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노래는 나를 위해 부르는 나의 이야기 ‘김광석’을 노래하는 가수 송희원
한국의 가요계가 아이돌 붐으로 들썩이고 있는 요즘에도 ‘음악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닮고 싶은 가수로 김광석을 꼽는다. 무려 2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그가 여전히 ‘레전드’로 회자되며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비단 그가 서른셋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노래가 주는 깊이 있는 울림은 아무리 숙련된 가수라도 재생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지인의 소개로 찾아간 서울 종로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한 여가수가 부르는 김광석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여성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김광석의 노래들이 익숙하지 않은데도 자꾸만 귀 기울이게 되어 그녀의 공연이 다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통기타를 메고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한 그녀는 송희원이라고 했다.
그녀의 노래가 남긴 심상치 않은 여운이 가시지 않아 다시 카페로 가볼까 했는데, 마침 5.18 민주화운동 기념 음악회 무대에 선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청바지에 하얀 셔츠, 뒤로 묶은 머리, 그리고 통기타.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았지만, 잔잔하게 스미는 맑은 음색과 이야기처럼 들려오는 가사에 관중들은 기꺼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녀는 유명한 가수도 아닌 자신을 무슨 이유로 인터뷰하느냐며 갸우뚱해 했다. 처음은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는 여성 가수라는 점이 신선했기 때문이고 나중은 왠지 친근감이 느껴지고 정감이 느껴져서 인간적으로 궁금해진 때문이라고 하니, 금세 만면에 미소가 한가득히 되었다. 두 이유 다 싫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편안하게 그녀의 음악 활동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어 보았다.
첫인사, 첫 질문. 그녀는 누구일까?
“안녕하세요. 저는 노래하는 게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이브 무대에서 오랫동안 노래하다가 싱어송 라이터로 2012년도에 자작곡 7곡을 수록한 음반을 처음 냈고요, 후에 디지털 싱글도 2곡 발표했어요.”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가수는 많다. 그런데 본인 소개를 ‘가수 누구입니다, 싱어송라이터 누구입니다’가 아닌 “노래하는 게 행복한 사람”이라 하니 가수가 되기까지 남다른 사연이 있었나 싶다.
그녀는 어떻게 가수가 되었을까?
“대학에 들어가긴 했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대학 생활 자체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졌어요. 그러다 보니 1년도 채 안 돼서 휴학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그때쯤 우연히 통기타 동아리 오디션 대자보를 보게 됐어요. 기타를 칠 줄 몰라도 된다고 하길래 친한 친구랑 같이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붙은 거예요. 사실 너무 떨려서 목소리도 안 나오고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선배들이 제 목소리를 알아봐 주시고 “뒤돌아서 다시 해봐라”,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다시 불러 봐라”하고 기회를 주시더니 뽑아주셨어요. 그렇게 통기타 동아리에 들어가서 음악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녀는 그날이 20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내가 왜 태어났지?’ 생각하며 살다가 노래하면서 존재 이유를 처음 느끼게 됐다. 그래서 반드시 노래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서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어요. 무엇보다 노래할 기회가 생겼다는 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고요. 아침 일찍 아무도 없을 때 동아리 방에 가서 청소하고 혼자 연습했어요. 주변에서 선배가 “노래하고 싶니? 기타 쳐 줄게.” 하면 떨리고 싫어서 기타도 어깨너머로, 아니면 책 보면서 독학으로 배웠죠.”
