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이어 우주를 표현하는 예술가 선한 사람 강익중을 논(論)하다

백남준이 생전에 제자로 인정한 유일한 화가이자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는 세계적인 작가. 전 세계 어린이의 꿈과 희망이 그려진 작은 작품을 모아 평화와 행복이라는 큰 메시지를 전하는 공공예술 작가. 세계 유명 미술관이나 공항, 역사, 도서관 등 공공장소에서 작품으로 만날 수 있는 작가. 구겐하임 뮤지엄 소장품 ‘1392개의 달항아리’와 광화문 복원공사를 위한 가림막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달항아리를 그린 작가…. 뉴욕에서 35년째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인 예술가 강익중을 수식하는 단어는 이처럼 끝이 없다.
백남준 이후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빛내는 예술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는 작품도 작품이지만, 몇 마디 대화에서도 선한 사람이 가진 슬기로움과 겸손한 태도로 상대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다. 그가 오늘날 세계인의 감동을 끌어낸 최고의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작업실에서 에스카사 편집부와 만난 강익중은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선(善)과 애(愛), 우주(宇宙)를 얘기했다. 그의 맑고 선한 눈빛을 마주하고, 우리는 그와 같은 뉴욕 땅에 사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인간 강익중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인생은 기차여행입니다.
인연은 같은 기차에 올라타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거죠.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제각각이지만
모두 이어져 있습니다.”
공공미술은 이어진 모두의 마음으로
우주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뉴욕에 온 가난한 유학생 강익중. 홍익대를 졸업한 강익중은 1984년 예술의 도시 뉴욕에 왔다. 그러나 그는 여느 화가들처럼 예술가의 꿈을 펼치기 위해 뉴욕에 온 게 아니었다. “미국에는 돈을 벌려고 왔습니다. 돈을 벌어 부모님의 고생을 덜어드리는 게 저의 유일한 목표였으니까요.”
프렛(Pratt Institute) 대학원생으로 등록한 뒤 곧장 생활 전선으로 나선 그는 밤에는 델리가게에서 채소를 다듬고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차이나타운 벼룩시장에서 노점상을 하기도 하고 옷가게 점원으로 일했다. 뉴욕에 와서 10년 동안 주중과 주말, 밤낮없이 일하면서 학업과 작업을 병행해야만 했다. “지하철은 제 작업실이었습니다. 집과 직장간 장거리 이동 시간이 유일한 자유시간이었는데 어떻게 하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까 고민하다가 지하철에서 할 수 있는,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3x3’ 미니 캔버스 작품’이 나온거죠.”
강익중의 트레이드 마크인 ‘3x3’ 미니 캔버스 작품은 지하철을 오가며 주변의 모습과 일상의 풍경을 기록한 어려운 유학생 시기의 산물인 셈이다. 그는 우연히 한 친구의 소개로 매일 몇 개씩 완성한 작품 1,000점을 모아 1985년 롱아일랜드 대학 브루클린 캠퍼스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게 된다. 강익중의 ‘3인치 작품’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이다.
다음 해, 맨해튼 소호에 있는 비영리 화랑 Two Raw Gallery에서 뉴욕에서의 두 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한 달간의 리빙 퍼포먼스’로 갤러리에 텐트를 치고 하루 10시간씩 한 달간 매달리며 실연한 것이다. 91년엔 플러싱 메인스트릿 전철역에 2,000여 그림을 모은 <해피 월드>를 설치했다. 돈 버는 일에 대부분 시간을 빼앗겼던 그였지만, 타고난 재능과 단 1분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뉴욕 생활 10년 후 본격적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90년, 뉴욕주정부 예술기금(NYFA)
1996년, 존미첼 기금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1997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화관광부
1992년, 뉴욕주정부 예술기금(NYFA)
1998년, 미국 티파니재단 기금
2012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프렛 인스티튜트 동창 어취브먼트상

전환점이 된 1994년, 백남준과 강익중의 만남
1994년 발표한 샌프란시스코 공항 벽화는 강익중 작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2만여 점의 그림이 모인 높이 3m, 길이 22m의 대형 설치작은 그가 뉴욕의 일상에서 모은 다양한 소재가 바탕이 된 3인치 작품이 하나의 완성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작품으로 큰돈을 벌지는 못해도 작업만으로 생활은 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든 그는 9년째 해 오던 옷가게 점원일을 그만두고 작가로서의 삶에 몰두한다. 같은 해 코네티컷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과 함께한 ‘멀티플/대화’ 전을 연다. 백남준의 TV 모니터와 강익중의 미니 캔버스가 만난 자리였다. 강익중에게는 믿기 어려운 꿈같은 일이자 최고의 기회였다.
