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11) 너는 왜 안 놀아?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11) 너는 왜 안 놀아?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드디어 중학생이 되었단다. 달라진 건, 졸업한 초등학교에서 바로 건너편 위치한 중학교 건물로 등교하는 것뿐이었어. 여전히 공부는 뒷전으로 밀어 놓고 매일 놀러 다니는 데 온 정신이 팔렸었지. 수업이 끝난 후 널찍한 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신나게 축구를하거나, 새로 만난 친구들과 동네 개울가로 고기를 잡으러 다니곤 했어.

중학교 1학년이 된 지 몇 달이 지날 무렵, 같은 반 짝꿍인 기철이네 집에 놀러 갔단다. 기철이는 반에서뿐만 아니라 전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던 학생이었어. 그뿐만 아니라, 아이템플이라는 모의고사가 있었는데, 나라 전체에서 한번 시험에 몇만 명씩 응시하는 전국적인 시험이었지. 기철이는 그 시험에서도 매번 전국 1등을 차지하던 수재였단다. 인구가 몇 천명밖에 되지 않는 두메 시골 마을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지. 백 년에 한 번 날까 말까 하는 천재적인 학생이었어.



기철이 집은 넓은 들판 한가운데 있었는데 큼지막한 나무 대문이 매우 인상적인 기와집이었단다. 넓은 안뜰을 지나면 커다란 마루가 있었고 그 주변은 많은 방으로 둘러싸여 있었어. 그 큰 집에는 식구들이 많이 살지 않았던 것같아. 집에 놀러 가 보면 아무도 만날 수가 없었어. 기철이 부모님을 뵌 적도 없고 함께 누가 사는지도 알 수가 없었단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기철이 아버지가 농림수산부라는 중앙 정부부처에 차관으로 일하신 고위공무원이었는데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지. 동네에는 봄∙여름∙가을∙겨울 상관없이 사계절 내내 긴밍크코트를 입은 채 분홍색 보따리를 손에 쥐고 매일 십 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읍내에 다녀오던 동네 아주머니가 한 분 계셨어. 이상한 행색 때문에 동네 아이들이 미친 여자라고 놀리곤 했었단다. 동네 사람들은 그 아주머니가 기철이의 고모라고 믿고 있었지. 지금 생각해보면 조현병(정신분열증)이라는 정신질환이 있는 분이셨던 것 같아. 그때에는 정신질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단지 정신이 나간 미친 사람으로 여겨졌고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하신 거지. 지금도 한 여름날 두꺼운 겨울 코트를 입으시고 길에 걸어가시던 아주머니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 있단다. 지금이라면 잘 치료받고 회복하셨을 수 있는데 아주 안타까운 일이었단다.



어느 날은 동네 아이들이 길을 걸어가시던 아주머니를 “미친 여자래요” “미친 여자래요” 하면서 놀려대길래 내가 하지 말라고 야단을 친 적이있었지. 내 짝꿍 친척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놀린다는 생각에 화가 무척 치밀어 올랐었어. 집에 돌아와서 부모님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더니, 그분은 머리가 아주 좋은 사람인데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갑작스럽게 미치게 되었다는 거야. 그 후로는 길을 걸어가시던 아주머니를 만나면 꾸벅 인사를 하곤 했단다.

기철이 집 마루에 걸터앉아 놀 생각에 신나하고 있었어. 그런데 기철이는 큼지막한 책가방을 열어 교과서, 참고서, 노트 필기한 공책을 꺼내더니만 다른 깨끗한 공책에다가 그날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깨알같이 요약하는 거야. 그런 광경을 처음 봤어. 너무 신기한 나머지 “기철아! 너 뭐 하니?”“너는 왜 안 놀아?”라고 물어봤지. 기철이는 빙그레 웃더니만 “응, 이거 오늘 배운 내용을 다시 복습하면서 새 공책에 요약정리하는 거야”라고 말해주었단다. “너도 학교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는 꼭 배울 내용을 읽어보고 수업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날 배운 내용을 다시 복습해 봐”라는 조언도 덧붙였어.

