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사는 자유를 말하다 NBC Universal 그래픽 아티스트 에디터 노경수

열심히 사는 자유를 말하다 NBC Universal 그래픽 아티스트 에디터 노경수

사람을 만나는 일은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그 첫 만남이 모두에게 쉬운 것은 아니다. 필자는 사람을 만나고 글을 쓰는 일을 하면서도, 첫 만남을 준비할 때면 언제나 떨리고 두려운 마음이 한가득하다. 얼마나 진솔하고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는 인터뷰를 진행하는 사람 하기에 달려있다는 부담감 때문일 것이다. 노경수 그래픽아티스트/에디터와 만남은 그런 부담감과 두려움이 쓸데없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어느 화창한 토요일 오후, 펠팍의 한 커피숍에 들어서자 푸근한 인상의 남성 한 분이 입구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잠깐의 눈 맞춤으로 서로를 확인하자 바로 일어서 인사를 건네더니 “뭐 드시겠어요?” 하며 주문대로 향한다. 무언가 상황이 뒤바뀐 듯해 갸웃거리며 그를 보는데 그의 파란 점퍼에 선명하게 새겨진 NBCUniversal 로고가 눈에 들어온다. NBC TV 방송사의 대표 탐사 보도 프로그램인 “Dateline NBC”팀에서 영상 편집, 그래픽 디자인, 특수효과, 등 다양한 영상 제작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23년 차 노경수 씨다.

방송사 또는 영화사의 영상 제작 아티스트는 창조적이고 열정적인 많은 젊은이가 갈망하는 꿈의 직업 중 하나다. 한국에서는 공중파 3사 (KBS, MBC, SBS) 입사가 ‘언론고시’라 하여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로 여겨진 지 오래고, 케이블, 위성, 종합편성 채널들이 생겨나면서 기회가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전문적 지식과 기술을 가진 훈련된 인력을 선호하는 까닭에 웬만한 사전 경험 없이는 입사하기가 쉽지 않다.

하물며 전 세계 미디어 산업을 좌지우지하는 미국의 3대 지상파 방송사 ? ABC, CBS, NBC - 중 하나인 NBC에 외국인으로서 (그것도 당시에는 그저 한국이라는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온 동양인으로서),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영상의 질을 책임지는 Dateline의 수석 아티스트(lead artist)로 발탁되기까지의 과정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단순히 거대 미디어 기업의 수석 아티스트가 되기까지의 힘겨웠던 여정뿐만이 아니라, 20살 어린 나이에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까지 수많은 우연을 필연으로 엮어낸 그의 도전과 노력이었다. 노경수 씨는 그 흥미진진했던 삶의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냄으로써 인터뷰를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게 이끌었다.



미국의 대표 지상파 방송사에서 일하고 계신데요. 하시는 일 얘기 좀 해주세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시는지, 제작하신 프로그램 중 대표작 소개도요.

현재 ‘Dateline NBC’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팀에서 일하고 있어요. 한국에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 있잖아요. 미국판 ‘그것이 알고 싶다’라고 보시면 돼요. 아니다, Dateline이 먼저니까 ‘그것이 알고싶다’를 한국판 Dateline이라고 보는 게 맞겠죠? Dateline 스태프가300명 정도 되는데 저는 그 팀에서 편집, 컴퓨터 그래픽 (CG), 특수 효과를 담당하고 있어요. 단순 편집뿐 아니라 CG를 적절하게 삽입하고, 특수 효과를 이용해 보기에 불편한 장면들을 순화시켜서, 프로그램이 정보는 정확하게 전달하면서도 보기에 부담스럽거나 불쾌하지 않도록 하는 작업을 해요. 

프로그램 특성상 살인 사건을 다루는 경우가 많아서, 제가 보는 영상 원본은 정말 처참하죠. 그런 걸 매일 보고 작업한 뒤에 바로 밥 먹으러 가고 하는데도 이렇게 살이 찌니 신기하죠? (웃음) 지금 하는 Dateline NBC가 제가 가장 오래 한 프로그램이기도 하고, 또 제 대표작이기도 해요. Dateline이 올해로 25주년이 되었는데, 제가 23년 차니까 저로서는 NBC에서 일한 내내 Dateline과 함께 한 거죠. CBS에 ‘60 Minutes’가 있다면 NBC에는 Dateline이 있다고 할 만큼 NBC의 대표적인 탐사 보도 프로그램이에요.


