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석 다시 부르기 in NY Young Acoustic Band 리드 보컬 최영수 변호사
노래 이상의 그 무엇을 느끼게 하는 보이스, 한국 포크의 계보를 잇는 그만의 독특한 음악적 행보로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함께 받았던 ‘노래하는 철학자’ 김광석. 그는 32살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음악으로 그를 기억하며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방천시장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거리’와 생전의 삶을 볼 수 있는 공간 ‘김광석 스토리 하우스’가, 대학로 학전소극장에는 ‘김광석 노래비’가 있을 정도로 한국인이 사랑하는 가수 김광석.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미국 뉴욕에서도 그의 노래를 부르며 추모하는 이들이 있다. 에스카사는 ‘김광석 특집 8월호’를 기획하다가 ‘김광석 다시 부르기 in NY’ 공연을 준비중이라는 ‘영 아쿠스틱 밴드(The Young Acoustic Band-The YAB)’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반가움에 밴드 연습실인 뉴욕 플러싱 M 스튜디오로 찾아가, 5인조 락밴드를 만들어 ‘김광석... 노래를 주제’로 공연을 준비 중인 리드 보컬 최영수 변호사를 만났다.

영 아쿠스틱 밴드(The Young Acoustic Band-The YAB)는 에스카사 취재진에게 김광석을 대표하는 노래 중 한 곡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첫 곡으로 선사해준다. 밴드 리더 최영수 변호사에게 김광석은 어떤 가수로 다가왔을까.
“김광석은 제가 지향하는 노래 인생의 ‘길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생전에 가졌던 생각이나 삶의 목적을 제가 전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노래말, 음성, 선율을 사랑하고 공감하며 인생을 기타와 하모니카 그리고 노래로 풀어나가는 방식을 사랑하지요. 그의 수많은 명곡 중 ‘혼자 남은 밤’ 그리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에요. 이 노래의 멜로디가 특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기타와 하모니카로 연주할 때 잘 어울리는 곡이기도 하구요. 포크 음악을 하는 많은 분이 그러하듯 김광석은 저에게 큰 감동을 주는 가수에요. 평소에 그의 노래를 자주 부르기도 하고 공연할 때도 꼭 몇 곡씩은 불렀습니다. 당시 기타를 칠 줄 아는 누구에게나 김광석은 그렇게 다가왔을 겁니다.

그랬다. 당시 기타를 만지던 사람이라면 그렇게 누구나 한 번쯤 김광석의 음악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전문 가수가 아닌 아마추어가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김광석 다시 부르기 in NY’을 기획하고 실제 공연을 한다는 건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돌아온 그의 대답이 재미있다.
“김광석을 저 혼자 부르기엔 뭔가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가 남긴 노래를 저처럼 공감하는 분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유튜브로 김광석 노래를 검색하던 중에 그가 생전에 뉴욕에 공연와서 찍었던 사진 한 장을 발견했어요. 놀랍게도, 제 사무실이 뒤로 보이는 카페(뉴욕의 아침)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지요.
그가 다녀갔던 공간에 나도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어‘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전율이 일었어요. 그 뒤로 한국에서 매년 열리는 ‘김광석 다시 부르기’를 이곳 뉴욕에서도 그의 음악적 유산(Legacy)을 추억하는 분들과 나누기 위해 ‘김광석 다시 부르기 in NY’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뉴욕의 아침’ 카페 사장님도 영아쿠스틱 밴드의 후원자 겸 열렬한 팬입니다. 이번 공연은 ‘김광석, 그의 노래 그리고 뉴욕’이라는 테마로 무대를 만들어 볼 예정입니다. 우리 밴드의 단독공연 프리미어로 김광석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중학교때 기타로 김광석과 처음 만나다
김광석. 이름 석 자에 그의 얘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김광석을 노래하는 보컬 최영수’로 잠시 돌아가 보자. 그는 한국에서 자라서 뉴욕의 변호사가 되었다. 그의 인생 언제 어디서부터 음악이, 아니 그의 인생에 김광석이 스며들게 되는지 궁금해진다. 평범한 모범생이었을 것만 같은 그의 외모, 한국에서의 유년 시절을 물었는데, 돌아온 답은 고교 불량(?) 음악 동아리 활동과 발표회 이야기로 쏟아져 나온다. 민중가요와 통기타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있던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경남 함양이라는 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도시에 비해 무엇이든 열악한 환경이었지요. 노래나 악기를 배울 수 있는 음악학원은 커녕 동네에 뭔가를 배울 수 있는 곳은 주산학원이 유일했어요. 음악을 접하거나 가르쳐 주는 선생님은 없었지만, 전 음악이 좋았습니다. 초등학교때 하모니카를 불었고, 중학교때부터 기타를 만지기 시작했어요. 형님이 쓰시다가 내버려둔 야마하 기타가 집에 있었거든요. 기타소리에 매료되어 서점에 가서 ‘가요 대백과 사전’을 사갖고 와서는 혼자 멋대로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음악으로 처음 김광석을 만났습니다.”