딸은 대학 교육이 필요 없다 하셨을 정도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 자란 막내딸, 존재감이 크고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노래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당연히 반대하셨고, 그 허락을 받기 위해 눈밭에 무릎 꿇고 앉아 울면서 빌기도 했다. 태어나 아버지에게 반항했던 그 날은 자신도 놀라웠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노래를 할 수 있게 되고 그저 노래하는 게 좋았지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노래밖에 좋은 게 없어서 연애도 안 했고, 가요제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졸업하신 선배님이 대학가요제에 나가길 권하긴 하셨는데요. 저는 이미 기타 치고 노래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대회에 나갈 필요를 못 느꼈어요. 그보다는 교내 축제 공연이나 동아리 자체 공연에서 노래하고 싶었죠. 공연에 서고 싶어서 한두 달 동안 오직 한 곡만 죽자고 연습했어요. 그 노래를 내 걸로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로 연습하고 오디션을 보러 갔더니 선배님들이 “희원이는 마음으로 노래하는구나.”라고 칭찬해 주셨어요. 그 나이에 그게 쉽지 않다고도 하셨고요. 혼자 스스로 배우고 연습하는 것이 기특하다고도 해 주셨어요. 정말 기쁘고 행복했어요.”
“그렇게 동아리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가끔 동아리 선배님 소개로 CM 송(commercial message song) 녹음을 하기도 하고 소극장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요. 팀을 꾸리기가 힘들어지면서 라이브 무대에 서기 시작했어요.”
김광석의 노래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어떻게 그의 노래를 만났을까?
“어느 날 우연히 김광석 씨 LP판을 받아서 듣게 됐는데, ‘그날들’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제가 펑펑 운 거예요.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어떻게 노래를 이렇게 표현하지?’ 싶고 굉장히 경이롭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나도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고요.”
그녀의 마음을 울린 것은 김광석의 가창력이나 테크닉이 아니라 그가 노래를 대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제 노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겪고 느끼는 이야기들을 노래로 표현하는 거죠.” (1995년 <샘터> 김광석 인터뷰 中)
“김광석 씨처럼 노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해요. 진솔하게 이야기하듯 노래하는 그런 점이 정말 마음에 와닿거든요. 김광석 씨 노래가 너무 좋아지니까 사람 김광석에게도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노래를 하나 싶은 거죠. 그래서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동물원으로 활동했던 김광석 씨 히스토리를 찾아보기도 했고, 올 1월쯤엔 ‘환생’이라는 김광석 씨 다큐멘터리도 봤어요. 너무 감동을 받아가지고 제가 그의 곡인 ‘서른 즈음에’를 부른 영상을 그 다큐 링크랑 같이 페북 (Facebook)에 올리기도 했어요.”
생전에 김광석은 학전소극장에서 무려 1,000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 그녀는 자신도 그렇게 노래하고픈 꿈이 있다고 했다. 현재 그녀는 광화문 근처 ‘소우’(小雨)라는 라이브 카페에서 6년째 공연 중이다. 자작곡, 김광석 노래, 좋아하는 가요를 엮어서 자신만의 공연을 한다. 작년 가을, 올봄, 여름 공연을 성공적으로 올렸고, 올가을, 겨울을 포함해서 1년에 작은 공연들을 더 많이 가질 계획이다. 그녀는 소우 말고도 라이브 공연을 하루에 세 곳이나 더 다닌다.
김광석이 소극장 공연을 선호한 이유로, 관객이 바로 앞에 있어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고, 관객들 눈빛이 보이니까 자신의 노래를 어떻게 감상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는 점을 들었다고 한다. 송희원, 그녀가 라이브 카페 공연을 즐기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 같다.
“관객과 소통하며 공연하는 건 당연히 좋죠. 그런데 김광석 씨를 보고 좀 바뀐 게 있어요. 예전에는 오직 관객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노래를 했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는 거예요. 김광석 씨 노래 중에는 김광석 씨가 만들지 않은 곡도 많이 있잖아요. 김광석 씨는 그런 곡들에 자기 이야기를 담고 자기 감성과 목소리로 불러내면서 완전히 자기 노래로 만들어 내는 힘이 있어요. 그래서 김광석 씨 노래를 들으면 그가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고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았던 따뜻한 사람이었던 게 느껴져요. 저도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진솔한 나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내 색깔로 나 자신에게 불러주고 싶어요.”