한 가지 일을 23년 동안 해오신 점도 대단하신데 NBC 대표프로그램 중 하나인 Dateline 프로에서 23년 동안 팀원으로 일하셨다니 자랑스럽네요. 이외에도 일하시는 동안 가장 보람을 느꼈던 순간이나 특별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었다면요?

1997년에 ‘NBC Nightly News’의 96년 대통령 선거 방송으로 에미상(Emmy Award)을 받았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오스카상(영화), 토니상 (공연), 그래미상(음악)과 함께 미국미디어 분야 4대 상 중 하나거든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그때가 제가 한국에서 뮤직비디오와 CF(commercial film: TV 광고) 찍는 일을 하다가 미국에 돌아와서 NBC에 입사한 지 1년쯤 지났을 때예요.

이전에 했던 뮤직비디오나 광고 제작의 창조성이나 다이나믹함에 비하면, 같은 포맷, 같은 방식을 반복하는 TV 프로그램 제작은 상대적으로 너무 단순하게 느껴져서 일의 재미를 조금 잃어가고 있었을 때 그큰 상을 받게 된 거죠. 정말 뿌듯했고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은 느낌이었어요. 그 후 98년에 또 한 번 Dateline 스튜디오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에미상 스튜디오 디자인 부문에서 수상했고, 이후에도 여러 상에 노미네이트 됐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상 받는 순간들은 늘 감동적이고, 한편으로는 내가 열정을 잃지 않고 잘하고 있구나!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이 되기도 해요. 1997년에 ‘NBC Nightly News’의 96년 대통령 선거 방송으로 에미상 (Emmy Award)을 받았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오스카상(영화), 토니상 (공연), 그래미상(음악)과 함께 미국 미디어 분야 4대 상 중 하나거든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지만, 그때가 제가 한국에서 뮤직비디오와 CF(commercial film: TV 광고) 찍는 일을 하다가 미국에 돌아와서 NBC에 입사한 지 1년쯤 지났을 때예요. 이전에 했던 뮤직비디오나 광고 제작의 창조성이나 다이나믹함에 비하면, 같은 포맷, 같은 방식을 반복하는 TV 프로그램 제작은 상대적으로 너무 단순하게 느껴져서 일의 재미를 조금 잃어가고 있었을 때 그 큰 상을 받게 된 거죠. 정말 뿌듯했고 그간의 노력을 인정받은 느낌이었어요. 그 후 98년에 또 한 번 Dateline 스튜디오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에미상 스튜디오 디자인 부문에서 수상했고, 이후에도 여러 상에 노미네이트 됐어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상 받는 순간들은 늘 감동적이고, 한편으로는 내가 열정을 잃지 않고 잘하고 있구나! 스스로 확인하는 순간이 되기도 해요.



대단하십니다! NBC 방송국 입사 23년 차 베테랑으로서 지금도 방송국 간판 프로의 스텝으로 참여하고 계시고 이렇게 큰 상까지 받으신 분을 만나게 되어 인터뷰를 진행하게 되니 저도 영광입니다. 방송 일을 오래 하셨는데, 평소 꿈꾸던 일이셨나요?

제가 처음 미국 온 게 1984년도였는데 고등학교 졸업 후에 온 가족이 이민 와서, 당장은 대학보다는 가족들 삶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택했어요. 그때가 뉴욕에 한인타운이 생기기도 전이니 정말 오래전이죠. 할 일을 찾던 중에 결혼식 촬영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덕션에 들어가 카메라맨으로 일하게 됐어요. 요즘은 결혼식 촬영이 일반화되어 별것아닌 것 같아도, 당시엔 촬영비가 3,000불 정도였어요. 담배 한 갑이 1불 하던 시대였으니 그 촬영비가 얼마나 비쌌는지는 알 만하죠? 흔한일이 아니었죠. 게다가 처음으로 촬영 장비 다루는 방법을 배우고 직접 촬영하는 일이 정말 재미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한국 쪽에서, 당시 민자당 총재였던 김영삼 의원이 러시아 순방 후에 뉴욕을 방문한다고 뉴욕 방문 영상을 촬영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온 거예요. 그 일은 결혼식 비디오 제작과는 촬영이나 편집 수준이 완전히 다른 작업이었죠. 그 일을 하고 나서 이쪽 일을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프로덕션을 그만두고 86년도에 ‘TKC’(The Korean Channel - 1985년에 설립, 1986년 방송 개시)라는 교포방송에 들어가 방송 일을 시작했어요. 동시에 뉴욕 맨해튼에 새로 생긴 City College 영화 영상학과(film and video)에 1기로 들어가 공부도 했지요.