혼자서 배운 기타와 하모니카 솜씨로 그는 고등학교 2학년때 ‘낙우송’(학교의 교목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는 교내 통기타 서클 밴드를 만들었다. 당시 학교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서클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최영수 밴드는 그 다음 해에 발표회도 가질 만큼 열심히 했다고한다. “연습하다가 학생주임 선생님께 걸려서 혼쭐이 난 적도 있었죠. 그런데 저희 담임선생님께서 발표회를 와서 보시고는 잘했다고 인정해 주시더군요. 발표회 날, 볼거리가 없는 시골이다 보니 150명이 들어가는 소강당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그날 이후로 촌 동네 우리 마을에서는 제가 나름 유명스타가 된 거죠 (웃음)”

최영수 보컬리스트 &기타 / 임채형 콘트라베이스와 베이스기타 / 최호경 기타리스트

Peter Manheim 드러머 / 최형진 재즈피아니스트
다시 김광석을 만나다
그는 음악과 더불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 있는 법대에 진학했다. 그 뒤 열심히 공부해서 유학을 왔으며 결혼해서 생활을 꾸려갔다. 2008년도에는 뉴욕으로 와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음악을 잊고 지낼 만큼 바쁘게 살아온 최영수 변호사. 그가 다시 기타를 들었다. “변호사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롱아일랜드로 이사했어요. 새집에 저만의 작은 골방이 생기게 되었죠. 그 골방에서, 기타와 앰프 그리고 어린 시절 추억의 하모니카를 하나둘 다시 사면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변호사 직업을 가진 그는 비영리 재단일에도 열심이고 맡고 있는 일도 많아서 무척 바쁘다. 그런 그가 밴드를 만들고 공연 준비까지 시간을 쪼개어 해낸다. 그의 샘솟는 열정은 오로지 음악에서 시작해서 음악으로 끝난다. 당연히 그의 주위엔 음악을 사랑하는 뮤지션이 모였고, 그렇게 영 아쿠스틱 밴드는 탄생했다.
“음악 자체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집에서 연주도 하고 가끔 지인을 모아놓고 개인 콘서트도 했었는데 욕심이 생기더군요. 무슨 일이든 그렇듯이 좋아하면 더 잘하고 싶은 맘이 들잖아요. 그래서 좀더 전문적인 뮤지션과 음악활동을 하고 싶다는 갈증이 늘 있었습니다. 60대 중반에 은퇴를 하면 본격적으로 시도해 봐야지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날 문득, 더 미루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은퇴 후에는 지금같은 열정도 용기도 사라져서 밴드결성이 더 어려울 것같더군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 시작을 했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기타리스트인 최호경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친구 주변 뮤지션들로 밴드 맴버들이 구성되면서 밴드 외형이 갖춰지기 시작했어요.

작은 공간에서 혼자 즐기던 음악이 밴드로 확장했다. 아마추어 리드보컬 최영수와 뜻을 같이한 전문 음악인들이 ‘영아쿠스틱 밴드’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낸 자체만으로도 최영수는 꽤 멋있는 사람이다.
재즈와 팝을 소화해내는 전문적인 뮤지션들과 함께 음악 활동을 할수있다는 건 제게 너무나 큰 행운입니다. ‘영 아쿠스틱 밴드’ 멤버를 소개하면 재즈피아니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최형진, 기타 최호경, 콘트라베이스와 베이스기타 임채형, 드러머 Peter Manheim, 노래와 기타 그리고 하모니카를 담당하는 저 최영수 이렇게 5명으로 결성된 어쿠스틱 락 밴드 입니다. 락 밴드라고 하면 쿵쾅거리는(?) 그룹 사운드 음악을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우리는 기타와 콘트라베이스 등 어쿠스틱한 사운드에 미국과 한국의 좋은 팝 음악을 얹어 노래하고 연주해서 청중들과 공감하는 소박한 밴드입니다.