그동안 자신의 노래를 듣고 관객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바라보는 뿌듯함으로 자신의 행복감 상당 부분을 대신해 왔다면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노래하는 행복 자체를 누려보겠다는 선언 같았다. 이렇게 노래하는 게 행복한 그녀가 노래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6살에 존경하던 선배와 결혼을 했는데요. 아들 둘 낳고 11년 정도 결혼 생활을 한 후에 헤어졌어요. 그러는 동안에 얼마간씩 노래를 쉬어야 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정말 힘들었죠. 주변에 노래하는 친구들이나 선배를 보면 가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너무너무 노래하고 싶은데 현실은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 스트레스로 몸까지 아프더라고요. 신기했던 건 아파서 응급실을 갔는데 원인이 없다고 했던 거예요. 빈혈이 너무 심해서 병원을 갔더니 빈혈 수치는 정상이라고 하고요. 가수가 숙명인가 보다 하고 노래를 다시 시작했을 땐 정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그녀가 2016년 9월부터 페북으로 대표되는 SNS (Social Network Service)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제가 자존심이 강해서 원래 저를 남한테 공개하는 걸 꺼렸었는데요. 언젠가부터 나누고 공감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페북을 시작한 건 미국 덴버에 이민 간 친한 언니랑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서였어요. 그러다 우연히 페북에 제 노래 영상 하나를 올리게 됐는데 반응이 되게 좋은 거예요. 물론 처음에는 무서운 댓글, 무책임한 댓글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았죠. 그럴 때마다 아들이 크게 의미 두지 말라고 충고해 주고, 팬분들도 많이 응원해 주신 덕에 이제는 거의 적응이 됐어요. 지금은 도리어 SNS를 통해서 자존감을 얻게 되기도 해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팬들이 생기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좋아해 주시니까요.”
2017년 5월 17일. 그녀는 광화문 광장 무대에 섰다. 김광석의 노래 중 가장 밝은 노래에 속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를 마음을 담아 부르면서 그간 답답했던 대한민국 국민 가슴에 밝고 희망찬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무대에 서기를 결정한 그녀의 소신은 분명했다. 자신이 공감할 수 있고 생각이 맞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섭외되어 갔다 해도, 심지어 오디션이라도, 내 생각, 내 분위기와 맞지 않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했다.
“처음 섭외를 받았을 때는 제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좀 주저했어요. 촛불 집회에도 참석해 봤고 시민들 모습에 울컥울컥했던 적도 있어서 공감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민중가요를 해 오시던 분들이 서야 하는 무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PD님께 음악회의 취지를 듣고 나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가길 너무 잘했다고 생각해요. 시민들의 호응을 현장에서 느끼고 함께 노래하게 되니까 정말 뿌듯하고 감동적이었어요.”
“그런 의미 있는 행사 일부가 되었다는 게 영광스럽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나 혼자 잘해서 빛나는 자리가 아니어서 편하고 좋았어요. 김광석 씨도 살아 계셨으면 당연히 거기서 노래하셨을 거예요.”
그녀는 말한다. 나만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아무 곳이나 가서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서도 되는 무대라는 확신이 들어야 한다. 밝은 노래도 내가 정말 기뻐서 노래할 수 있는 곳이라야 가서 부를 수 있다. 공감을 바탕으로 마음을 담아서 노래해야 헛헛하지 않다.
‘노래하는 게 행복한’ 그녀가 노래를 통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30대 때 전주에서 음악 하시는 분들과 ‘새 생명 하모니’라는 모임을 4년 정도 했어요. 길거리 콘서트를 해서 모금한 돈으로 난치병, 희귀병 아이들의 수술비를 지원하는 거였는데요. 당시에 10명 정도의 아이들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렇게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나중에 다시 다른 아이들에게 기부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정말 귀한 경험이었죠. 지금은 안타깝게도 여유가 없어서 못 하고 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다시 하고 싶어요.”