“다른 전시회로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였는데 큐레이터 유지니 사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코네티컷 휘트니 미술관에서 기획을 한 전시회인데 ‘두사람이 비빔밥처럼 갖가지 재료를 섞어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공통점을 가졌으니 2인 전시회를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잠결에 전화를 받아서 꿈을 꾼 줄 알았죠.”
두 작가의 공통된 사고관인 ‘비빔밥론’처럼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물을 모아 ‘합해진 객체들의 총합을 질적으로 넘어서는' 의미를 창출하고, 더 나아가 하찮은 물건을 통해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도 설명할 수 있음을 시연한 전시였다. 당시 이미 세계적인 작가 백남준은 그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왔을까?
“백남준 선생님과 코네티컷 휘트니 미술관에서 2인 전시회를 준비 중일 때였어요. 당시 백남준 선생님은 독일 뒤셀도르프에 계셨는데 미술관 측에 팩스를 보내셨습니다...
‘I am very flexible. It is very important that Ik-Joong has the better space. (나는 괜찮다. 강익중이 좋은 자리를 얻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단 두 문장이었죠.”
세간에선 백남준과의 만남을 두고 ‘강익중을 작가의 위상에 올라서도록 도왔다’는 점에 주목하지만, 백남준은 그가 목마르게 찾던 멘토였다.
“어느 날 오프닝 행사가 끝나고 선생님은 솔로몬 브라더스의 은행장이자 재벌 후계자가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현재 월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 변화에 대해 전문가 이상의 깊이 있는 의견을 말씀하신 뒤, ‘천 년 후엔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생각해 봤느냐’고 물으셨어요. 그 질문은 아무리 돈이 많은 상대라도 작아지게 만드는 질문이었죠. 제가 그날 충격을 받고 깨달은 건 백남준 선생은 ‘낮에 별을 보는 무당’, ‘천년 앞을 내다보는 엄청난 상상력을 가진 부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백남준에게서 ‘진짜 예술가란 과거와 미래를, 우주와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바라보고 연결하는 사람’이라는 걸 배웠다. 파리에서 만난, 당시 84세의 김환기 작가의 미망인 김향안 여사도 그 시절에 만난 멘토였다.
“여사님의 조언 중, 첫째가 ‘아침을 잘 먹어라’였어요. 그 얘긴 건강과 기본을 지키며 순리에 맞게 한 계단씩 정석으로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둘째, 팁을 후하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팁을 받는 사람 뒤엔 가족과 이웃 있다는 걸 기억하라는 뜻이었지요. 셋째, ‘기회’와 ‘유혹’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대부분 사람은 유혹을 기회로, 기회를 유혹으로 생각하지요. 그 분별은 사실 그리 어렵진 않아요. 지금 하는 일이 역사와 민족과 세계에 도움이 되는지...
여사님께서 ‘유혹인지 기회인 지는 세 가지 공익성을 먼저 생각하면 쉽게 구분이 된다.’고 하신 말씀을 아직도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분과의 대화는 젊은 시절 강익중을 먹이고 키우며 자라게 했다. 그는 그분들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세상을 더 넓게 보는 마음의 그릇을 키웠다. 인생의 계단을 밟으며 한 단계씩 오를 때에도 온전한 마무리를 하고 난 뒤에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습관도 이때 배웠다.

40代에는 남북을, 50代엔 세상을, 60代에는 우주를
강익중의 나이가 40이 되던 시기이자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부터 강익중의 작품세계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한다. 전 세계 어린이들로부터 그림을 수집하여 3인치 캔버스와 함께 강익중 하면 떠오르는 ‘공공미술’ 활동이 본격화한 것이다.
“수재와 천재의 차이가 뭔지 아시나요? 천재의 성과물은 본인이 의식했건 아니건 공익성을 가집니다. 공익성은 역사와 민족,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죠. 김향안 여사의 말씀으로 깨우친, ‘역사와 민족을 위해 과연 내가 한 게 무엇인가.’라는 자문의 결론은 제 ‘위치파악부터 하자’였습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나 모든 행위의 기본은 ‘위치 파악’입니다. 철학이란 게 잠자는 영혼을 깨우듯이 저 역시 예술가로 돈을 벌고 성공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잠자는 제 영혼을 찌르는 거죠. 예술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제 위치를 알려는 행위입니다.”