작년 연말에 창단했고, 비영리단체 위주로 크고 작은 공연을 하고 있지요. 제가 특별히 존경하는 한대수형님(에스카사 8월호 표지모델)과 가까이 지내기 때문에 형님의 음악작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형님은 그 연세(?)에도 저희보다 더 큰 열정을 갖고 활동하시는 점에 자극을 받아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열정이 넘치는 ‘영 아쿠스틱 밴드’의 밴드 연습은 늦은 저녁에 시작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향하는 작은 일탈. 일주일에 1번 혹은 두 주에 한번씩 전 멤버가 만나서 서너 시간 연습을 하는 게 삶의 큰 활력소가 된다는 그들. 일에 부담이 되거나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즐기는 오롯한 그들만의 자유 시간. 연습실의 현장 분위기에 젖은 그가 무척 행복할 것 같다.
“매주 수요일 연습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 플러싱 스튜디오 M에서 작년 12월부터 연습을 해오고 있는데 결성기간에 비해 활동은 꽤 됩니다. 지난 3월 경 첫 공연을 낫소카운티 감사 원장실 초청으로 낫소카운티 의회빌딩에서 가졌어요. 팝송 6곡과 한국 팝 1곡으로 공연을 했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죠. 또, 4월에는 Global Children's Foundation 초청으로 두번째 공연을 했어요. 제가 비영리단체에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주로 비영리단체 자선행사에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저를 제외한 나머지 4명 밴드멤버들이 모두 전공자이므로 연습은 늘 호흡이 잘 맞는 것 같고 전공자들의 연주가 더 빛이 나도록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보컬인 제가 아마추어다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노력 중이고요(하하). 세상에 저보다 노래잘하는 사람이 모래알보다 많겠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과 우리 밴드는 지구상에 하나뿐이라는 자신감(?)으로 신나게 노래하고 연주하고 있습니다. 보통 제가 곡을 선곡하고 맞추어 보고 괜찮은 곡을 몇 번 더 연습해서 우리 밴드에 맞는 사운드를 만듭니다.연습이 끝나면 늦은 밤에 맥주집으로 가서 시원한 치맥도 하며 노래얘기, 밴드얘기, 세상사는 얘기들 함께 나누고 후원자도 몇 분이 계셔 그 분 들과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영 아쿠스틱 밴드’의 활동이 더욱 기대가 된다. 곧 열리는 ‘김광석 다시부르기 in NY’콘서트가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에스카사도 큰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김광석 다시부르기 in NY’ 콘서트를 9월중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콘서트 구성은 올드팝과 한국팝 그리고 저희만의 창작곡(오리지널곡)으로 구성할 예정이며, 밴드 멤버 중 작곡자들이 다수여서 밴드 색깔에 맞는 저희곡을 준비하고 싶거든요. 후에 기회가 되면 레코드 취입도 해좀 더 발전된 밴드활동을 할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밴드 멤버들에게 재정적으로 도움이 될 고정적 공연 기회를 모색 중에 있습니다.
이 친구들이 실력도 좋고 열정도 많은데, 사실 음악으로 취업을 하는것이 쉽지가 않아요. 예를 들어, 저희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롱아일랜드 바닷가 멋진 카페등에서 고정적으로 공연을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안정적으로 유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처럼 비영리단체 자선행사에 노래하고, 버스킹 등도 앞으로 할 수 있기를 바라고요. 어떤 방식으로든 수입모델을 만들어서 상시적으로 공연도 하고 멤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밴드가 되었으면 합니다. 에스카사 독자분들이 저희 ‘영아쿠스틱 밴드’에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획, 진행 Jennifer Lee 글 Jenny Lee
에스카사 편집부
김광석 다시 부르기 in NY Young Acoustic Band 리드 보컬 최영수 변호사
노래 이상의 그 무엇을 느끼게 하는 보이스, 한국 포크의 계보를 잇는 그만의 독특한 음악적 행보로 대중과 평단의 찬사를 함께 받았던 ‘노래하는 철학자’ 김광석. 그는 32살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그가 남긴 주옥같은 음악으로 그를 기억하며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태어난 대구 중구 방천시장에는 그를 기리는 ‘김광석 거리’와 생전의 삶을 볼 수 있는 공간 ‘김광석 스토리 하우스’가, 대학로 학전소극장에는 ‘김광석 노래비’가 있을 정도로 한국인이 사랑하는 가수 김광석.