1995년 <샘터>와의 인터뷰에서 故 김광석은 자신의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고, 동시에 ‘노래의 참된 의미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역할’ 이라고 했다. 송희원은 분명 김광석과 닮았다. 하지만 닮은 것은 그녀의 노래가 아니다. 노래와 사람을 대하는 그녀의 마음이다. 우연히 선물 받은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음반이 그녀가 무미건조한 대학 생활을 버텨내는 데 힘이 되어 주었듯이, 힘든 누군가가 그녀의 노래를 듣고 공감하고 위로받기를 바란다.
송희원은 노래하는 가수로서 기능적인 욕심은 생길 수밖에 없고, 그건 죽을 때까지 답이 없다고 한다. 끝이 없고 다다를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한계를 느낄 때마다 슬럼프도 오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게 노래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항상 막막함과 열정을 같이 느낀다. 더 깊어지고 싶고 익어가고 싶다.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은 알지만, 경험이 더 쌓이고, 그 결과 삶이 묻어나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시작은 ‘김광석’ 바라기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너무도 분명하게 송희원을 노래하기를 바라고 있다.
진행 Jennifer Lee / 글 Juyoung Lee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
내 노래는 나를 위해 부르는 나의 이야기 ‘김광석’을 노래하는 가수 송희원
한국의 가요계가 아이돌 붐으로 들썩이고 있는 요즘에도 ‘음악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닮고 싶은 가수로 김광석을 꼽는다. 무려 2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그가 여전히 ‘레전드’로 회자되며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비단 그가 서른셋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진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노래가 주는 깊이 있는 울림은 아무리 숙련된 가수라도 재생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런데 지인의 소개로 찾아간 서울 종로의 한 라이브 카페에서 한 여가수가 부르는 김광석의 노래를 듣게 되었다. 여성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김광석의 노래들이 익숙하지 않은데도 자꾸만 귀 기울이게 되어 그녀의 공연이 다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못했다. 통기타를 메고 수줍게 웃으며 인사를 한 그녀는 송희원이라고 했다.
그녀의 노래가 남긴 심상치 않은 여운이 가시지 않아 다시 카페로 가볼까 했는데, 마침 5.18 민주화운동 기념 음악회 무대에 선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청바지에 하얀 셔츠, 뒤로 묶은 머리, 그리고 통기타.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았지만, 잔잔하게 스미는 맑은 음색과 이야기처럼 들려오는 가사에 관중들은 기꺼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그녀는 유명한 가수도 아닌 자신을 무슨 이유로 인터뷰하느냐며 갸우뚱해 했다. 처음은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는 여성 가수라는 점이 신선했기 때문이고 나중은 왠지 친근감이 느껴지고 정감이 느껴져서 인간적으로 궁금해진 때문이라고 하니, 금세 만면에 미소가 한가득히 되었다. 두 이유 다 싫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편안하게 그녀의 음악 활동과 삶에 대한 이야기들을 두런두런 나누어 보았다.
첫인사, 첫 질문. 그녀는 누구일까?
“안녕하세요. 저는 노래하는 게 행복한 사람입니다. 라이브 무대에서 오랫동안 노래하다가 싱어송 라이터로 2012년도에 자작곡 7곡을 수록한 음반을 처음 냈고요, 후에 디지털 싱글도 2곡 발표했어요.”
노래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는 가수는 많다. 그런데 본인 소개를 ‘가수 누구입니다, 싱어송라이터 누구입니다’가 아닌 “노래하는 게 행복한 사람”이라 하니 가수가 되기까지 남다른 사연이 있었나 싶다.
그녀는 어떻게 가수가 되었을까?
