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현대 무용의 선구자 한국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

아시아 현대 무용의 선구자 한국의 이사도라 던컨 최승희


예술가의 삶을 불꽃에 비유하는 것은 상투적이고 안이한 표현이다.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예술가 중에 한순간 뜨겁지 않고 찬란하지 않은 삶을 살다간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한국 현대 무용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이자 한국을 넘어 동시대 아시아 최고의 춤꾼으로 평가받는 최승희의 일생을 표현하기 위해 불꽃 이외의 단어를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2006년 발매된 최승희 자서전의 제목이 <불꽃>인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최승희는 뜨거운 논란의 인물이었으며 명암 역시 뚜렷한 평가를 받았다. 성공을 위해 스승을 버렸고 사치와 허영이 심했다는 인격적인 비난도 받았던 월북 무용가 최승희. 일본 강점기와 분단의 시대를 살다간 그녀의 행적은 보는 이의 이념적 시각에 따라 찬사가 아닌 격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했다. 일본 강점기를 지내온 한국 근대 문학의 거장 중 친일 논란에 휩쓸리지 않은 작가가 드물다. 

북한 예술가들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오랫동안 지배받아 온 한국 사회에서 정당한 예술적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다. 이 모두가 격동의 시대를 지나면서 떠안게 된 당연한 시대의 산물이다. 월북 작가에 대한 정당과 부당한 평가를 말하기 이전에 그 이름조차 공개적으로 거론되는 것조차 금기시 되던 시대가 그리오래전이 아니다. 최승희는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함께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이기도 하다. 에스카사의 인물탐구 이번 호에서는 한국의 이사도라 덩컨으로 불리는 격정의 춤꾼 최승희를 조명한다.



무용가로서의 최승희 성장기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난(1969년 8월 8일 사망) 북한의 무용가이자 안무가이다. 최승희의 집안은 정승 판서를 지낸 명문가 출신으로 부친은 봉건시대 전형적인 한학자였지만 자녀 교육엔 개방적이어서 4남매 모두 신식교육을 받게 했다. 최승희는 숙명 여학교를 나왔다. 하지만 학창시절, 명문가 집안이 기울어 극심한 가난을 겪었다. 일부 연구자들은 최승희가 어린 시절 가난의 트라우마로 무용가로 성공한 이후 매우 인색해졌고 그로 인해 남편과 형제들과의 사이가 멀어졌다고 기술한다.


최승희는 1926년 일본의 대 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문하에 들어가 무용을 시작했다. 유명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을 시샘했음인지 숙명여고 동창 중 일부는 그녀가 돈에 팔려 기생으로 일본에 갔다는 헛소문을 내기도 했다. 그녀에 대한 논란과 험담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셈이다. 이런 헛소문과는 상관없이 최승희는 이시이 바쿠의 무용단에서 점점 명성을 얻기 시작했고 경성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만들어 독립했다. 당시 이시이 바쿠가 병들어 무용단이 쇠락하던 시기였고, 무용단에 남아 달라는 스승의 부탁을 거절했다는 세간의 비난을 무릅쓰고 내린 결단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남편 안 막이 구속되고, 임신과 출산 후유증으로 급성늑막염 까지 앓으면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자 결국 다시 스승인 이시이 바쿠에게 돌아갔다. 그 뒤 몇 년간 일본에서 활동할 기반을 쌓은 후 다시 독립하였고, 1932년 일본에서 첫 단독 공연을 한 이후 ‘최승희 후원회’가 만들어져서 여운형, 마해송,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거물급 인사들이 후원을 받으며 전성기를 시작한다. 최승희는 지방의 춤꾼은 물론 기생들을 찾아다니면서까지 전통춤을 배울 정도로 열의가 있었다. 그리하여 전통과 현대무용을 융합한 신무용의 창시자가 되었고, 현재까지 한국과 북한 그리고 중국의 무용계에 지대한영향을 미쳤다. 한국의 본격적인 현대무용은 최승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전성기 그리고 친일 논란
최승희는 193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유럽, 남미 등으로 세계순회공연을 하러 다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콕토, 게리 쿠퍼,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로버트 테일러 등의 저명인사들이 그녀의 공연을 관람했다. 이러한 인기와 함께 대표적인 신여성이자 모던걸, 패션 스타로서 조선과 일본의 유행을 주도하였다. 또한, 여러 장의 음반을 발표하고<반도의 무희> 등을 포함 한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이 시기가 그녀의 최고 전성기였다.


하지만 이 시기 그녀의 친일행각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1940년대 들어서 최승희는 일본군 위문공연에 출연하고 국방헌금도 여러 번 내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보를 펼쳤다. 그래서 광복 이후에 친일파로 비난을 받았고 2008년에는 민족문제연구소가 편찬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올랐다. 일부 지인들은 본인의 자발적인 행보가 아닌 강요였고 실제로 최승희가 민족 운동에 지원했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지만 객관적인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친일행각 못지않게 그녀의 인성 역시 후대에 시비를 일으켰다. 최승희를 독선적인 성격으로 말한 지인들이 적지 않다. 세계순회공연에 제자를 일본에 혼자 남겨 자신의 딸을 돌보게 하고 이에 불만을 품자 쫓아낸 일, 제자들에게 자신의 발을 씻기게 한 일, 한 인터뷰에서 ‘팬레터를 받으면 대충 보고 그냥 던져 버린다.’라고 태연히 말한 일, 심지어는 조선인 관객들이 공연 도중 소리를 낸다고 추던 춤을 중단하고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낸 일 등.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요즘 헐리우드 스타들과 한국 유명 연예인 중에도 인기와 재능과는 어긋나는 괴팍하고 독선적인 기행의 주인공들이 얼마든지 있다. 권위주의와 봉건주의가 고스란히 남아있던 1940년대 최고 스타로서의 그녀의 위상을 생각하면 ‘아랫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공연 문화에 무지한 팬들에 대한 짜증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는 부분이다.



