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fe I dream of 포디엄(Podium) 위의 작은 거인 이선민교수

The Life I dream of 포디엄(Podium) 위의 작은 거인 이선민교수


8년간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New York Philharmonic Orchestra)를 이끌던 앨런 길버트(Alan Gilbert)가 지난 여름 뉴욕필을 떠났다. 참신하고 모던한 음악적 해석도 좋았지만 일본인 어머니의 영향 탓인지 그의 지휘에 살짝 녹아있는 동양적 감성을 나는 특별히 좋아했다.

몇 해 전 그가 뉴욕필을 떠난다는 소식이 있고 이듬해 후임으로 몇몇 유능한 지휘자들의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 모두가 남성지휘자였다. 이렇듯 포디엄은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의 전유물이다. 여성 지휘자가 바톤(Baton)을 든지 한 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렀지만 세상은 여전히 여성 지휘자들에게 냉랭하다. 그래서일까? ‘단상 위의 작은 거인’ 이라는 닉네임이 썩 잘 어울리는 이선민교수와의 인터뷰가 적잖은 기대를 갖게 해 준다.

리하이대학(Lehigh University) 음악과 Choral Arts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코랄유니언(Choral Union) 합창단과 대학합창단(University Choir) 그리고 돌체여성합창단(Dolce Women’s Choir) 감독과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는 이교수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연구실을 찾았다. 수 인사를 건네는 그녀의 손에서 금세라도 바톤의 솔향기가 날 것 같았다. 갓 뽑아내린 커피를 사이에 두고 벨라 바르톡(Bela Bartok)을 논하며 우리는 서둘러 음악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는 시종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었다. 예술가는 모름지기 고독해야하고, 어딘가 잿빛 기색이 있어야 그답다는 전근대적인 선입견이 가차없이 깨졌다.

“저는 어릴적부터 늘 웃는 아이였어요. 성격도 무척 밝았고요. 또 학교에서든, 교회에서든 무대에 올라가 노래하고 연주하는 것을 참 좋아했어요. 오페라 가수가 되는게 꿈이었거든요. 그런데 저의 아버지께서는 제가 의사가 되기를 바라셔서 제게 음악교육을 따로 시키지 않으셨어요. 그래도 피아노를 치던 언니와 성악을 공부하던 오빠 덕택에 다행히 음악적 소양을 조금씩 키워나갈 수 있었죠.”


아버지의 간곡한 기대에 맞서 끝내 음악을 고집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평생을 교회에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제 삶은 교회와 인연이 깊었어요. 오랫동안 성가대 반주를 했고 절기행사 때는 중창단, 합창단 지휘도 하고 그 외 교회 내 여러 음악활동에 참여했어요. 그러다보니 음악과 신앙, 그리고 제 삶이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때 평생을 교회음악가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장로회 신학대학 교회음악과로 진로를 정하고 거기서 성악을 공부하게 되었죠.”

프리마돈나의 꿈과 교회음악 사역자로써의 열망을 키우며 열심히 노래하고 공부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알 수 없는 음악적 갈증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한국을 떠나보지 않았다면 아마 그 목마름의 이유를 끝내 알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대학 졸업 무렵이었어요. 한국에서 음악 교육에 대한 회의가 들기시작했어요. 이건 비단 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텐데요, 테크닉 중심의 획일화된 교육, 예술가로써 개인의 고유함을 장려하기 보다는 기존의 모형을 답습하도록 강요하는 주입식 교육 이런 것에 대한 회의가 들어서 잠시 음악과 멀어지기도 했었죠.

그러던 어느날, 중학교 때부터 제게 음악적 영감을 주시고 저를 아껴주셨던 음악선생님께서 제가 다니던 대학으로 특강을 오셨어요. 졸업 후에도 자주 편지로 안부를 나눠왔었는데, 특강에서 다시 뵈었을 때 제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폭넓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재차 용기를 주셨어요. 그래서 졸업 무렵 수속을 마치고 그 은사님께서 수학하셨던 헝가리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죠. 당시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제 삶을 완전히 바꿔놓은 현명한 결정이 아니었나 싶어요.”


예술가들은 태생적으로 ‘혼자됨’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고독을 견디는 일이 다른 사람들보다 쉬웠다는 의미는 아닐것이다. 헝가리와 미국에서 대학원과 박사과정까지 이어진 이교수의 긴 학업여정은 그녀가 치룬 인고의 시간에 상응할 만한 결실을 되돌려주었다.