그가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미국 뉴욕에서도 그의 노래를 부르며 추모하는 이들이 있다. 에스카사는 ‘김광석 특집 8월호’를 기획하다가 ‘김광석 다시 부르기 in NY’ 공연을 준비중이라는 ‘영 아쿠스틱 밴드(The Young Acoustic Band-The YAB)’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반가움에 밴드 연습실인 뉴욕 플러싱 M 스튜디오로 찾아가, 5인조 락밴드를 만들어 ‘김광석... 노래를 주제’로 공연을 준비 중인 리드 보컬 최영수 변호사를 만났다.
영 아쿠스틱 밴드(The Young Acoustic Band-The YAB)는 에스카사 취재진에게 김광석을 대표하는 노래 중 한 곡인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첫 곡으로 선사해준다. 밴드 리더 최영수 변호사에게 김광석은 어떤 가수로 다가왔을까.
“김광석은 제가 지향하는 노래 인생의 ‘길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생전에 가졌던 생각이나 삶의 목적을 제가 전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노래말, 음성, 선율을 사랑하고 공감하며 인생을 기타와 하모니카 그리고 노래로 풀어나가는 방식을 사랑하지요. 그의 수많은 명곡 중 ‘혼자 남은 밤’ 그리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곡이에요. 이 노래의 멜로디가 특히 마음에 와닿습니다. 기타와 하모니카로 연주할 때 잘 어울리는 곡이기도 하구요. 포크 음악을 하는 많은 분이 그러하듯 김광석은 저에게 큰 감동을 주는 가수에요. 평소에 그의 노래를 자주 부르기도 하고 공연할 때도 꼭 몇 곡씩은 불렀습니다. 당시 기타를 칠 줄 아는 누구에게나 김광석은 그렇게 다가왔을 겁니다.
그랬다. 당시 기타를 만지던 사람이라면 그렇게 누구나 한 번쯤 김광석의 음악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전문 가수가 아닌 아마추어가 뉴욕에서 본격적으로 ‘김광석 다시 부르기 in NY’을 기획하고 실제 공연을 한다는 건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있지 않았을까? 돌아온 그의 대답이 재미있다.
“김광석을 저 혼자 부르기엔 뭔가 아쉬움이 있었어요. 그가 남긴 노래를 저처럼 공감하는 분들과 함께할 수 있다면 좋겠다 싶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유튜브로 김광석 노래를 검색하던 중에 그가 생전에 뉴욕에 공연와서 찍었던 사진 한 장을 발견했어요. 놀랍게도, 제 사무실이 뒤로 보이는 카페(뉴욕의 아침)에서 찍은 사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보았지요.
그가 다녀갔던 공간에 나도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어‘이건 보통 인연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전율이 일었어요. 그 뒤로 한국에서 매년 열리는 ‘김광석 다시 부르기’를 이곳 뉴욕에서도 그의 음악적 유산(Legacy)을 추억하는 분들과 나누기 위해 ‘김광석 다시 부르기 in NY’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뉴욕의 아침’ 카페 사장님도 영아쿠스틱 밴드의 후원자 겸 열렬한 팬입니다. 이번 공연은 ‘김광석, 그의 노래 그리고 뉴욕’이라는 테마로 무대를 만들어 볼 예정입니다. 우리 밴드의 단독공연 프리미어로 김광석을 노래하는 것이지요.”
중학교때 기타로 김광석과 처음 만나다
김광석. 이름 석 자에 그의 얘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김광석을 노래하는 보컬 최영수’로 잠시 돌아가 보자. 그는 한국에서 자라서 뉴욕의 변호사가 되었다. 그의 인생 언제 어디서부터 음악이, 아니 그의 인생에 김광석이 스며들게 되는지 궁금해진다. 평범한 모범생이었을 것만 같은 그의 외모, 한국에서의 유년 시절을 물었는데, 돌아온 답은 고교 불량(?) 음악 동아리 활동과 발표회 이야기로 쏟아져 나온다. 민중가요와 통기타라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있던 그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경남 함양이라는 촌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도시에 비해 무엇이든 열악한 환경이었지요. 노래나 악기를 배울 수 있는 음악학원은 커녕 동네에 뭔가를 배울 수 있는 곳은 주산학원이 유일했어요. 음악을 접하거나 가르쳐 주는 선생님은 없었지만, 전 음악이 좋았습니다. 초등학교때 하모니카를 불었고, 중학교때부터 기타를 만지기 시작했어요. 형님이 쓰시다가 내버려둔 야마하 기타가 집에 있었거든요. 기타소리에 매료되어 서점에 가서 ‘가요 대백과 사전’을 사갖고 와서는 혼자 멋대로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음악으로 처음 김광석을 만났습니다.”
