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독일 방문 일정 중에 작곡가 윤이상의 묘소를 참배한 기사를 전하며 연합뉴스가 헤드라인으로 뽑은 구절이다. 그만큼 윤이상은 한국 출신 작곡가 중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금기의 인물로 여겨지며 그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다.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이후 이념 논쟁에 계속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재독 동포 오길남에 대한 탈북권유 논란, 북한 정권의 윤이상 추대건 까지 겹쳐지며 그의 음악은 한국 땅에서 연주되기조차 쉽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의 하나로 논란이 된 블랙리스트에 실제 ‘윤이상평화재단’이 포함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한국의 밖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음악기법 및 사상을 융합시킨 세계적 현대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원조 블랙리스트' 윤이상, 김정숙 여사 묘지 참배로 재조명
한국에서의 활동
윤이상(1917-1995)은 경남 산청에서 출생했다. 현대 음악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과 관심이 많았지만, 음악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고에 진학했다가 결국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에 있는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다.
이후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대학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년 일제에 체포되어 두 달간 옥살이를 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 김춘수, 정윤주 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자신은 음악 부문을 맡았다. 고등학교 음악 교사를 거쳐 서울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6년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났다.
유럽에서의 활동
1956년 파리에 머물다가 1957년 베를린으로 가서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에게 배웠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여해 다른 작곡가들과 안면을 텄다. 1959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한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1964년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와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동백림 사건
윤이상의 일생을 결정지은 사건이다. 그는 1963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방북하였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 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1967년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저명한 음악인들이 주축이 되어 200여 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1967년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 삼심에서 감형받았고,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윤이상은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한국에서 그의 음악은 연주가 금지되었다.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은 서독 귀화 후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오갔다.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1995년 11월 3일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하여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으며, 1년여 뒤인 2007년 9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여하기 위해 40년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그는 늘 고향 통영의 바다와 흙이 음악 세계의 기초가 됐다고 말했지만, 동백림사건 이후 끝내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이국에서 눈을 감았다.
지난 7월 윤이상의 묘소를 찾은 김정숙 여사가 참배에 앞서 통영에서 공수한 동백나무를 묘비 바로 앞에 심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여사는 “윤이상 선생이 생전 일본에서 배를 타고 통영 앞바다까지 오셨는데 정작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울었다”며 “조국 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하던 선생을 위해 고향의 동백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가져오게 됐다”고 말했다.
윤이상의 음악
윤이상의 음악은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쓴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서의 글을 가사로 한 곡도 있다.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 최첨단 작곡 기법을 응용하여 서양 악기와 음악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고안한 주요음 (Hauptton) 기법과 주요음향 (Hauptklang) 기법이라는 작곡기법을 개척했다. 그는 유럽 현대음악의 첨단 어법으로 한국적 음향을 표현하는 데 도전했으며 작품 속에 동양의 정중동의 원리를 녹여내기도 했다고 평가받는다.
지휘자 최수열은 “여태껏 제대로 연주되지 않은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며 “윤이상은 전통 악기나 특수 악기 없이 기본 오케스트라로 매우 전통적인 소리와 음향을 빚어낸다”고 설명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박제희는 “윤이상은 분명 서양 기보법으로 자신의 음악적 메시지를 전했지만, 그가 사용한 하나의 음에는 발생과 전개, 성장, 끝맺음 등 동양적 사고가 담겨 있다”며 “윤이상 음악에는 딱 그만의 색깔과 사운드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음악계 이곳저곳에서도 그의 음악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코리안심포니가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죽음에 관한 두개의 교향시’라는 주제 아래 윤이상의 ‘화염 속의 천사’ 등을 연주했다.
‘화염 속의 천사’는 독재 정권 시절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분신자살을 한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윤이상이 1995년 발표한 교향시다. 서울시향은 광복절 기념음악회 프로그램 중 하나로 윤이상의 ‘예악’을 선보였고, 첼리스트 고봉인은 9월 금호아트홀에서 윤이상 특별 무대를 열었다.
에스카사 편집부
지난 7월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독일 방문 일정 중에 작곡가 윤이상의 묘소를 참배한 기사를 전하며 연합뉴스가 헤드라인으로 뽑은 구절이다. 그만큼 윤이상은 한국 출신 작곡가 중 국제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금기의 인물로 여겨지며 그의 음악을 제대로 들어본 사람이 거의 없다.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이후 이념 논쟁에 계속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재독 동포 오길남에 대한 탈북권유 논란, 북한 정권의 윤이상 추대건 까지 겹쳐지며 그의 음악은 한국 땅에서 연주되기조차 쉽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국정농단 사건의 하나로 논란이 된 블랙리스트에 실제 ‘윤이상평화재단’이 포함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정작 한국의 밖에서는 동양과 서양의 음악기법 및 사상을 융합시킨 세계적 현대 음악가로 평가받고 있다.
'원조 블랙리스트' 윤이상, 김정숙 여사 묘지 참배로 재조명
한국에서의 활동
윤이상(1917-1995)은 경남 산청에서 출생했다. 현대 음악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재능과 관심이 많았지만, 음악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상고에 진학했다가 결국 서울로 올라가 군악대 출신의 바이올린 연주자로부터 화성학을 공부하고 도서관에 있는 악보를 보며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했다.
이후 오사카에 있는 상업학교에 입학하고 오사카 음악대학에서 첼로, 작곡, 음악 이론을 배웠다. 1937년 통영으로 돌아와 화양학원(지금의 화양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있으면서 오페라 문헌을 연구하고 작곡을 계속하며 첫 동요집 <목동의 노래>를 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4년 일제에 체포되어 두 달간 옥살이를 했다. 광복 후 고향으로 돌아가 유치환, 김춘수, 정윤주 등 통영의 예술인들과 함께 통영문화협회를 만들고 자신은 음악 부문을 맡았다. 고등학교 음악 교사를 거쳐 서울대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고 작품과 평론을 활발하게 발표했다. 1956년 20세기 작곡기법과 음악이론을 공부하기 위하여 유럽으로 떠났다.