북한 무용가 최승희
1945년 해방이 되었다. 중국에 있던 남편 안 막은 청년 시절부터 사회주의를 신봉했다. 결국, 안 막은 중국 내 조선인 공산군과 함께 평양으로 향했다. 한편, 최승희는 이듬해 김백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중국 천진에서 조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했다. 친일파로 몰린 최승희는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다.

“일본이 우리 민족의 정신과 전통을 뺏으려고 할 때, 나는 우리 민족의 정신을 북돋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이것이 국내에서건 국외에서건내가 조선의 딸로 걸어온 길이었습니다.”


최승희는 남편의 강력한 요청을 받고 1946년 7월 38선을 넘어 북으로갔다. 즉 먼저 북에 간 남편 안 막의 간청, 그리고 서울에 있으면 친일파로 처벌받을 것을 우려한 것이 그녀의 월북 동기였다고 평가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최승희는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김백봉과 함께 김일성을 만나러 갔다. 최승희의 애제자이자 최승희 못지않은 한국 현대 무용사의 대가 김백봉의 증언에 따르면 김일성은 ‘최승희 동무 살러 왔소, 다니러 왔소’라고 물었다. 김일성은 ‘살러 왔다’라는 최승희에게 원하던 대로 대동강변 요정이었던 동일관 자리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주었다. 

북한에서도 최승희는 국제적인 활동을 했다. 무용동맹위원회 위원장이 된 최승희는 1950년 6월 초 2백 명의 대규모 예술단과 역시 단원이었던 딸 성희를 데리고 모스크바에 갔다. 소련 각지를 돌며 공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다. 6.25 전쟁 때 평양이 유엔군에 점령되면서 최승희무용연구소 건물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최승희는 1952년 김일성과 주은래의 배려로 중국 북경에 오게 되었다. 중국 고전무용을 발굴하고 현대화하는 데 힘을 쏟아 지금은 중국을 대표하는 두 가지 대표 유형 중 하나인 최승희류를 창시했다.


전쟁이 끝나자 최승희는 평양으로 돌아갔다. 1954년 남편 안 막은 문화부 부부장으로 승진되었고, 2년 뒤에는 문화선전부 부부장의 자리까지 올랐다. 당시 부부의 위세는 대단했다. 그러나 1959년 최승희 가족에게 불행이 닥쳐왔다. 북한 정권 내부에서 대규모 숙청이 단행된 것이다. 안 막도 이때 숙청당해 강제노동 끝에 사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최승희는 1969년 북한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다. 정확한 죽음의 원인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북한에서의 일이기 때문에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최승희의 제자로 북한에 함께 있었고 2003년 탈북한 김영순이 당시의 상황을 옆에서 지켜본 인물로 꼽힌다. 

김영순에 따르면, 최승희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1967년 무용극 ‘사도성의 이야기’가 내용상의 문제로 사상투쟁의 대상이 된 후부터다. 최승희는 그 뒤로 무대를 떠났고 2년 뒤 사망했다. 어느 광산에서 데모하다가 총살당했다는 흉문이 들리기도 했다. 최승희가 숙청당한 시기는 북한이 문화예술 분야에서 복고주의와 봉건주의 잔재를 뿌리 뽑기 위한 일대 숙청과 단속을 강화했던 시기와 같다. 중국의 문화 혁명 시기와 같다. 당시 남한에서 올라갔던 문화예술인들 다수가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다. 최승희도 이 숙청의 칼바람을 피해갈 수 없었다는 지적이다.


논란을 넘어 재평가를 해야 할 시기
최승희는 남과 북 모두에서 버림받은 불행한 예술가로 최후를 맞았다. 남에서는 친일과 월북 인사로, 북에서는 자본주의의 악습을 버리지 못한 청산의 대상으로 숙청당했다. 그의 명성과 재능을 아꼈었던 사람들, 혹은 최승희와 가까웠거나 친했던 사람들이나 제자 등 주변인들은 최승희의 친일 행보가 사실이더라도 그녀의 춤과 그녀가 한국 무용에 남긴 업적까지 폄하되어선 안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10여 년 전부터 남과 북 모두에서 최승희에 대한 복권과 재평가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북한에서는 2000년 들어 그녀에 대한 재평가에 나섰고 ‘사도성의 이야기’를 평양 대극장 무대에 올리며 최승희 무용에 대한 복권을 공식화했다. 북한 무용계 간부들도 “최승희 선생은 우리의 춤 가락들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데 온갖 정열과 피나는 노력을 쏟아부은 열정가, 일제식민지 통치에서도 민족무용을 발전시킨 선각자”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정수웅 엮음. 눈빛 간) 일 출판되었다. 엮은이가 지난 1990년대 초부터 10여 년간 일본 · 중국 · 미국 · 러시아 · 프랑스 등을 돌며 수집한 사진과 자료를 모은 것으로, 최승희가 살아간 치열한 삶과 예술혼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세출의 무용가 최승희는 너무 오랫동안 한국에서 금기시되는 인물로 잊혔다. 공과 과를 포함해 더 폭넓은 연구와 관심이 이어져도 좋을것이다. 친일과 월북 같은 사상과 이데올로기의 잣대로만 평가하기엔 예술가로서의 최승희가 한국 현대 무용사에 남긴 영향이 너무 크고, 그녀의 재능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