그럼 TKC에서 일하시다가 NBC로 옮기신 건가요?

(웃음) 그럴리가요. 제가 알기론 그 당시 미국 방송사에 한국 직원이라고는 NBC에 한 명, CBS 한 명이 전부였는데요. TKC에서 1년 동안 일하고 ‘대한 방송’(1959년에 설립되고 1961년에 폐국 된 한국 최초의 TV 방송국인 대한 방송 - DBC: Daehan Broadcasting Corporation -과는 다르며 1987년 당시 뉴욕 시에 있었던 방송국)이라는 곳에서 다시 1년, 그러니까 366일을 일했어요. 그 후 일본 NHK의 하청 업체였던 ‘Telemotion’이라는 일본계 프로덕션에 들어갔어요. 

그 회사는 자체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보다 방송 전문 인력을 제공하는 회사였기 때문에, 그 회사 소속으로 일하는 동안 ABC, CNN, Fox, MTV, NHK HD,등 다양한 방송사의 일을 할 수 있었어요. 예를 들어, ‘VH1’이라는 케이블 방송사와 일할 때는 ‘RUN-D.M.C.’라는 미국 유명 힙합 그룹의 뮤직비디오 제작도 했어요. Telemotion에 3년 정도 있으면서 최고의 방송 기술자들과 함께 일하며 많이 배웠죠. 또 88년도에 NHK가 디지털 HD(High-Definition: 고화질) 방송을 시작하면서 많은 기존 방송 장비를 Telemotion에 기증했기 때문에 우수한 고가의 장비들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요.

거기서 쌓은 실력을 갖추고 1990년에 한국으로 들어갔어요. ‘비손텍’(Bisontec)이라는 프로덕션에서 저의 미국 방송 경력을 높이 사 부사장급의 연봉을 주기로 했고, 거기서 미국 기술자와의 통역을 비롯한 광고 특수 효과, 편집, 뮤직비디오 제작 등의 일을 했어요. 그때 변진섭 뮤직비디오, 삼성전자, 자동차 광고를 찍기도 했죠. 그 회사에서 4년을 일하고 94년에 결혼 후 미국으로 복귀했고, 한 미국 프로덕션에 들어가서 6개월 일한 후 이듬해 3월에 드디어 NBC 들어가게 됐어요. 그러고 지금까지 23년을 일했네요.


34여 년 동안 일을 쉰 적이 단 한 번도 없으셨군요.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여러 회사에서 다양한 일을 하셨는데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한 직장에 머물러 있기보다 그렇게 여러 곳으로 옮겨 일하실만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딱히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기보다 그냥 제 성격이 그래요. 뭔가 익숙해지면 지루해지고, 그러면 또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지거든요. 초기에 결혼식 촬영 프로덕션부터 TKC, 대한방송, 일본계 Telemotion, 한국 비손텍까지 새로운 일을 배우고 할 수 있는 곳이면 망설이지 않고 갔어요. 방송 쪽 일은 내용이나 기술 면에서 계속 변하기 때문에 뒤처지지않고 따라가려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사실 직장을 옮기고 싶다고 마음대로 쉽게 옮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렇게 마음먹을 때마다 원하는 회사에 들어가신 것도 참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기회를 열심히 찾아다니기도 했지만,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이력서를 참 많이 냈고요. 함께 일한 동료들이나 주변 사람들 도움도 많이받았어요. 좋은 기회들이 적절한 시기에 생겨서 잡을 수 있기도 했고요. 예를 들어, 88년도에 뉴욕에서 방송 기자재 박람회를 한다기에 가서“Harry”(영국 Quantel사에서 1986년에 출시한 편집기)라는 첨단 편집기를 처음 봤는데요. 이미 촬영된 영상을 고치고 바꾸는 기능이 너무 신기해서 관심을 가지고 눈여겨봐 두었죠.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한한국 신문을 보게 됐는데, 거기에 Harry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을 구한다는 비손텍의 채용 광고가 실려 있는 거예요. 그 한국 회사로 바로 편지를 보냈어요. 그 회사는 89년에 Harry를 산 뒤, 뉴욕 출신 기술자를 고용하여 편집 일을 담당하게 하고 있었는데, 언어 문제로 소통이 쉽지않아서 그 기술을 배우는 데도 어려움이 많았데요. 그랬으니 제가 적임자였던 거죠. 그렇게 한국에서 일하다가 미국으로 돌아왔을 땐, 다시 어려움이 닥쳤어요. 

