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조금 긴 여행을 했었어
글| 사진 박재현
1. 책 소개
소설가의 세계 여행 에세이.
여행이 멀어진 시대에 그의 이야기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2년 동안 여행하며 마주한 세계를 다양한 이야기로 담아냈다. 풍경도 있지만 만남이 더 많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만나 웃고 놀라고 마음 흔들리고 만다. 간결하고 솔직한 문체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당신은 그곳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웃음과 탄성이 따른 채로. 글과 곁들여진 따뜻한 색감의 사진은 여행의 감상을 더 부풀려 준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좋은 필터가 된 듯하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이에게 분명한 대안이 될 것이다.
2. 저자소개
박재현
1987년에 태어났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데 끌리는 편이다. 재미까지 있으면 더 좋고. 소설이나 여행처럼. 농담을 좋아하며, 옛날 음악에 빠져 산다. 좋은 시절은 늘 곁에 있다고 믿는다. 여행을 다녀올 때면 좋은 사람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미구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스토리문학』에서 소설 부문 신인상을 받았고, 장편소설 『당신만 모르는 이야기』, 에세이 『송창식에서 일주일을』을 썼다.
3. 목차
출발 / 워밍업 / 히말라야의 좀비 / 유일한 나라 / 웃는 사람들 / 휴가 / 설마 / 커다란 온실 / 밤은 깊고 달은 밝고 / 오래된 편지 / 상흔 / 한밤의 파스타 /두 번째 사우나 / 세 친구 / 하늘 보는 시간 / 반도의 햇살 / 선물 / 덕분이에요 / 두가지 재회 / 치유하고 치료하고 / 빼앗기고 말았어 정신을 / 혼란과 평안 / 가장 확실한 봄 / 내겐 집이 있었다 / 언젠가는 베를리너 / 축축한 이야기 / 매직 / 0 / 노인의 바다 / 클로즈업 / 시가도 필줄 모르면서 / 하루만 더 / 갈래? / 낯선 동네에서 바다까지 / 크리스마스의 정석 / 항공권을 사는 마음 / 안 될 게 뭐 있어 / 후회 / 도쿄는 밤 / 비밀의 숲 / 온천보다 좋아 /집으로
4. 출판사 서평
2년간의 세계 여행.
간결한 문체와 에피소드 중심의 에세이
따뜻한 색감의 사진
소설가가 쓴 세계 여행 에세이다. 마흔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그가 마주한 세계를 보여 준다. 그는 거리낌이 없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여행한다.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다른 세상 사람들과 만나는 게 아니었을까. 그의 여행엔 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뻔한 이야기가 없다. 다양한 만남이 여러 색으로 책을 빛내고 있다.
때론 느긋하게 때론 활기차게 여행이 이어진다. 그는 능청스럽게 농담을 하다가도, 딱한 사연을 들으면 고개를 숙인다. 인정이 있어 냉대보다 환영을 받는다. 그런 순간마다 여행의 맛이 전해진다. 입에 잘 붙는 그의 문장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막힘이 없다.
다만 글 옆의 사진이 시선을 빼앗곤 한다. 온기 넘치는 사진에 오래 머물 수밖에 없다. 그가 어떻게 사람들을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다. 여행이 더욱 간절해지는 때에 이 책을 펼쳐 보자.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미뤘던 여행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 세계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하자 그가 물었다.
“여행하면서 얼마나 변했어?”
내가 대답했다.
“얼마나 변했는지 잘 모르겠는걸? 그저 매 순간 즐겁게 살고 싶을 뿐이야.”
그러자 그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굿 앤썰.”
나는 얼마나 변할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보고, 걷고,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내 여행의 이유였다. 여행은 목적이 없어도 되는 것 중 가장 근사한 일이 아닐까.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심오한 동기나 목표는 필요하지 않았다. 무얼 해도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웠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던 듯싶다. _ 「클로즈업」 중에서
5. 책 속에서
식사의 메인 요리는 떡갈비와 흡사한 고기였다. 아줌마는 그걸 자꾸만 내 그릇에 놔 주었다. 사람 수대로 하나씩 먹기에도 모자랐는데. 내가 다 먹으면 어느새 접시가 채워져 있었다. 많이 먹었다고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우리네 엄마, 할머니와 똑같았다. 내내 고맙고 따뜻했다. 뭐라 더 설명할 수 있을지. 모든 기운이 가슴께에 서 다 합쳐진 듯했다.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지 않았다. 두 번 봤으니, 세 번, 네 번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고 하는데, 만남이 있으면 또 다른 만남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걸 인연이라 믿었다 _ 「커다란 온실」 중에서
여행지를 선택하는 기준은 모두 다르다. 나는 좀 다른 구석이 있다면 끌리는 편이다. 결국 내 선택은 옳았다. 불가리아는 우리가 흔히 유럽이라며 그리는 화려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신 도심에 흐르는 소박한 공기, 그을린 피부, 무엇보다 너그러운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끔 그곳이 떠오른다. 사실 강렬하진 않다. 잔상이 된 여러 이미지로 어쩌다 다가온다. 그게 싫지 않은데, 그런 기억이 더 오래 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_ 「오래된 편지」 중에서
잘 가던 중에 어두운 골목이 나타났다. 어두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저긴 절대 가면 안 된다라고 확신했다. 나는 굿바이를 외치곤 뒤를 돌려고 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을 비비며 말했다.