유럽에서의 활동
1956년 파리에 머물다가 1957년 베를린으로 가서 라인하르트 슈바르츠쉴링, 보리스 블라허, 요세프 루퍼 등에게 배웠다. 1958년 다름슈타트에서 열린 국제 현대 음악 강습에 참여해 다른 작곡가들과 안면을 텄다. 1959년 빌토번에서 <피아노를 위한 다섯 작품>을, 다름슈타트에서 <일곱 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초연했다. 동아시아 음악의 요소를 서양 음악에 접목한 그의 작품은 음악계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1964년 부인과 두 아이와 함께 서베를린에 정착했다. 1965년 초연한 불교 주제에 의한 오라토리오 <오 연꽃 속의 진주여>와 1966년 도나우싱엔 음악제에서 초연한 관현악곡 <예악>은 그를 국제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동백림 사건
윤이상의 일생을 결정지은 사건이다. 그는 1963년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오랜 친우인 최상학을 만났다. 또한, 한민족의 이상을 동물 형상으로 표현한 사신도를 통해 예술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 방북하였다. 하지만 당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윤이상의 친북 행적을 포착, 내사에 들어갔다. 1967년 윤이상과 부인 이수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송환되었다. 그는 유럽으로 건너간 다른 유학생들과 함께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이고리 스트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저명한 음악인들이 주축이 되어 200여 명의 유럽 음악인들이 대한민국 정부에 공동 탄원서를 내어 윤이상의 수감에 대해 항의했다. 1967년 1차 공판에서 윤이상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재심, 삼심에서 감형받았고,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윤이상은 서독으로 국적을 바꿨고, 그 뒤 그는 죽을 때까지 대한민국에 입국할 수 없었고 한국에서 그의 음악은 연주가 금지되었다.
동백림 사건 이후
윤이상은 서독 귀화 후 대학교수로 재직하고 작품 활동을 하면서 북한을 오갔다. 북한에서는 1982년부터 매년 윤이상 음악제가 개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도 그의 음악이 해금되어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1988년 일본에서 남북 합동 음악회를 열 것을 남북 정부에 건의하였는데, 이것이 이루어져 1990년 10월 서울전통음악연주단 대표 17명이 평양으로 초청받아 범민족 통일음악회가 열렸다. 1995년 11월 3일 독일 베를린 발트병원에서 폐렴으로 별세하였다.
2006년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에서 그가 연루되었던 동백림사건이 부정선거에 대한 거센 비판 여론을 무마시키기 위해 과장되고 확대하여 해석되었다는 조사 결과를 공표했으며, 1년여 뒤인 2007년 9월 미망인 이수자가 윤이상 탄생 90주년 기념 축전에 참여하기 위해 40년만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그는 늘 고향 통영의 바다와 흙이 음악 세계의 기초가 됐다고 말했지만, 동백림사건 이후 끝내 고국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이국에서 눈을 감았다.
지난 7월 윤이상의 묘소를 찾은 김정숙 여사가 참배에 앞서 통영에서 공수한 동백나무를 묘비 바로 앞에 심은 것도 이 때문이다. 김 여사는 “윤이상 선생이 생전 일본에서 배를 타고 통영 앞바다까지 오셨는데 정작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울었다”며 “조국 독립과 민주화를 염원하던 선생을 위해 고향의 동백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가져오게 됐다”고 말했다.
윤이상의 음악
윤이상의 음악은 서양 음악에 동양적인 요소를 쓴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도교와 불교를 소재로 하는 곡이 많고, 성서의 글을 가사로 한 곡도 있다. 생애 대부분을 기독교 신자로 보냈고, 말년에 불교에 귀의하였다. 클러스터 기법 등 당대 최첨단 작곡 기법을 응용하여 서양 악기와 음악체계로 동양적인 음색과 미학을 표현할 수 있게 고안한 주요음 (Hauptton) 기법과 주요음향 (Hauptklang) 기법이라는 작곡기법을 개척했다. 그는 유럽 현대음악의 첨단 어법으로 한국적 음향을 표현하는 데 도전했으며 작품 속에 동양의 정중동의 원리를 녹여내기도 했다고 평가받는다.
지휘자 최수열은 “여태껏 제대로 연주되지 않은 것을 늘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며 “윤이상은 전통 악기나 특수 악기 없이 기본 오케스트라로 매우 전통적인 소리와 음향을 빚어낸다”고 설명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박제희는 “윤이상은 분명 서양 기보법으로 자신의 음악적 메시지를 전했지만, 그가 사용한 하나의 음에는 발생과 전개, 성장, 끝맺음 등 동양적 사고가 담겨 있다”며 “윤이상 음악에는 딱 그만의 색깔과 사운드가 있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음악계 이곳저곳에서도 그의 음악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코리안심포니가 서초동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죽음에 관한 두개의 교향시’라는 주제 아래 윤이상의 ‘화염 속의 천사’ 등을 연주했다.
‘화염 속의 천사’는 독재 정권 시절 민주주의를 갈망하며 분신자살을 한 학생들을 추모하기 위해 윤이상이 1995년 발표한 교향시다. 서울시향은 광복절 기념음악회 프로그램 중 하나로 윤이상의 ‘예악’을 선보였고, 첼리스트 고봉인은 9월 금호아트홀에서 윤이상 특별 무대를 열었다.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