민족과 나라를 위하는 일을 자신의 위치로 정한 그는 그해 141개국 어린이들에게 ‘나의 꿈’을 주제로 한 그림을 받아 파주 통일 동산에서 '십만의 꿈' 전을 개최했다. 9.11 테러 이후인 2001년도에는 유엔 건물 로비에 135개국 34,000명 어린이의 작품 '놀라운 세계'가 설치되었다. 이어 3년 뒤에는 일산 호수공원에 130,000여 장의 그림을 붙인 대형 풍선 '꿈의 달'을 띄웠다. 켄터키주 무하마드 알리 센터에는 7,000여 그림이 모인 작품이 개관 기념으로 선보인다. 같은 해 프린스턴 공립도서관 로비에는 '동네 사람들의 작품과 애장품'을 모은 '행복한 세상'이 영구 전시를 시작했다. 2017년 평창에서는 200여 명 발달장애 어린이들과 3인치 그림 그리기 행사를 진행했다. 이렇듯 아이들과 평범한 사람의 작품을 모아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일, 그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질 듯하다.
“저는 꽤 오래전부터 ‘40살까지는 날 위해서 정말 열심히 작업하자. 그 후엔 남과 북에 대해서 생각하고 50대가 되면 세계를 논하자. 그리고 60이 넘으면 우주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며 살았어요. 저 자신에게만 매몰되지 않고 사람의 작은 마음을 모으는 것, 그 마음을 모아 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분단의 조국과 세계를 생각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요. 쉬운 예로,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져 숨을 불어넣으면 하나의 완전한 소리를 만듭니다. 이렇듯 남과 북이 가진 음과 양의 기운을 모아 통일을 그리거나 완전한 세계를 표현하고 세계가 한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저의 또 다른 ‘위치찾기’이지요. 둘이 만나 완벽함을 이루는 한글이나 모든 걸 담아내는 달항아리를 작업 소재로 쓰기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달항아리는 형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두리뭉실함으로 모든 사람의 삶을, 세계를 다 담을 수 있는 포용성의 상징이다. 그에게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정점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과거에서 미래를 꺼내기도 한다. 그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머지않은 미래에 그가 보여줄 우주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몸에 밴 겸손, 삶을 대하는 강익중의 태도
강익중의 작업실은 차이나타운 중심 지역에 있다. 그는 넉넉하지 못했던 유학생 시절 대부분을 이곳에서보냈다. 이 때 가진 소박한 취향을 아직도 그대로 갖고 있다.
“삶을 대할 때 먼지처럼 더욱더 작아지려고 합니다. 먼지는 장벽이 필요 없지요. 벽이 있다고 해도 그 벽을 넘어 더 멀리, 더 많이 봅니다. 피카소가 작품에서 자신의 재주가 드러나지 않도록 왼손으로 붓을 들고 그리기 시작했다는 얘기와 닿아있습니다.”
겸손과 소박함이 몸에 밴 그는 만나는 상대가 누구이건 한결같은 태도로 먼지처럼 작아진 모습으로 상대를 대한다. 이런 그를 만나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강익중의 작품에서는 인간 강익중이 보인다
“캔버스 앞에 무조건 있다고 창의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제가 늘 새벽같이 일어나 몇 시간씩 규칙적으로 작업하니까 성실하다는 평가도 받지만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성실한 건 아니죠. 끊임없이 자기를 부수는 노력, 남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짜 성실입니다. 작가란 상상력이 커야 하는데 예술가로 자처하며 자기 세계에만 사로잡혀 있는 작가에겐 큰 상상력이 생기지 않기에 … 전 늘 그점을 경계합니다.”
강익중의 그림은 그의 삶만큼이나 정직하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진심이 담겨있다. 그는 예술가로 보이려는 강박감이 없지만, 예술가의 임무에 대해서는 스스로 엄격한 룰을 적용한다. 그러면서 예술가의 범주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유연하다.
“세상에 할 게 얼마나 많고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까? 작가는 그런 수많은 일 중 하나일 뿐 숙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몇 해 전 뉴욕 지역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났어요. 지금이야 자동으로 통행료를 받지만, 당시는 통행료를 직접 내기 때문에 늘 막혔죠. 그런데 톨 부스 중 한 곳이 막히지 않고 술술 빠지더라는 거죠. 알고 보니 그 부스에서 일하는 분이 잔돈을 미리 준비해서 차의 흐름을 막지 않는 슬기로움을 발휘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작은 일일지라도 자기 일에 열중하여 창의력을 발휘하여 남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스스로 만족하면 그게 작가의 마인드인 셈이죠.”
그래서 강익중의 작품은 어렵지 않다. 그의 작품은 그림을 감상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에 부응하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의미가 명백하다. 그는 자신이 행복해지길 원하고 타인이 행복해지길 원한다. 작가의 바람이 그림에서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숫자와 기호에 불과하고 어린아이와 노인의 서툰 솜씨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어떤 완결된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한곳에 모이니까 거기에 우주가 있다. 작가의 표현대로 그곳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있다.