“머니!” 나는 팔짝 뛰었다. “무슨 소리야, 너가 공짜라 했잖아!” 그러자 그는 열 살은 더 먹은 듯한 얼굴을 하더니 얼른 내놓으라며 정색했다. 이거 잘못 걸렸구나, 탄식하는 순간 근처에서 한 명이 더 튀어 나왔다. 키가 더 컸던 그는 내 왼쪽 팔을 꼬집으며 말했다. “문제 일으키고 싶어?” 미칠 노릇이었다. _ 「덕분이에요」 중에서
한동안 평화로웠다. 친구와도 사이가 좋았다. 사고는 갑자기 찾아왔다. 우린 케이크와 오렌지를 비닐에 담아 강가 앞 가트에 갔다. 자릴 잡았더니 원숭이가 달려들어 비닐을 가로챘다. 오렌지 여섯 개가 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굴러갔다. 원숭이들은 오렌지를 야무지게 까먹었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나 하며 재수없다 정도로 여기려 했다.
그때 오렌지가 모자랐는지 어미 원숭이가 재빠르게 H에게 달려 왔다. 원숭이는 흉악한 이빨을 드러내며 H의 오른 어깨를 온 힘을 다해 깨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_ 「치유하고 치료하고」 중에서
케이블카에 올라탄 뒤였다. 잘 가다 문득 티켓을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안 났다. 주머니를 뒤적거려도 보이지 않았다. 7달러짜리 티켓인데. 마침 검수원이 다가오고 있었다. 초조했다. 어쩌지. 제발이라고 몇 번이나 외쳤다. 모든 걸 포기하는 순간, 검수원이 날 지나쳐 갔다.
이 계절에 가장 다행스러운 장면이었다. 그러면서 반대로 인도 릭샤 기사에게 사기 당한 기억도 따라 떠올랐다. 또 수하물이 연착된 뉴욕에서 얼마나 좋은 방에 배정 받았는지 생각했다. 행운과 불운의 완전한 대비였다.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됐다. 나쁜 일 만큼 좋은 일이 따라왔다. 마이너스, 플러스 하다 결국엔 0에 수렴했다. 불운하다고 너무 속상할 필요도 없고, 너무 기쁘다고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되었다. _ 「0」 중에서
듣는 거 말곤 할 게 없어 주변을 둘러봤다. 옆 테이블에 눈이 갔다. 쿠바에서 흔치 않은, 혼자 다니는 여자 여행자였다. 작은 배낭과 편한 원피스 차림이 그녀의 여행 스타일을 알려줬다. 그녀는 담배를 멋스럽게 피우고 있었다. 참, 나도 시가가 있었지. 말 걸기 좋은 구실이었다. 용기 내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라이터 좀 써도 될까요? 그녀는 담담하게 수락했다.
나는 시가 껍질을 벗긴 뒤 불을 붙였다.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그녀는, 젓가락질 못하는 외국인을 보는 한국인처럼 웃었다. 시가는 돌려가며 불을 골고루 붙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도 못 붙이면서 라이터는 왜 빌리러 왔냐는 눈으로 또 웃었다.
얄팍한 수작이 들통나 버리고 말았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칠레라고 했다. 혼자서 쿠바를 여행 중이라고. 나도 내 소개를 짧게 했다. 그러면서 여기 앉아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물론이라며 웃곤 의자를 빼 줬다. 내 테이블에서 사과 주스를 가져왔다. 그녀는 내 사과 주스를 보고 또 웃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_ 「시가도 필 줄 모르면서」 중에서
도서명 : 조금 긴 여행을 했었어
저자 : 박재현
출판사 : 미구출판사
출판년월일 : 2021. 8. 20
정가 : 16,500원
쪽수 : 348
형태 : 145mm×215mm
무게 : 584g
ISBN : 979-11-973505-1-1
부가기호 : 03810
에스카사 편집부
[책소개] 조금 긴 여행을 했었어
글| 사진 박재현
1. 책 소개
소설가의 세계 여행 에세이.