“대학에 들어가긴 했는데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제가 좋아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대학 생활 자체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졌어요. 그러다 보니 1년도 채 안 돼서 휴학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죠. 그때쯤 우연히 통기타 동아리 오디션 대자보를 보게 됐어요. 기타를 칠 줄 몰라도 된다고 하길래 친한 친구랑 같이 오디션을 보러 갔는데 붙은 거예요. 사실 너무 떨려서 목소리도 안 나오고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감사하게도 선배들이 제 목소리를 알아봐 주시고 “뒤돌아서 다시 해봐라”,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다시 불러 봐라”하고 기회를 주시더니 뽑아주셨어요. 그렇게 통기타 동아리에 들어가서 음악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그녀는 그날이 20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고 한다. ‘내가 왜 태어났지?’ 생각하며 살다가 노래하면서 존재 이유를 처음 느끼게 됐다. 그래서 반드시 노래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고 싶은 게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쁜 일인가.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해서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기뻤어요. 무엇보다 노래할 기회가 생겼다는 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고요. 아침 일찍 아무도 없을 때 동아리 방에 가서 청소하고 혼자 연습했어요. 주변에서 선배가 “노래하고 싶니? 기타 쳐 줄게.” 하면 떨리고 싫어서 기타도 어깨너머로, 아니면 책 보면서 독학으로 배웠죠.”
딸은 대학 교육이 필요 없다 하셨을 정도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아버지 밑에 자란 막내딸, 존재감이 크고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녀가 노래하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당연히 반대하셨고, 그 허락을 받기 위해 눈밭에 무릎 꿇고 앉아 울면서 빌기도 했다. 태어나 아버지에게 반항했던 그 날은 자신도 놀라웠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낯설었지만 나쁘지 않았다. 노래를 할 수 있게 되고 그저 노래하는 게 좋았지 유명해지고 싶지도 않았다. 노래밖에 좋은 게 없어서 연애도 안 했고, 가요제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졸업하신 선배님이 대학가요제에 나가길 권하긴 하셨는데요. 저는 이미 기타 치고 노래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대회에 나갈 필요를 못 느꼈어요. 그보다는 교내 축제 공연이나 동아리 자체 공연에서 노래하고 싶었죠. 공연에 서고 싶어서 한두 달 동안 오직 한 곡만 죽자고 연습했어요. 그 노래를 내 걸로 만들고 말겠다는 의지로 연습하고 오디션을 보러 갔더니 선배님들이 “희원이는 마음으로 노래하는구나.”라고 칭찬해 주셨어요. 그 나이에 그게 쉽지 않다고도 하셨고요. 혼자 스스로 배우고 연습하는 것이 기특하다고도 해 주셨어요. 정말 기쁘고 행복했어요.”
“그렇게 동아리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가끔 동아리 선배님 소개로 CM 송(commercial message song) 녹음을 하기도 하고 소극장 공연을 하기도 했는데요. 팀을 꾸리기가 힘들어지면서 라이브 무대에 서기 시작했어요.”
김광석의 노래만 하는 건 아니지만, 그의 노래를 부르는 가수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어떻게 그의 노래를 만났을까?
“어느 날 우연히 김광석 씨 LP판을 받아서 듣게 됐는데, ‘그날들’이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제가 펑펑 운 거예요. 왜 그랬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는데요. 그냥 ‘어떻게 노래를 이렇게 표현하지?’ 싶고 굉장히 경이롭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나도 이렇게 표현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기도 했고요.”
그녀의 마음을 울린 것은 김광석의 가창력이나 테크닉이 아니라 그가 노래를 대하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제 노래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의 이야기, 행복한 사람들의 이야기,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겪고 느끼는 이야기들을 노래로 표현하는 거죠.” (1995년 <샘터> 김광석 인터뷰 中)
“김광석 씨처럼 노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해요. 진솔하게 이야기하듯 노래하는 그런 점이 정말 마음에 와닿거든요. 김광석 씨 노래가 너무 좋아지니까 사람 김광석에게도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렇게 노래를 하나 싶은 거죠. 그래서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 동물원으로 활동했던 김광석 씨 히스토리를 찾아보기도 했고, 올 1월쯤엔 ‘환생’이라는 김광석 씨 다큐멘터리도 봤어요. 너무 감동을 받아가지고 제가 그의 곡인 ‘서른 즈음에’를 부른 영상을 그 다큐 링크랑 같이 페북 (Facebook)에 올리기도 했어요.”