강익중의 명랑학파 그리고 공공미술
“공공미술은 세상을 바꾸는 일종의 ‘문화혁명’입니다. 모든 혁명에는 대의명분(Why)과 주도자(Who), 이를 따르는 대중(People)이 필요하죠.
문화혁명을 이뤄낼 공공미술은 기획단계부터 소통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중과의 소통은 명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만일 예술에도 학파가 있다면 제가 속한 학파는 명랑학파일 겁니다.”
그는 2016년 9월에 런던의 대표적인 문화행사 '토털리 템즈(Totally Thames)' 에 초대받아 500명 실향민의 그림으로 완성한 3층 건물 높이의 거대 연등 작품 '집으로 가는 길(Floating Dreams)' 을 템즈강에 띄우며 주목을 받았다.
“처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거절하시던 분들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고향 그림을 그리시더군요.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우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분들의 소원은 꿈에서라도 고향 땅을 밟아보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공미술은 세계라는 캔버스 위에 ‘희망’이라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입니다. 희망은 기다림(When)이죠. 설익은 밥을 먹을 수 없듯이 희망의 씨앗을 심고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이역만리 낯선 강물에 띄워진 우리 어르신들의 간절한 희망이 대서양 태평양을 지나 대동강 두만강까지 전해졌다고 믿습니다.”
선한 사람 강익중, 꿈을 꾸는 사람 강익중
그는 천성이 착하다. 선한 사람이 가진 슬기로움이 눈에 보인다. 그에겐 묘한 언밸런스가 있다. 작은 일상을 이야기하는데 듣다 보면 스케일이 크다. 실용적인 사람이다 싶었는데 상상의 끝이 안 보인다. 강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아주 집요한 원칙이 있다. 그런 비대칭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하늘을 보고 걷다 보면 휘청거리고 넘어지기 쉽다. 땅과 앞을 보고 걸어야 안전하게 걷는다. 그런데 일상에 매몰되어 바쁘게 살다 보면 하늘 한번 쳐다보고 지나가지 않는 날이 쌓이게 된다. 잘 걷지만, 상상력과 꿈은 포기해야만 한다. 그런데 강익중은 하늘을 보면서도 땅을 딛으며 잘 걷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아쉬운 인터뷰를 마치면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했다. 그는 후대에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 걸까?
“강을 건너는 배는 자국을 남기지 않습니다. 기름이 샐 때만 흔적이 남지요. 인생이라는 배의 노를 열심히 저었으니, 이제는 잡고 있던 노를 내려놓고 강 건너에 배가 닿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입니다. 인생의 배를 탄 우리는 노를 열심히 저었으니, 미래는 잡고 있던 노를 내려놓고 강 건너에 배가 닿을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다행히 예술가에게는 목적지가 따로 없습니다. 매 순간을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 목적이고 인연이 닿는 곳이 목적지입니다.”
그는 누구나 아는 바쁜 유명인이다. 하지만 누구나 반갑게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다. 기꺼이 자신의 작업실을 보여주고, 차이나타운을 함께 걸으며 동네 구경을 시켜줄 사람이다. 여기에 푸짐한 중국 음식으로 한 끼 식사를 나누며 미소와 함께 상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줄 것 같은 기대를 해도 좋을 사람이다. 진정한 인간애(愛)를 가진 선한 사람 강익중. 그는 시종일관 해맑은 미소로, 들려주는 얘기마다 메모장에 적어넣을 만한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기분 좋은 부러움까지 안겨주며 말이다.
기획 Won Young Park / 글 Jennifer Lee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
사진 George Jung, Doyoung Kim, Woongchul An
사람의 마음을 이어 우주를 표현하는 예술가 선한 사람 강익중을 논(論)하다
백남준이 생전에 제자로 인정한 유일한 화가이자 국제무대에서 주목받는 세계적인 작가. 전 세계 어린이의 꿈과 희망이 그려진 작은 작품을 모아 평화와 행복이라는 큰 메시지를 전하는 공공예술 작가. 세계 유명 미술관이나 공항, 역사, 도서관 등 공공장소에서 작품으로 만날 수 있는 작가. 구겐하임 뮤지엄 소장품 ‘1392개의 달항아리’와 광화문 복원공사를 위한 가림막으로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달항아리를 그린 작가…. 뉴욕에서 35년째 활동하고 있는 세계적인 예술가 강익중을 수식하는 단어는 이처럼 끝이 없다.