여행이 멀어진 시대에 그의 이야기가 더욱 소중하게 다가온다. 2년 동안 여행하며 마주한 세계를 다양한 이야기로 담아냈다. 풍경도 있지만 만남이 더 많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들을 만나 웃고 놀라고 마음 흔들리고 만다. 간결하고 솔직한 문체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당신은 그곳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웃음과 탄성이 따른 채로. 글과 곁들여진 따뜻한 색감의 사진은 여행의 감상을 더 부풀려 준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좋은 필터가 된 듯하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이에게 분명한 대안이 될 것이다.
2. 저자소개
박재현
1987년에 태어났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데 끌리는 편이다. 재미까지 있으면 더 좋고. 소설이나 여행처럼. 농담을 좋아하며, 옛날 음악에 빠져 산다. 좋은 시절은 늘 곁에 있다고 믿는다. 여행을 다녀올 때면 좋은 사람도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미구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다. 『스토리문학』에서 소설 부문 신인상을 받았고, 장편소설 『당신만 모르는 이야기』, 에세이 『송창식에서 일주일을』을 썼다.
3. 목차
출발 / 워밍업 / 히말라야의 좀비 / 유일한 나라 / 웃는 사람들 / 휴가 / 설마 / 커다란 온실 / 밤은 깊고 달은 밝고 / 오래된 편지 / 상흔 / 한밤의 파스타 /두 번째 사우나 / 세 친구 / 하늘 보는 시간 / 반도의 햇살 / 선물 / 덕분이에요 / 두가지 재회 / 치유하고 치료하고 / 빼앗기고 말았어 정신을 / 혼란과 평안 / 가장 확실한 봄 / 내겐 집이 있었다 / 언젠가는 베를리너 / 축축한 이야기 / 매직 / 0 / 노인의 바다 / 클로즈업 / 시가도 필줄 모르면서 / 하루만 더 / 갈래? / 낯선 동네에서 바다까지 / 크리스마스의 정석 / 항공권을 사는 마음 / 안 될 게 뭐 있어 / 후회 / 도쿄는 밤 / 비밀의 숲 / 온천보다 좋아 /집으로
4. 출판사 서평
2년간의 세계 여행.
간결한 문체와 에피소드 중심의 에세이
따뜻한 색감의 사진
소설가가 쓴 세계 여행 에세이다. 마흔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그가 마주한 세계를 보여 준다. 그는 거리낌이 없다.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여행한다. 그가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다른 세상 사람들과 만나는 게 아니었을까. 그의 여행엔 늘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래서인지 뻔한 이야기가 없다. 다양한 만남이 여러 색으로 책을 빛내고 있다.
때론 느긋하게 때론 활기차게 여행이 이어진다. 그는 능청스럽게 농담을 하다가도, 딱한 사연을 들으면 고개를 숙인다. 인정이 있어 냉대보다 환영을 받는다. 그런 순간마다 여행의 맛이 전해진다. 입에 잘 붙는 그의 문장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막힘이 없다.
다만 글 옆의 사진이 시선을 빼앗곤 한다. 온기 넘치는 사진에 오래 머물 수밖에 없다. 그가 어떻게 사람들을 바라보았는지 알 수 있다. 여행이 더욱 간절해지는 때에 이 책을 펼쳐 보자. 책을 읽는 순간만큼은 미뤘던 여행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 세계 여행을 하고 있다고 하자 그가 물었다.
“여행하면서 얼마나 변했어?”
내가 대답했다.
“얼마나 변했는지 잘 모르겠는걸? 그저 매 순간 즐겁게 살고 싶을 뿐이야.”
그러자 그가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굿 앤썰.”
나는 얼마나 변할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보고, 걷고,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그게 내 여행의 이유였다. 여행은 목적이 없어도 되는 것 중 가장 근사한 일이 아닐까. 여행을 시작할 때부터 심오한 동기나 목표는 필요하지 않았다. 무얼 해도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웠던 까닭이 여기에 있었던 듯싶다. _ 「클로즈업」 중에서
5. 책 속에서
식사의 메인 요리는 떡갈비와 흡사한 고기였다. 아줌마는 그걸 자꾸만 내 그릇에 놔 주었다. 사람 수대로 하나씩 먹기에도 모자랐는데. 내가 다 먹으면 어느새 접시가 채워져 있었다. 많이 먹었다고 거절해도 소용없었다. 우리네 엄마, 할머니와 똑같았다. 내내 고맙고 따뜻했다. 뭐라 더 설명할 수 있을지. 모든 기운이 가슴께에 서 다 합쳐진 듯했다.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지 않았다. 두 번 봤으니, 세 번, 네 번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다고 하는데, 만남이 있으면 또 다른 만남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걸 인연이라 믿었다 _ 「커다란 온실」 중에서
여행지를 선택하는 기준은 모두 다르다. 나는 좀 다른 구석이 있다면 끌리는 편이다. 결국 내 선택은 옳았다. 불가리아는 우리가 흔히 유럽이라며 그리는 화려한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신 도심에 흐르는 소박한 공기, 그을린 피부, 무엇보다 너그러운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는 곳이었다. 가끔 그곳이 떠오른다. 사실 강렬하진 않다. 잔상이 된 여러 이미지로 어쩌다 다가온다. 그게 싫지 않은데, 그런 기억이 더 오래 간다고 믿기 때문이다. _ 「오래된 편지」 중에서
잘 가던 중에 어두운 골목이 나타났다. 어두워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저긴 절대 가면 안 된다라고 확신했다. 나는 굿바이를 외치곤 뒤를 돌려고 했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을 비비며 말했다.