혼자서 배운 기타와 하모니카 솜씨로 그는 고등학교 2학년때 ‘낙우송’(학교의 교목을 따서 지은 이름)이라는 교내 통기타 서클 밴드를 만들었다. 당시 학교는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서클활동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최영수 밴드는 그 다음 해에 발표회도 가질 만큼 열심히 했다고한다. “연습하다가 학생주임 선생님께 걸려서 혼쭐이 난 적도 있었죠. 그런데 저희 담임선생님께서 발표회를 와서 보시고는 잘했다고 인정해 주시더군요. 발표회 날, 볼거리가 없는 시골이다 보니 150명이 들어가는 소강당이 꽉 찰 정도로 사람들이 몰려왔어요. 그날 이후로 촌 동네 우리 마을에서는 제가 나름 유명스타가 된 거죠 (웃음)”
최영수 보컬리스트 &기타 / 임채형 콘트라베이스와 베이스기타 / 최호경 기타리스트
Peter Manheim 드러머 / 최형진 재즈피아니스트
다시 김광석을 만나다
그는 음악과 더불어 학창 시절을 보내고 서울에 있는 법대에 진학했다. 그 뒤 열심히 공부해서 유학을 왔으며 결혼해서 생활을 꾸려갔다. 2008년도에는 뉴욕으로 와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꽤 오랫동안 음악을 잊고 지낼 만큼 바쁘게 살아온 최영수 변호사. 그가 다시 기타를 들었다. “변호사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어 롱아일랜드로 이사했어요. 새집에 저만의 작은 골방이 생기게 되었죠. 그 골방에서, 기타와 앰프 그리고 어린 시절 추억의 하모니카를 하나둘 다시 사면서 음악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변호사 직업을 가진 그는 비영리 재단일에도 열심이고 맡고 있는 일도 많아서 무척 바쁘다. 그런 그가 밴드를 만들고 공연 준비까지 시간을 쪼개어 해낸다. 그의 샘솟는 열정은 오로지 음악에서 시작해서 음악으로 끝난다. 당연히 그의 주위엔 음악을 사랑하는 뮤지션이 모였고, 그렇게 영 아쿠스틱 밴드는 탄생했다.
“음악 자체를 워낙 좋아하다보니 집에서 연주도 하고 가끔 지인을 모아놓고 개인 콘서트도 했었는데 욕심이 생기더군요. 무슨 일이든 그렇듯이 좋아하면 더 잘하고 싶은 맘이 들잖아요. 그래서 좀더 전문적인 뮤지션과 음악활동을 하고 싶다는 갈증이 늘 있었습니다. 60대 중반에 은퇴를 하면 본격적으로 시도해 봐야지 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날 문득, 더 미루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은퇴 후에는 지금같은 열정도 용기도 사라져서 밴드결성이 더 어려울 것같더군요. 그래서 용기를 내어 시작을 했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기타리스트인 최호경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친구 주변 뮤지션들로 밴드 맴버들이 구성되면서 밴드 외형이 갖춰지기 시작했어요.
작은 공간에서 혼자 즐기던 음악이 밴드로 확장했다. 아마추어 리드보컬 최영수와 뜻을 같이한 전문 음악인들이 ‘영아쿠스틱 밴드’로 속속 모여들었다. 그들을 하나로 묶어낸 자체만으로도 최영수는 꽤 멋있는 사람이다.
재즈와 팝을 소화해내는 전문적인 뮤지션들과 함께 음악 활동을 할수있다는 건 제게 너무나 큰 행운입니다. ‘영 아쿠스틱 밴드’ 멤버를 소개하면 재즈피아니스트이자 보컬리스트인 최형진, 기타 최호경, 콘트라베이스와 베이스기타 임채형, 드러머 Peter Manheim, 노래와 기타 그리고 하모니카를 담당하는 저 최영수 이렇게 5명으로 결성된 어쿠스틱 락 밴드 입니다. 락 밴드라고 하면 쿵쾅거리는(?) 그룹 사운드 음악을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우리는 기타와 콘트라베이스 등 어쿠스틱한 사운드에 미국과 한국의 좋은 팝 음악을 얹어 노래하고 연주해서 청중들과 공감하는 소박한 밴드입니다.