백남준 이후 국제무대에서 한국을 빛내는 예술가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그는 작품도 작품이지만, 몇 마디 대화에서도 선한 사람이 가진 슬기로움과 겸손한 태도로 상대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다. 그가 오늘날 세계인의 감동을 끌어낸 최고의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작업실에서 에스카사 편집부와 만난 강익중은 인터뷰 내내 시종일관 미소를 지으며 선(善)과 애(愛), 우주(宇宙)를 얘기했다. 그의 맑고 선한 눈빛을 마주하고, 우리는 그와 같은 뉴욕 땅에 사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러움을 느끼며 인간 강익중과의 대화를 이어나갔다.
“인생은 기차여행입니다.
인연은 같은 기차에 올라타서 같은 풍경을 바라보는 거죠.
‘바람으로 섞이고 땅으로 이어지고’….
우리는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제각각이지만
모두 이어져 있습니다.”
공공미술은 이어진 모두의 마음으로
우주를 만드는 작업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뉴욕에 온 가난한 유학생 강익중. 홍익대를 졸업한 강익중은 1984년 예술의 도시 뉴욕에 왔다. 그러나 그는 여느 화가들처럼 예술가의 꿈을 펼치기 위해 뉴욕에 온 게 아니었다. “미국에는 돈을 벌려고 왔습니다. 돈을 벌어 부모님의 고생을 덜어드리는 게 저의 유일한 목표였으니까요.”
프렛(Pratt Institute) 대학원생으로 등록한 뒤 곧장 생활 전선으로 나선 그는 밤에는 델리가게에서 채소를 다듬고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차이나타운 벼룩시장에서 노점상을 하기도 하고 옷가게 점원으로 일했다. 뉴욕에 와서 10년 동안 주중과 주말, 밤낮없이 일하면서 학업과 작업을 병행해야만 했다. “지하철은 제 작업실이었습니다. 집과 직장간 장거리 이동 시간이 유일한 자유시간이었는데 어떻게 하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까 고민하다가 지하철에서 할 수 있는, 손바닥에 쏙 들어가는 ‘3x3’ 미니 캔버스 작품’이 나온거죠.”
강익중의 트레이드 마크인 ‘3x3’ 미니 캔버스 작품은 지하철을 오가며 주변의 모습과 일상의 풍경을 기록한 어려운 유학생 시기의 산물인 셈이다. 그는 우연히 한 친구의 소개로 매일 몇 개씩 완성한 작품 1,000점을 모아 1985년 롱아일랜드 대학 브루클린 캠퍼스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게 된다. 강익중의 ‘3인치 작품’이 세상에 첫선을 보인 것이다.
다음 해, 맨해튼 소호에 있는 비영리 화랑 Two Raw Gallery에서 뉴욕에서의 두 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한 달간의 리빙 퍼포먼스’로 갤러리에 텐트를 치고 하루 10시간씩 한 달간 매달리며 실연한 것이다. 91년엔 플러싱 메인스트릿 전철역에 2,000여 그림을 모은 <해피 월드>를 설치했다. 돈 버는 일에 대부분 시간을 빼앗겼던 그였지만, 타고난 재능과 단 1분의 시간도 낭비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뉴욕 생활 10년 후 본격적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1990년, 뉴욕주정부 예술기금(NYFA)
1996년, 존미첼 기금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상
1997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문화관광부
1992년, 뉴욕주정부 예술기금(NYFA)
1998년, 미국 티파니재단 기금
2012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대통령상,프렛 인스티튜트 동창 어취브먼트상
전환점이 된 1994년, 백남준과 강익중의 만남
1994년 발표한 샌프란시스코 공항 벽화는 강익중 작가 인생의 터닝포인트였다. 2만여 점의 그림이 모인 높이 3m, 길이 22m의 대형 설치작은 그가 뉴욕의 일상에서 모은 다양한 소재가 바탕이 된 3인치 작품이 하나의 완성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작품으로 큰돈을 벌지는 못해도 작업만으로 생활은 할 수 있겠다.’는 자신이 든 그는 9년째 해 오던 옷가게 점원일을 그만두고 작가로서의 삶에 몰두한다. 같은 해 코네티컷 휘트니 미술관에서 백남준과 함께한 ‘멀티플/대화’ 전을 연다. 백남준의 TV 모니터와 강익중의 미니 캔버스가 만난 자리였다. 강익중에게는 믿기 어려운 꿈같은 일이자 최고의 기회였다.
