
첫 번째 책을 다 읽은 후 두 번째, 세 번째, 그러다 보니 전집 20권을 모조리 읽게 된 거야. 한국의 역사를 고대시대부터, 삼국시대, 고려, 조선, 그리고 현대에게 이르기까지 생생히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단다.
그 후 집에 다른 책이 별로 없어서 삼국지와 역사전집을 수십 번 읽게 되었어. 하도 읽으니까 나중에는 책이 너덜너덜해지더라고. 그 책을 검은색 전기 테이프로 붙여서 읽고 또 읽곤 했지. 머릿 속에서 책 내용이 파노라마 드라마처럼 기억이 날 정도가 되었단다.
할부기간 12개월이 다 끝나서 드디어 월부금의 공포에서 해방이 되었단다. 얼마나 기쁘던지! 솔방울을 따서 떡방앗간에 팔고 미꾸라지를 아랫동네 메기 양식장에 납품하면서 받은 얼마 안 되는 돈을 좀 보태기도 했었지. “그래도 양심이 있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대부분 월부금은 부모님의 팍팍한 주머니에서 나오긴 했지만, 나도 뿌듯한 마음이 들더라고. 그리고 이제는 매달 혼나는 일도 없어지게 되니까 십 년묵은 체증이 가라앉는 느낌이었어. 책도 완전히 내 것이 되었잖아!
그런데 나중에 놀라운 일이 생긴 거야. 중학교에 들어가서 국사라는 과목의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내가 첫 번째 시험에서 백 점을 맞은 거야. 물론 수학과 같은 다른 과목은 점수가 낮았지만, 유독 국사에서만 탁월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 거야. 당연히 역사책 이십 권을 너덜너덜 해어질 때까지 읽은 덕이었어. 평생 어떤 시험에서 만점을 맞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국사시험 점수는 기적이었던 거지.
백 점 맞은 시험지를 자랑스럽게 가방에 넣고 집에 돌아왔어. 부모님에게 엄청 자랑했지. 보란 듯이 말이야. 일 년 내내 꾸중을 들을 보람이 생기더라고. 한동안 낡은 책상 위에 시험지를 붙여놓고 매일 매일 쳐다보곤 했단다.
놀라운 변화는 삼국지와 역사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다른 책에도 관심이 생겼던 거야. 다니던 시골 초등학교에 학급마다 문고가 있었어. 담임이셨던 김기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책을 많이 읽게 하려고 ‘독서장’이라는 조그만 명찰을 읍내에서 사 오셔서 매달 책을 가장 많이 읽는 아이들에게 시상하곤 했지.
책 읽는 습관이 생긴 데다가 독서장을 받을 욕심으로 열심히 학급 문고에서 책을 빌려다가 읽기 시작했어. ‘80 간의 세계 일주’, ‘피노키오’, 신밧드의 모험과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으로 유명한 천일야화’를 밤새도록 읽었던 기억이 난단다. 그 덕분에 매달 독서장을 받으며 자존감이 쑥쑥 자라게 되었던 거야. 지식과 교양도 부쩍 늘게 되었단다.
워키토키를 갖고 싶었던 욕심에서 시작되었지만, 역사전집과 삼국지 책은 오히려 책을 읽는 습관을 갖게 했단다. 한 번 시작된 좋은 습관은 평생 간직하게 되면 이득이 많단다. 책 읽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되면서 다른 학과 공부에도 흥미를 붙이게 된 거야. 학교 수업에도 열심히 참여하게 되고 성적도 조금씩 올라가게 되었어. 암기력이 좋아져서 중학교, 고등학교 내내 암기과목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받을 수가 있었지.
안 좋은 일이나 실수를 하게 되면 계속 후회를 하고 화를 품는 경우가 종종 생긴단다. 그러면 마음속에 앙금이 오래 남지. 대신, 얼른 받아들이게 되면 마음도 훨씬 편해지고 생각지도 못했던 이득이 생겨나기도한단다.
세상의 모든 일이나 현상에는 좋고 나쁨이 동시에 존재한단다. 나쁜 것을 잘 인내하며 받아들이고, 좋은 점에 마음을 두게 되면 모든 것이 좋을 수 있단다. 잠시 어려움을 겪게 되지만 인격이 성장하는 것을 경험할 수가 있고 겸손도 덤으로 배울 수가 있게 된단다.
그때 갖고 놀던 워키토키는 금방 고장 나서 버렸지만, 책을 읽으면서 얻은 지식과 좋은 습관은 지금도 늘 간직하고 있단다.
글 윤성민 박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