당시 미국 프로덕션에서 동양인을 꺼리는 탓에 처음에 입사할 땐 두 달을 무급으로 일하겠다고 한 뒤에 들어갔어요. 물론 막상 일을 시작하니 월급을 주긴 했지만, 처음에 들어갈 땐 모험이었죠. 거기서 일하다 NBC에서 Harry를 다룰 줄 아는 젊은 그래픽 아티스트를 채용한다길래 바로 지원을 하고 합격했어요. 굳이 제 장점이 있다면, 그런 기회들이 왔을 때마다 겁내거나 주저하지 않고 무조건 덤비고 본다는 것 같아요. 오래 생각했다면 이후에 감당해야 할지도 모르는 어려움이 떠올랐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그냥 기회가 생기면 기뻤고 그 기회를 잡으면 주저 없이 떠났어요. 젊기도 했고, 어떤 것도 못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30년 넘게 방송 제작 일만 하셨는데 어려움이 있었거나 지난 일을 돌아보고 후회됐던 적은 없으셨나요?

당연히 있었죠. 이력서를 낸 양을 생각하면 떨어지기도 많이 했던 거고, 실제로 크게 실패한 적도 있지요. 87년도 봄쯤인가 MBC에서 88년 서울 올림픽을 위해서 백두산, 한라산에서 올림픽 성공 기원 굿을 하는데 실황 중계를 할 카메라맨을 구한다고 미국으로 연락이 온 거예요. 당시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기 전이라, 한국 직원은 중국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거든요. 한인회의 도움으로 석 달 만에 시민권을 받고 지원을해서 됐었는데, 촬영 날짜가 임박하도록 연락이 없는 거예요. 나중에들으니 임금이 싼 중국 사람을 고용했다더라고요.

 한국에서 일할 땐, 한국 방송 용어가 대부분 일본어라 미국 용어에 익숙한 저로서는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고요, 일본 용어에 익숙해지고 다시 미국에 돌아오니 또 한동안 같은 문제를 겪어야 했죠. 그뿐만이 아니에요. 92년도엔가 한국에서 변진섭 뮤직비디오를 찍은 적이 있었는데요. 히트곡이 워낙 많아서 그중 11개 노래를 담은 비디오를 3만 개나 찍어 유통했는데 2만 개가 돌아왔어요. 한마디로 망했죠. (웃음)  

미국에 다시 와서는, 이전에 방송 일을 7년 넘게 해왔던 제가 경력도 인정 못 받고 두 달 무급에 인턴으로 일하겠다고 해야 했으니 그 결정도 쉽지는 않았겠죠? 때마다 힘들긴 했어도 신기하게 후회를 했던 적은 없었어요. 하던 일이 워낙 재미있기도 했고, 기회는 언제든 또 온다는 믿음 같은 게 있었던것 같아요.



아직 은퇴를 생각할 나이는 아니시지만 향후 하고자 계획하고 계신 일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죠.

지금 NBC 말고도 KCB 가톨릭 방송에서 제작국장으로 일하고 있어요. KCB 가톨릭 방송은 KBTV (Korean Broadcasting Television), KRB(Korean Radio Broadcasting), YouTube를 통해 방송되고 있는데요. 고정적으로 일하는 프리랜서 2명이랑 자원봉사로 참여하시는 분들과 함께 일하고 있어요. 제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서 이 일을 하는 건 아니고요. 살다 보니 인생에서 순간순간 어떤 절대자(?)의 도움이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제가 운이 좋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을 포함해서요. 그래서 뭔가 그 도움에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봉사를 시작했죠.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고 좋아요. 