“다른 전시회로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였는데 큐레이터 유지니 사이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코네티컷 휘트니 미술관에서 기획을 한 전시회인데 ‘두사람이 비빔밥처럼 갖가지 재료를 섞어 반복적으로 표현하는 공통점을 가졌으니 2인 전시회를 하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잠결에 전화를 받아서 꿈을 꾼 줄 알았죠.”
두 작가의 공통된 사고관인 ‘비빔밥론’처럼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물을 모아 ‘합해진 객체들의 총합을 질적으로 넘어서는' 의미를 창출하고, 더 나아가 하찮은 물건을 통해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도 설명할 수 있음을 시연한 전시였다. 당시 이미 세계적인 작가 백남준은 그에게 어떤 존재로 다가왔을까?
“백남준 선생님과 코네티컷 휘트니 미술관에서 2인 전시회를 준비 중일 때였어요. 당시 백남준 선생님은 독일 뒤셀도르프에 계셨는데 미술관 측에 팩스를 보내셨습니다...
‘I am very flexible. It is very important that Ik-Joong has the better space. (나는 괜찮다. 강익중이 좋은 자리를 얻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단 두 문장이었죠.”
세간에선 백남준과의 만남을 두고 ‘강익중을 작가의 위상에 올라서도록 도왔다’는 점에 주목하지만, 백남준은 그가 목마르게 찾던 멘토였다.
“어느 날 오프닝 행사가 끝나고 선생님은 솔로몬 브라더스의 은행장이자 재벌 후계자가 초대한 저녁 식사 자리에서 현재 월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경제 변화에 대해 전문가 이상의 깊이 있는 의견을 말씀하신 뒤, ‘천 년 후엔 무슨 일이 일어나는 줄 생각해 봤느냐’고 물으셨어요. 그 질문은 아무리 돈이 많은 상대라도 작아지게 만드는 질문이었죠. 제가 그날 충격을 받고 깨달은 건 백남준 선생은 ‘낮에 별을 보는 무당’, ‘천년 앞을 내다보는 엄청난 상상력을 가진 부자’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는 백남준에게서 ‘진짜 예술가란 과거와 미래를, 우주와 사람의 마음을 동시에 바라보고 연결하는 사람’이라는 걸 배웠다. 파리에서 만난, 당시 84세의 김환기 작가의 미망인 김향안 여사도 그 시절에 만난 멘토였다.
“여사님의 조언 중, 첫째가 ‘아침을 잘 먹어라’였어요. 그 얘긴 건강과 기본을 지키며 순리에 맞게 한 계단씩 정석으로 가라는 뜻이었습니다. 둘째, 팁을 후하게 주라고 하셨습니다. 팁을 받는 사람 뒤엔 가족과 이웃 있다는 걸 기억하라는 뜻이었지요. 셋째, ‘기회’와 ‘유혹’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대부분 사람은 유혹을 기회로, 기회를 유혹으로 생각하지요. 그 분별은 사실 그리 어렵진 않아요. 지금 하는 일이 역사와 민족과 세계에 도움이 되는지...
여사님께서 ‘유혹인지 기회인 지는 세 가지 공익성을 먼저 생각하면 쉽게 구분이 된다.’고 하신 말씀을 아직도 깊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두 분과의 대화는 젊은 시절 강익중을 먹이고 키우며 자라게 했다. 그는 그분들의 마음을 읽으려고 노력하면서 세상을 더 넓게 보는 마음의 그릇을 키웠다. 인생의 계단을 밟으며 한 단계씩 오를 때에도 온전한 마무리를 하고 난 뒤에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습관도 이때 배웠다.
40代에는 남북을, 50代엔 세상을, 60代에는 우주를
강익중의 나이가 40이 되던 시기이자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부터 강익중의 작품세계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이한다. 전 세계 어린이들로부터 그림을 수집하여 3인치 캔버스와 함께 강익중 하면 떠오르는 ‘공공미술’ 활동이 본격화한 것이다.
“수재와 천재의 차이가 뭔지 아시나요? 천재의 성과물은 본인이 의식했건 아니건 공익성을 가집니다. 공익성은 역사와 민족, 세계에 기반을 두고 있죠. 김향안 여사의 말씀으로 깨우친, ‘역사와 민족을 위해 과연 내가 한 게 무엇인가.’라는 자문의 결론은 제 ‘위치파악부터 하자’였습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나 모든 행위의 기본은 ‘위치 파악’입니다. 철학이란 게 잠자는 영혼을 깨우듯이 저 역시 예술가로 돈을 벌고 성공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라 잠자는 제 영혼을 찌르는 거죠. 예술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 제 위치를 알려는 행위입니다.”