생전에 김광석은 학전소극장에서 무려 1,000회가 넘는 공연을 했다. 그녀는 자신도 그렇게 노래하고픈 꿈이 있다고 했다. 현재 그녀는 광화문 근처 ‘소우’(小雨)라는 라이브 카페에서 6년째 공연 중이다. 자작곡, 김광석 노래, 좋아하는 가요를 엮어서 자신만의 공연을 한다. 작년 가을, 올봄, 여름 공연을 성공적으로 올렸고, 올가을, 겨울을 포함해서 1년에 작은 공연들을 더 많이 가질 계획이다. 그녀는 소우 말고도 라이브 공연을 하루에 세 곳이나 더 다닌다.
김광석이 소극장 공연을 선호한 이유로, 관객이 바로 앞에 있어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고, 관객들 눈빛이 보이니까 자신의 노래를 어떻게 감상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는 점을 들었다고 한다. 송희원, 그녀가 라이브 카페 공연을 즐기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 같다.
“관객과 소통하며 공연하는 건 당연히 좋죠. 그런데 김광석 씨를 보고 좀 바뀐 게 있어요. 예전에는 오직 관객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노래를 했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싶어졌다는 거예요. 김광석 씨 노래 중에는 김광석 씨가 만들지 않은 곡도 많이 있잖아요. 김광석 씨는 그런 곡들에 자기 이야기를 담고 자기 감성과 목소리로 불러내면서 완전히 자기 노래로 만들어 내는 힘이 있어요. 그래서 김광석 씨 노래를 들으면 그가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고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많았던 따뜻한 사람이었던 게 느껴져요. 저도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 진솔한 나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를 내 색깔로 나 자신에게 불러주고 싶어요.”
그동안 자신의 노래를 듣고 관객들이 행복해하는 것을 바라보는 뿌듯함으로 자신의 행복감 상당 부분을 대신해 왔다면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노래하는 행복 자체를 누려보겠다는 선언 같았다. 이렇게 노래하는 게 행복한 그녀가 노래하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26살에 존경하던 선배와 결혼을 했는데요. 아들 둘 낳고 11년 정도 결혼 생활을 한 후에 헤어졌어요. 그러는 동안에 얼마간씩 노래를 쉬어야 했던 시기가 있었는데 정말 힘들었죠. 주변에 노래하는 친구들이나 선배를 보면 가슴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 들 정도였어요. 너무너무 노래하고 싶은데 현실은 그럴 수가 없으니까 그 스트레스로 몸까지 아프더라고요. 신기했던 건 아파서 응급실을 갔는데 원인이 없다고 했던 거예요. 빈혈이 너무 심해서 병원을 갔더니 빈혈 수치는 정상이라고 하고요. 가수가 숙명인가 보다 하고 노래를 다시 시작했을 땐 정말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라이브 카페에서 노래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그녀가 2016년 9월부터 페북으로 대표되는 SNS (Social Network Service)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제가 자존심이 강해서 원래 저를 남한테 공개하는 걸 꺼렸었는데요. 언젠가부터 나누고 공감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페북을 시작한 건 미국 덴버에 이민 간 친한 언니랑 연락을 주고받기 위해서였어요. 그러다 우연히 페북에 제 노래 영상 하나를 올리게 됐는데 반응이 되게 좋은 거예요. 물론 처음에는 무서운 댓글, 무책임한 댓글 때문에 스트레스도 많았죠. 그럴 때마다 아들이 크게 의미 두지 말라고 충고해 주고, 팬분들도 많이 응원해 주신 덕에 이제는 거의 적응이 됐어요. 지금은 도리어 SNS를 통해서 자존감을 얻게 되기도 해요. 의도하지 않았는데 팬들이 생기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좋아해 주시니까요.”