주변에 어떤 사람들은 방송 아카데미 같은 걸 만들어서 후배를 양성할 생각은 없냐고 물어보기도 하는데, 아직 현역인 상황이라 시간을 내기가 어렵고요. 또 현실적으로 그런 기관을 운영하려면 돈이 들기 때문에 후원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가 않아요. 그래서 우선은 지금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죠. 가톨릭 방송일이 그런 셈이고, 가끔 방송 분야에서 상을 주는 행사가 있으면 심사에 참여하기도 하고요. 한국에서 방송하는 사람들이나 방송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도 기회가 되면 도움을 주려고 해요.


일종의 재능 기부를 하고 계신 거네요. 사실 NBC 일만으로도 바쁘실것 같은데, 참 대단하세요. 그런데 이렇게 노경수 씨 이야기를 듣다 보니, 너무 일 얘기만 들은 것 같아요. 가족분들 얘기 좀 나눠볼까요? 아내 분과는 어떻게 만나셔서 결혼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왠지 엄청난 미인이실 것 같은데요.

이뻐요. (웃음) 89년 말에 일본 NHK에 2주 정도 교육을 받으러 간 적이 있거든요. 가는 길에 친구가 뛰어난 미인을 소개해 주겠다고 해서 한국에 들렀어요. 제가 지금은 살찌고 나이 들어서 이렇지 당시엔 저도 좀괜찮았거든요. (웃음) 

게다가 방송 일을 하다 보니 여배우들, 연예인들을 많이 봐서 외모에 대한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져 있었기 때문에, 웬만해서 누가 눈에 들어올까 싶던 때였어요. 큰 기대 안 하고 춘천의 한카페에 앉아 기다리는데 정말 어떤 영화배우처럼 생긴 여자분이 제 쪽으로 걸어오는 거예요. 첫눈에 반했죠. 그래서 원래는 일본 교육 끝나고 미국 가기 전에 한국에 다시 들러 1주일만 있을 계획이었는데 2주를 있었어요. 그렇게 잠깐 만나다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현실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때는 국제전화도 쉽지 않았고, 겨우 편지만 주고받을 수 있었나 보니 얼마지 않아 그냥 헤어지게 됐죠. 한 6개월 정도 사귀었나 봐요. 그런데 결국 만나서 결혼할 운명이었는지, 제가 한국에 나가서 일하는 동안 자꾸 생각이 나는 거예요. 결국, 93년도에 제가 연락을 해서 다시 만나게 됐고, 94년 2월에 결혼했어요. (“사진 좀 보여주세요.” 하고 보채니 전화기 속 사진 몇 장을 보여주는데, 정말 보기드문 미인이다). 그렇게 결혼하고 미국에 들어와 지금까지 딸 셋 낳고 잘살고 있어요.


노경수씨의 세 딸들. 첫째가 22살, 둘째가 20살, 막내가 16살이다.


그 당시 미국에서 일하시면서 한국에 계신 분을 만나 결혼하시다니 운명이 맞는 것 같군요. 세 따님 사진을 보니 엄마 아빠 닮아 모두 미인이네요. 자녀분 중에 노경수 씨와 같은 일을 하고 싶어 하거나, 방송 쪽 일에 관심이 있는 분이 있나요?

첫째가 22살, 둘째가 20살, 막내가 16살인데 막내는 고등학생이라 아직 잘 모르겠고, 둘째는 공부를 곧잘 해서 지금 뉴욕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어요. 졸업 후에 구체적으로 뭘 할지는 아직 생각 중인 거 같아요. 첫째 딸이 방송 일에 관심이 많아서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기도 했고, 지금은 NBC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있어요. 지역 WNBC에서 뉴스 아이템을 찾는 일을 주로 하고 있죠. 

저처럼 방송 편집 쪽 일을 하고 싶은 것 같지는 않고요. 보면 순발력도 있고 감각도 있고 리포터를 해도 좋을 것 같아요. 2015년 8월에 ‘KCON’이라고 한국 유명 아이돌 가수들의 콘서트가 뉴욕에서 열린 적이 있어요. 그때 제작 센터 통역을 맡았는데, 중계차에서 방송 지시가 내려오지않아서 방송 사고가 날 것 같으니까 자기가 큐시트(cue sheet: 방송 내용, 순서 등의 정보를 담은 대본)를 보고 직접 디렉팅을 한 거예요. 자칫 위험한 일이긴 했어도, 잘했어요. 올 4월에는 ‘이달의 인턴’으로 뽑히기도 했죠.