민족과 나라를 위하는 일을 자신의 위치로 정한 그는 그해 141개국 어린이들에게 ‘나의 꿈’을 주제로 한 그림을 받아 파주 통일 동산에서 '십만의 꿈' 전을 개최했다. 9.11 테러 이후인 2001년도에는 유엔 건물 로비에 135개국 34,000명 어린이의 작품 '놀라운 세계'가 설치되었다. 이어 3년 뒤에는 일산 호수공원에 130,000여 장의 그림을 붙인 대형 풍선 '꿈의 달'을 띄웠다. 켄터키주 무하마드 알리 센터에는 7,000여 그림이 모인 작품이 개관 기념으로 선보인다. 같은 해 프린스턴 공립도서관 로비에는 '동네 사람들의 작품과 애장품'을 모은 '행복한 세상'이 영구 전시를 시작했다. 2017년 평창에서는 200여 명 발달장애 어린이들과 3인치 그림 그리기 행사를 진행했다. 이렇듯 아이들과 평범한 사람의 작품을 모아 세계가 하나가 되도록 만드는 일, 그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질 듯하다.
“저는 꽤 오래전부터 ‘40살까지는 날 위해서 정말 열심히 작업하자. 그 후엔 남과 북에 대해서 생각하고 50대가 되면 세계를 논하자. 그리고 60이 넘으면 우주를 생각하는 사람이 되자’고 다짐하며 살았어요. 저 자신에게만 매몰되지 않고 사람의 작은 마음을 모으는 것, 그 마음을 모아 큰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분단의 조국과 세계를 생각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지요. 쉬운 예로,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져 숨을 불어넣으면 하나의 완전한 소리를 만듭니다. 이렇듯 남과 북이 가진 음과 양의 기운을 모아 통일을 그리거나 완전한 세계를 표현하고 세계가 한 가족이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일은 저의 또 다른 ‘위치찾기’이지요. 둘이 만나 완벽함을 이루는 한글이나 모든 걸 담아내는 달항아리를 작업 소재로 쓰기 시작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달항아리는 형체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두리뭉실함으로 모든 사람의 삶을, 세계를 다 담을 수 있는 포용성의 상징이다. 그에게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정점일 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과거에서 미래를 꺼내기도 한다. 그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머지않은 미래에 그가 보여줄 우주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몸에 밴 겸손, 삶을 대하는 강익중의 태도
강익중의 작업실은 차이나타운 중심 지역에 있다. 그는 넉넉하지 못했던 유학생 시절 대부분을 이곳에서보냈다. 이 때 가진 소박한 취향을 아직도 그대로 갖고 있다.
“삶을 대할 때 먼지처럼 더욱더 작아지려고 합니다. 먼지는 장벽이 필요 없지요. 벽이 있다고 해도 그 벽을 넘어 더 멀리, 더 많이 봅니다. 피카소가 작품에서 자신의 재주가 드러나지 않도록 왼손으로 붓을 들고 그리기 시작했다는 얘기와 닿아있습니다.”
겸손과 소박함이 몸에 밴 그는 만나는 상대가 누구이건 한결같은 태도로 먼지처럼 작아진 모습으로 상대를 대한다. 이런 그를 만나면 누구라도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강익중의 작품에서는 인간 강익중이 보인다
“캔버스 앞에 무조건 있다고 창의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제가 늘 새벽같이 일어나 몇 시간씩 규칙적으로 작업하니까 성실하다는 평가도 받지만 오래 앉아 있는 것이 성실한 건 아니죠. 끊임없이 자기를 부수는 노력, 남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짜 성실입니다. 작가란 상상력이 커야 하는데 예술가로 자처하며 자기 세계에만 사로잡혀 있는 작가에겐 큰 상상력이 생기지 않기에 … 전 늘 그점을 경계합니다.”
강익중의 그림은 그의 삶만큼이나 정직하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진심이 담겨있다. 그는 예술가로 보이려는 강박감이 없지만, 예술가의 임무에 대해서는 스스로 엄격한 룰을 적용한다. 그러면서 예술가의 범주에 대해서는 무척이나 유연하다.
“세상에 할 게 얼마나 많고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까? 작가는 그런 수많은 일 중 하나일 뿐 숙명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몇 해 전 뉴욕 지역신문에 재미있는 기사가 났어요. 지금이야 자동으로 통행료를 받지만, 당시는 통행료를 직접 내기 때문에 늘 막혔죠. 그런데 톨 부스 중 한 곳이 막히지 않고 술술 빠지더라는 거죠. 알고 보니 그 부스에서 일하는 분이 잔돈을 미리 준비해서 차의 흐름을 막지 않는 슬기로움을 발휘했다는 겁니다. 이처럼 작은 일일지라도 자기 일에 열중하여 창의력을 발휘하여 남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하고 스스로 만족하면 그게 작가의 마인드인 셈이죠.”