기철이의 요약 공책을 자세히 들여다봤더니만, 글씨는 또 얼마나 잘 쓰는 지! 지금껏 그렇게 글씨를 또박또박 이쁘게 적는 아이를 만난 건 기철이가 처음이었을 거야. 부모님에게 한 번도 공부하라는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너무 글씨를 개발새발 흘려 써서 아무도 알아볼 수 없다고 종종 꾸중을 들은 적이 많았거든. 그래서인지 글씨를 너무 잘 쓰는 기철이가 무척 부러웠단다. 한참이 지난 후 방과 후 복습을 다 끝낸 기철이와 신나게 놀고는 집에 놀아왔단다.

집 마루에 앉아 있으니 갑작스러운 문화적 충격을 받아서인지 여러 생각이 교차했단다. 마음속에는 “나도 기철이처럼 글씨를 잘 쓰고 싶어”, 그리고 “나도 예습 복습을 해서 기철이처럼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 기철이는 어디 가도 선생님과 동네 어른들에게 공부 잘하는 천재로 칭찬을 받곤 했거든. 칭찬이라고는 별로 받아본 적도 없고, 또 매 시험에서 중간 이하의 등수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던 내게 기철이는 우상과도 같은 존재로 여겨졌단다.

그 후 기철이를 좀 닮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짝꿍으로 매일 같이 수업을 듣고 시간을 보내다 보니 자연스럽게 기철이의 말투, 글씨, 공부하는 습관을 점점 닮아가게 되었어. 한두 달이 지난 후 학교 기말고사를 치르는 날이 되었단다. 예전보다는 준비를 많이 했기 때문에 제법 아는 문제가 많이 나와서 수월하게 시험을 볼 수가 있었어.

며칠 후 교실에 들어오신 선생님이 갑자기 내 이름을 부르더니 일어나라고 하시는 거야. “윤성민, 일어나봐라” 난, 영문도 모른 채 뭐 또 혼날 일이있나 걱정이 되기도 해서 불안한 마음으로 벌떡 일어났지. 선생님은 “이번 시험에서 가장 성적이 많이 오른 학생이 바로 윤성민이다.” “이번 기말고사에서 성민이가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다.” “다 같이 손뼉을 치자” 선생님과 반 아이들의 축하를 받으니까 기분이 무척 좋아지더라고. 생전 처음 공부로 칭찬을 받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거야.

집에 돌아와서는 부모님에게 성적이 올라서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는 사실과 기철이라는 친구 때문에 갑자기 성적이 올랐다는 이야기를 해드렸지. 부모님은 “그 아이가 천재이고 배울 게 많으니 친하게 지내라”라고 격려하시는 거야. 하여튼 그 날은 잠 못 이를 정도로 기분이 좋은 하루였단다.

작은 성취에 기분이 좋아지니까 다음에도 이런 생각이 들었단다. “공부를 해 보니까 잘하면 칭찬을 받는구나!” “나도 공부를 하니까 실력이 느네” 참 신기한 일이었지만 그 후로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학생이 되었단다. 수학같이 기초가 튼튼해야 잘 할 수 있는 과목에서는 여전히 높은 점수를 받지는 못했지만, 역사, 사회, 지리와 같이 열심히 암기해야 하는 과목에서는 반에서 제일 높은 점수를 받곤 했었지.