따님께서 ‘이달의 인턴상’을 받았을때 흐뭇하셨겠어요! 따님의 출중한 능력에 더해 아빠의 도움이 컸을 듯 합니다만… (웃음) 사실 NBC에 딱자리잡고 계시는 아버지가 없었다면 NBC 같은 메이저 방송사에서 인턴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얻지 못했을지 모르잖아요. 방송 쪽은 워낙 능력 있는 지인들이 서로를 추천해서 인력 수급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런 면도 없잖아 있겠죠. (웃음) 그냥 딸이 자기 일을 좋아하고 재밌어하니까 앞으로 하는 일이 잘 됐으면 좋겠어요. 모든 부모의 맘이 똑같잖아요.


이야기에 빠져서 듣다 보니까 시간이 어느새 이렇게 지났네요. 이제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바램이나, 이 인터뷰 기사를 읽게 될 독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요?

말씀드렸다시피, 지금은 무슨 큰 바람이나 꿈이 있는 건 아니에요. 84년 20살에 이 분야에 들어와 일을 배우면서 NBC 같은 메이저 방송사 PD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요. 그리고 딱 10년만인 94년에 그 목표를 정말 이루었어요.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사실 NBC에 입사할 당시는 결혼한 후였고 아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으니까, 재밌는 일을 따라 자유롭게 다녔던 싱글 시절과는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어요. 아니 달라져야 했죠. (웃음) 

자유를 포기하고 안정을 택했다고 봐야겠죠. 개인적으로는, 이제 23년 차니까 NBC에서 30년을 채우고 싶은 바람, 욕심이 있어요. 처음 들어왔을 때, 주변 동료들이 3년은 버틸 수 있을까 했는데 23년 있었잖아요. 30년, 될 거예요. 제가 저처럼 목표를 이루기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조언을 드리자면, 가능하면 좋아하고 즐겨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것과 또 이왕이면 남들이 많이 안 하는 일을 찾아서 해 보라는 거예요. 

물론 남들이 안 하는 일을하려면 겁도 나고 힘도 더 들지 모르지만, 어때요, 해 보면 되지. 전 겁내고 걱정하느라 시도를 못 하는 사람을 보면 항상 “해봤어?”, “그냥 한번 해 봐.” 해요. 그냥 무대뽀로 밀고 나가 보라고 하죠. 안 될 것 같아도, 해보면, 그러다 정말 안 되면, 적어도 안 되는 이유라도 알게 되잖아요. 그럼 되게 할 방법을 생각할 수 있게 되고요. 저도 가만히 앉아서 기회를 받아먹은 게 아니거든요. 정말 열심히 이력서 뿌리고 지원서 내고, 지인들, 동료들한테도 많이 부탁하고… 그렇게 그냥 무조건 열심히 부딪쳐 봤으면 좋겠어요.



여운이 남는 조언을 끝으로 인터뷰를 마치고, 녹음기를 끄고 자리를 정리하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두런두런 나누었다. 이제 연봉이 꽤 되시겠다는 등등… 손사래를 치면서 버는 만큼 나가는 게 미국 생활이란다. 식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많은데 그만큼 못 해 줘서 속상하다는 얘기다. 딸들은 아빠한테는 10살까지만이라며 지금은 집에서 ‘따’가 됐다고도 한다. 이젠 영락없는 귀여운 아빠다. 들었던 노경수씨 과거 얘기들이 스쳐 지나가고 지금의 푸근한 모습에 잠시 시선이 머무는데, 마음이 따뜻해진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살고자 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삶’을 그저 ‘마음대로 하는 삶’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적어도 노경수 씨에게 ‘자유’는 그렇게 가볍지 않다. 하고 싶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자유를 얻기 위해 그는 부단히도 노력했고, 그 결과 수많은 우연이 그저 스쳐 지나가지 않고 그에게 기회로, 경험으로 남아주었다. 쉽지않았을 30여 년 한 우물 인생, 힘들었다는 말이 나올 법도 한데, 힘들지 않았냐 굳이 다그치기 전까지는 그저 재밌었다는 말뿐이다. 노경수 씨는 진정 열심히 자유롭게 사는 인생의 즐거움을 아는 것 같다.


기획 Jennifer Lee 글 Juyoung Lee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