그래서 강익중의 작품은 어렵지 않다. 그의 작품은 그림을 감상하는 가장 기본적인 정서에 부응하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준다. 그리고 의미가 명백하다. 그는 자신이 행복해지길 원하고 타인이 행복해지길 원한다. 작가의 바람이 그림에서 보인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숫자와 기호에 불과하고 어린아이와 노인의 서툰 솜씨에 불과하며 그 자체로는 어떤 완결된 의미도 없는 것이지만 한곳에 모이니까 거기에 우주가 있다. 작가의 표현대로 그곳에 삼라만상(森羅萬象)이 있다.
강익중의 명랑학파 그리고 공공미술
“공공미술은 세상을 바꾸는 일종의 ‘문화혁명’입니다. 모든 혁명에는 대의명분(Why)과 주도자(Who), 이를 따르는 대중(People)이 필요하죠.
문화혁명을 이뤄낼 공공미술은 기획단계부터 소통이 가장 중요합니다. 대중과의 소통은 명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의미에서 만일 예술에도 학파가 있다면 제가 속한 학파는 명랑학파일 겁니다.”
그는 2016년 9월에 런던의 대표적인 문화행사 '토털리 템즈(Totally Thames)' 에 초대받아 500명 실향민의 그림으로 완성한 3층 건물 높이의 거대 연등 작품 '집으로 가는 길(Floating Dreams)' 을 템즈강에 띄우며 주목을 받았다.
“처음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자 거절하시던 분들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고향 그림을 그리시더군요. 지금도 어린아이처럼 우시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분들의 소원은 꿈에서라도 고향 땅을 밟아보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공미술은 세계라는 캔버스 위에 ‘희망’이라는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입니다. 희망은 기다림(When)이죠. 설익은 밥을 먹을 수 없듯이 희망의 씨앗을 심고 기다려야 합니다. 저는 이역만리 낯선 강물에 띄워진 우리 어르신들의 간절한 희망이 대서양 태평양을 지나 대동강 두만강까지 전해졌다고 믿습니다.”
선한 사람 강익중, 꿈을 꾸는 사람 강익중
그는 천성이 착하다. 선한 사람이 가진 슬기로움이 눈에 보인다. 그에겐 묘한 언밸런스가 있다. 작은 일상을 이야기하는데 듣다 보면 스케일이 크다. 실용적인 사람이다 싶었는데 상상의 끝이 안 보인다. 강박감이 느껴지지 않는데 아주 집요한 원칙이 있다. 그런 비대칭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하늘을 보고 걷다 보면 휘청거리고 넘어지기 쉽다. 땅과 앞을 보고 걸어야 안전하게 걷는다. 그런데 일상에 매몰되어 바쁘게 살다 보면 하늘 한번 쳐다보고 지나가지 않는 날이 쌓이게 된다. 잘 걷지만, 상상력과 꿈은 포기해야만 한다. 그런데 강익중은 하늘을 보면서도 땅을 딛으며 잘 걷는 뛰어난 능력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다.
아쉬운 인터뷰를 마치면서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했다. 그는 후대에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은 걸까?
“강을 건너는 배는 자국을 남기지 않습니다. 기름이 샐 때만 흔적이 남지요. 인생이라는 배의 노를 열심히 저었으니, 이제는 잡고 있던 노를 내려놓고 강 건너에 배가 닿을 때까지 기다리는 일입니다. 인생의 배를 탄 우리는 노를 열심히 저었으니, 미래는 잡고 있던 노를 내려놓고 강 건너에 배가 닿을 때까지 기다려야지요. 다행히 예술가에게는 목적지가 따로 없습니다. 매 순간을 느끼고 감사하는 것이 목적이고 인연이 닿는 곳이 목적지입니다.”
그는 누구나 아는 바쁜 유명인이다. 하지만 누구나 반갑게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이다. 기꺼이 자신의 작업실을 보여주고, 차이나타운을 함께 걸으며 동네 구경을 시켜줄 사람이다. 여기에 푸짐한 중국 음식으로 한 끼 식사를 나누며 미소와 함께 상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줄 것 같은 기대를 해도 좋을 사람이다. 진정한 인간애(愛)를 가진 선한 사람 강익중. 그는 시종일관 해맑은 미소로, 들려주는 얘기마다 메모장에 적어넣을 만한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기분 좋은 부러움까지 안겨주며 말이다.
기획 Won Young Park / 글 Jennifer Lee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
사진 George Jung, Doyoung Kim, Woongchul 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