다음 학기 중간고사를 치르기 하루 전날, 기철이는 나를 조용히 부르더니만 “너, 혹시라도 내가 암기 과목에서 모르는 문제가 있으면 보여줄래?”“내가 수학 답안지를 보여줄 게” 기철이가 나에게 부정행위를 하자고 제안을 해 온 거야. 세상에나, 전국 1등 하는 아이와 내가 커닝(부정행위) 파트너로 인정을 받게 된 거야. 기철이는 모든 과목에서 백 점을 맞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완벽주의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한 문제라도 틀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거야. 그 중간고사에서 기철이 수학 답안지를 보고는 내 수학 점수가 많이 올라갔지. 기철이는 내게 답안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았어. 기철이는 그 시험에서도 모든 과목에서 백 점을 맞았단다. 지금은 부정행위를 한 것이 무척 부끄럽단다. 그 덕분에 갑자기 반에서 등수가 엄청 올라갔지만 말이야. 그 후로는 부정행위를 하지 않고 스스로 공부해서 좋은 성적을 얻게 되었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나는 공부 좀 하는 아이들을 따라서 멀리 대전이라는 큰 도시에 있는 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 천재들만 간다는 공주사대부고에 갈 실력에는 조금 못 미쳤지만, 대전에 있는 학교에는 들어갈 실력을 키울 수가 있었단다. 하지만 대전에서 학교를 다니게 되면 하숙비와 생활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고향에 달랑 하나 있던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단다. 반면, 기철이는 공부를 잘해서 대전에 있는 과학고등학교에 입학했어.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는 월반을 해서 전국에서 모인 수재들만 갈 수 있다는 한국과학기술대학교 (카이스트 KAIST: Korean Advanced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logy)에 입학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단다.

고향에서 시골 고등학교에 다니던 우리에게 기철이는 범접할 수 없는 우상 같은 존재였단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여름방학 어느 날 이미 카이스트 대학생이 된 기철이를 만난 적이 있었지. 고딩(고등학생)이던 우리와는 달리 긴 머리 장발을 하고는 담배를 연신 피워대는 거야. 학교에서 담배 피우면 선생님에게 죽도록 얻어맞던 시절이라 엄두도 못 낼 일을 기철이는 대학생이 되어 마음껏 할 수가 있었던 것 같았어. 지금도 담배를 한 번도 피워본 적이 없지만, 그때 기철이가 나와는 다른 어른 같은 존재, 자유를 누리는 멋진 인격체라는 생각을 잠시 했었단다. 대학에서 무슨 공부를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연신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로 설명을 하더라고. 지금기억에 남는 것은 졸업하고는 벤처기업을 창립할 생각이라고 하더라고. 그 당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대기업이나 공무원이 직장으로 인기가 있었는데 갑자기 이름도 없는 벤처기업을 한다길래 좀 의아하게 생각했었단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등학문과 지식을 습득해서 남들보다 또 시대보다 훨씬 앞서가던 진정한 천재가 아니었다 싶다.

그 후 기철이와는 연락이 끊겨서 어디에서 사는지 또 어떤 일을 하는지 알수가 없단다. 그런데도 늘 고마운 생각을 마음 한쪽에 간직하고 있단다. 여러 번 네이버로 이름과 학력을 쳐서 어디서 일하고 있는지 찾아보곤 했단다. 가장 비슷한 사람이 모 대기업 연구소에 일하고 있다는 검색결과를 얻었어. 나중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꼭 직접 만나서 “내가 너 때문에 사람이 되었어” “그때 정말 고마웠어”라고 말해주고 싶단다. 아마, 기철이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를 수 있겠지. 그냥 스쳐 지나가면서 몇 마디 도움을 준 것뿐인데 그것이 한 사람의 인생을 많이 바꿔놓았으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할 거야.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평소 공부에 흥미가 없었는데, 전국 수재인 친구를 짝꿍으로 만나 공부하는 방법을 배워 전보다 공부를 훨씬 잘하게 되었단다. 우리에게 어떤 친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지. 친구의 옷차림, 생각, 말투, 행동까지 나도 모르는 새 닮아가기 때문이란다. 주변에는 좋은 친구들이나 멘토들이 많이 있단다. 그 사람을 알아보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 그런 좋은 사람들과 우정을 쌓고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지식을 쌓고 학위를 취득하는 것 못지않은 소중한 자산이란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