작년 연말에 창단했고, 비영리단체 위주로 크고 작은 공연을 하고 있지요. 제가 특별히 존경하는 한대수형님(에스카사 8월호 표지모델)과 가까이 지내기 때문에 형님의 음악작업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게 되어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형님은 그 연세(?)에도 저희보다 더 큰 열정을 갖고 활동하시는 점에 자극을 받아 여기까지 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열정이 넘치는 ‘영 아쿠스틱 밴드’의 밴드 연습은 늦은 저녁에 시작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으로 향하는 작은 일탈. 일주일에 1번 혹은 두 주에 한번씩 전 멤버가 만나서 서너 시간 연습을 하는 게 삶의 큰 활력소가 된다는 그들. 일에 부담이 되거나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즐기는 오롯한 그들만의 자유 시간. 연습실의 현장 분위기에 젖은 그가 무척 행복할 것 같다.
“매주 수요일 연습시간이 기다려집니다.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 플러싱 스튜디오 M에서 작년 12월부터 연습을 해오고 있는데 결성기간에 비해 활동은 꽤 됩니다. 지난 3월 경 첫 공연을 낫소카운티 감사 원장실 초청으로 낫소카운티 의회빌딩에서 가졌어요. 팝송 6곡과 한국 팝 1곡으로 공연을 했는데 반응이 무척 좋았죠. 또, 4월에는 Global Children's Foundation 초청으로 두번째 공연을 했어요. 제가 비영리단체에서 활동을 하기 때문에 주로 비영리단체 자선행사에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저를 제외한 나머지 4명 밴드멤버들이 모두 전공자이므로 연습은 늘 호흡이 잘 맞는 것 같고 전공자들의 연주가 더 빛이 나도록 신경을 쓰는 편입니다.
보컬인 제가 아마추어다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은데 노력 중이고요(하하). 세상에 저보다 노래잘하는 사람이 모래알보다 많겠지만, 노래에 대한 열정과 우리 밴드는 지구상에 하나뿐이라는 자신감(?)으로 신나게 노래하고 연주하고 있습니다. 보통 제가 곡을 선곡하고 맞추어 보고 괜찮은 곡을 몇 번 더 연습해서 우리 밴드에 맞는 사운드를 만듭니다.연습이 끝나면 늦은 밤에 맥주집으로 가서 시원한 치맥도 하며 노래얘기, 밴드얘기, 세상사는 얘기들 함께 나누고 후원자도 몇 분이 계셔 그 분 들과도 좋은 만남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영 아쿠스틱 밴드’의 활동이 더욱 기대가 된다. 곧 열리는 ‘김광석 다시부르기 in NY’콘서트가 성공적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에스카사도 큰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김광석 다시부르기 in NY’ 콘서트를 9월중으로 계획하고 있습니다. 콘서트 구성은 올드팝과 한국팝 그리고 저희만의 창작곡(오리지널곡)으로 구성할 예정이며, 밴드 멤버 중 작곡자들이 다수여서 밴드 색깔에 맞는 저희곡을 준비하고 싶거든요. 후에 기회가 되면 레코드 취입도 해좀 더 발전된 밴드활동을 할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밴드 멤버들에게 재정적으로 도움이 될 고정적 공연 기회를 모색 중에 있습니다.
이 친구들이 실력도 좋고 열정도 많은데, 사실 음악으로 취업을 하는것이 쉽지가 않아요. 예를 들어, 저희가 사는 곳 근처에 있는 롱아일랜드 바닷가 멋진 카페등에서 고정적으로 공연을 할 수만 있다면, 좀 더 안정적으로 유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처럼 비영리단체 자선행사에 노래하고, 버스킹 등도 앞으로 할 수 있기를 바라고요. 어떤 방식으로든 수입모델을 만들어서 상시적으로 공연도 하고 멤버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밴드가 되었으면 합니다. 에스카사 독자분들이 저희 ‘영아쿠스틱 밴드’에 관심 가져주시고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기획, 진행 Jennifer Lee 글 Jenny Lee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