“머니!” 나는 팔짝 뛰었다. “무슨 소리야, 너가 공짜라 했잖아!” 그러자 그는 열 살은 더 먹은 듯한 얼굴을 하더니 얼른 내놓으라며 정색했다. 이거 잘못 걸렸구나, 탄식하는 순간 근처에서 한 명이 더 튀어 나왔다. 키가 더 컸던 그는 내 왼쪽 팔을 꼬집으며 말했다. “문제 일으키고 싶어?” 미칠 노릇이었다. _ 「덕분이에요」 중에서
한동안 평화로웠다. 친구와도 사이가 좋았다. 사고는 갑자기 찾아왔다. 우린 케이크와 오렌지를 비닐에 담아 강가 앞 가트에 갔다. 자릴 잡았더니 원숭이가 달려들어 비닐을 가로챘다. 오렌지 여섯 개가 바닥에 떨어져 이리저리 굴러갔다. 원숭이들은 오렌지를 야무지게 까먹었다. 뭐 이런 놈들이 다 있나 하며 재수없다 정도로 여기려 했다.
그때 오렌지가 모자랐는지 어미 원숭이가 재빠르게 H에게 달려 왔다. 원숭이는 흉악한 이빨을 드러내며 H의 오른 어깨를 온 힘을 다해 깨물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_ 「치유하고 치료하고」 중에서
케이블카에 올라탄 뒤였다. 잘 가다 문득 티켓을 어디다 뒀는지 기억이 안 났다. 주머니를 뒤적거려도 보이지 않았다. 7달러짜리 티켓인데. 마침 검수원이 다가오고 있었다. 초조했다. 어쩌지. 제발이라고 몇 번이나 외쳤다. 모든 걸 포기하는 순간, 검수원이 날 지나쳐 갔다.
이 계절에 가장 다행스러운 장면이었다. 그러면서 반대로 인도 릭샤 기사에게 사기 당한 기억도 따라 떠올랐다. 또 수하물이 연착된 뉴욕에서 얼마나 좋은 방에 배정 받았는지 생각했다. 행운과 불운의 완전한 대비였다. 이런 일이 자주 반복됐다. 나쁜 일 만큼 좋은 일이 따라왔다. 마이너스, 플러스 하다 결국엔 0에 수렴했다. 불운하다고 너무 속상할 필요도 없고, 너무 기쁘다고 긴장을 늦춰서도 안 되었다. _ 「0」 중에서
듣는 거 말곤 할 게 없어 주변을 둘러봤다. 옆 테이블에 눈이 갔다. 쿠바에서 흔치 않은, 혼자 다니는 여자 여행자였다. 작은 배낭과 편한 원피스 차림이 그녀의 여행 스타일을 알려줬다. 그녀는 담배를 멋스럽게 피우고 있었다. 참, 나도 시가가 있었지. 말 걸기 좋은 구실이었다. 용기 내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 라이터 좀 써도 될까요? 그녀는 담담하게 수락했다.
나는 시가 껍질을 벗긴 뒤 불을 붙였다. 생각처럼 잘되지 않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그녀는, 젓가락질 못하는 외국인을 보는 한국인처럼 웃었다. 시가는 돌려가며 불을 골고루 붙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불도 못 붙이면서 라이터는 왜 빌리러 왔냐는 눈으로 또 웃었다.
얄팍한 수작이 들통나 버리고 말았다.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다. 칠레라고 했다. 혼자서 쿠바를 여행 중이라고. 나도 내 소개를 짧게 했다. 그러면서 여기 앉아도 되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녀는 물론이라며 웃곤 의자를 빼 줬다. 내 테이블에서 사과 주스를 가져왔다. 그녀는 내 사과 주스를 보고 또 웃었다.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_ 「시가도 필 줄 모르면서」 중에서
도서명 : 조금 긴 여행을 했었어
저자 : 박재현
출판사 : 미구출판사
출판년월일 : 2021. 8. 20
정가 : 16,500원
쪽수 : 348
형태 : 145mm×215mm
무게 : 584g
ISBN : 979-11-973505-1-1
부가기호 : 03810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