2017년 5월 17일. 그녀는 광화문 광장 무대에 섰다. 김광석의 노래 중 가장 밝은 노래에 속하는 ‘바람이 불어오는 곳’과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를 마음을 담아 부르면서 그간 답답했던 대한민국 국민 가슴에 밝고 희망찬 바람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무대에 서기를 결정한 그녀의 소신은 분명했다. 자신이 공감할 수 있고 생각이 맞는 곳이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반면, 섭외되어 갔다 해도, 심지어 오디션이라도, 내 생각, 내 분위기와 맞지 않으면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했다.
“처음 섭외를 받았을 때는 제 자리가 아닌 것 같아서 좀 주저했어요. 촛불 집회에도 참석해 봤고 시민들 모습에 울컥울컥했던 적도 있어서 공감이 안 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민중가요를 해 오시던 분들이 서야 하는 무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PD님께 음악회의 취지를 듣고 나니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결과적으로 가길 너무 잘했다고 생각해요. 시민들의 호응을 현장에서 느끼고 함께 노래하게 되니까 정말 뿌듯하고 감동적이었어요.”
“그런 의미 있는 행사 일부가 되었다는 게 영광스럽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나 혼자 잘해서 빛나는 자리가 아니어서 편하고 좋았어요. 김광석 씨도 살아 계셨으면 당연히 거기서 노래하셨을 거예요.”
그녀는 말한다. 나만의 이유가 있어야 한다. 아무 곳이나 가서 노래하는 가수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내가 서도 되는 무대라는 확신이 들어야 한다. 밝은 노래도 내가 정말 기뻐서 노래할 수 있는 곳이라야 가서 부를 수 있다. 공감을 바탕으로 마음을 담아서 노래해야 헛헛하지 않다.
‘노래하는 게 행복한’ 그녀가 노래를 통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30대 때 전주에서 음악 하시는 분들과 ‘새 생명 하모니’라는 모임을 4년 정도 했어요. 길거리 콘서트를 해서 모금한 돈으로 난치병, 희귀병 아이들의 수술비를 지원하는 거였는데요. 당시에 10명 정도의 아이들을 치료해 주었는데, 그렇게 도움을 받은 아이들이 나중에 다시 다른 아이들에게 기부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정말 귀한 경험이었죠. 지금은 안타깝게도 여유가 없어서 못 하고 있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다시 하고 싶어요.”
1995년 <샘터>와의 인터뷰에서 故 김광석은 자신의 노래가 ‘힘겨운 삶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비상구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고, 동시에 ‘노래의 참된 의미는 상처받은 사람들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역할’ 이라고 했다. 송희원은 분명 김광석과 닮았다. 하지만 닮은 것은 그녀의 노래가 아니다. 노래와 사람을 대하는 그녀의 마음이다. 우연히 선물 받은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음반이 그녀가 무미건조한 대학 생활을 버텨내는 데 힘이 되어 주었듯이, 힘든 누군가가 그녀의 노래를 듣고 공감하고 위로받기를 바란다.
송희원은 노래하는 가수로서 기능적인 욕심은 생길 수밖에 없고, 그건 죽을 때까지 답이 없다고 한다. 끝이 없고 다다를 수 있는 게 없기 때문이다. 한계를 느낄 때마다 슬럼프도 오지만. 그래도 하고 싶은 게 노래인 것만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항상 막막함과 열정을 같이 느낀다. 더 깊어지고 싶고 익어가고 싶다. 인위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은 알지만, 경험이 더 쌓이고, 그 결과 삶이 묻어나는 노래를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한다. 시작은 ‘김광석’ 바라기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너무도 분명하게 송희원을 노래하기를 바라고 있다.
진행 Jennifer Lee / 글 Juyoung Lee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