“외로웠죠. 공부도 힘들었고 살아내기도 벅찼어요. 신앙으로 모든것을 견뎠다고 말한다면 마치 제 믿음이 대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는데, 흔히 태풍의 정점에는 오히려 무풍지대가 있다고 하잖아요. 신앙이란 제게 바로 그런 것이었어요. 현실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오히려 담담할 수 있도록 저를 지켜주었죠.

헝가리는 제가 음악적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깨우쳐 준 곳이에요. 잘 아시겠지만, 헝가리는 외부의 침략이 많았던 나라였고 커뮤니즘이 지배했던 곳이어서 당시 국민들 정서가 무척 암울했거든요. 그래서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모든 국민들에게 음악교육을 실시해서 그들의 우울을 일부나마 치유하려고 했죠. 그래서 그런지 국민들의 음악수준이 상당했어요.  탄탄한 음악적 이해를 기반으로 모든 사람들이 음악 자체를 사랑하고 즐기는 그런 나라였어요. 때로는 전공자인 제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였죠. 또 제가 다녔던 졸탄 코다이(Zoltán Kodály)음악원에는 세계 14개국 이상의 학생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다양한 음악의 이해와 깊이를 경험할 수 있었어요.

거기서 음악교육을 전공했는데 담당 교수님의 권유로 지휘공부를 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 웨스트민스터 음악대학 (Westminster Choir College)에 입학했어요. 석사를 마치고 1년 정도 Faculty로 일하다가 이스트만(Eastman School of Music)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고요, 다시 웨스트민스터로 돌아와 교수로 재직하다가 6년 전쯤 리하이대학(Lehigh University) 음악과 부교수로 자리를 옮겼어요.”



리하이대학은 펜실베니아 주 베들레헴 시에 있는 사립대학이다. 경영학과와 공학부가 유명한 곳으로 원래는 남자학교였다가 1971년부터 남녀공학이 된 곳이다. 이교수는 음악대학 부교수로 재직하며 여성합창단 돌체(Dolce)의 감독 겸 지휘 그리고 코랄유니언(Choral Union)과 대학합창단(University Choir)을 이끌고 있다.

“저희 학교가 미국 내 랭킹 30위 권에 드는 명문 사립대학이다 보니 학생들의 학구열이 상당히 높아요. 학업에 지친 학생들이 제가 지도하는 합창 수업을 통해 힐링받고 다시 에너지를 얻는 모습을보면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게 되죠. 지난해에는 리하이대학에 여성입학이 허용된지 45년이 되는 해였고, 여성합창단 돌체의 창립10주년이 되던 해라 특별 콘서트가 있었어요.

‘Rise Up’이라는 타이틀의 이 콘서트에서 제가 commission한 곡은 ‘I Rise: Women in Song’인데요, 미국 여성작곡가가 곡을 쓰고 제가 가사를 골라서 완성한 여성합창단과 메조 솔로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위한 25분 짜리 작품입니다. 5악장의 가사 모두가 미국의 유명 여성작가들의 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개 여성의 strength, beauty, resilience, dream, phenomenal women, rising, love등을 표현하고 있어요. 제가 지휘하고 140명의 여성합창단이 연주했는데 무척감동적인 무대였죠.”

흔히 합창은 인간의 목소리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아름다움이라고들 한다. 이선민교수는 목소리 본연의 순수함과 정직함을 합창음악의 가장 큰 매력으로 꼽았다.

“오케스트라가 서로 다른 악기들의 조합이라고 한다면 합창도 같은 원리라고 할 수 있어요. 사람은 누구나 고유한 목소리를 갖고 있고 그것이 개인이 가진 하나의 악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더욱이 사람의 목소리에는 그 사람만의 삶이 녹아있거든요. 말하자면 개인의 삶이 고유한 음색을 만들고 그 색깔들이 모여 하나의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죠.

제가 하는 일은 그 작품을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 올리도록 돕는 것이고요, 그 예술행위를 통해 관객과의 소통을 이끌어 내는 것이죠. 물론 악기 연주로도 가능하지만, 인간의 목소리에는 세상 어느 악기도 흉내낼 수 없는 순수함과 정직함이 담겨있거든요. 저는 그것이 합창의 묘미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예술이 주는 감동의 수혜자가 관객일거라는 생각들 많이 하시죠?

사실은 지휘를 하는 저와 연주자들이 받는 감동이 훨씬 더 클거에요. 특히 연주를 끝내고 단원 모두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때면 지휘자로써 말할 수 없는 성취감을 얻거든요. 아마 지휘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닐까 싶어요.”



클래식 음악계의 보수성을 생각할 때 마에스트라(Maestra)로 산다는것은 그리 녹록치 않아보인다. 차별의 벽을 넘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노력을 요구하는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여성이 포디엄에 오르면 많은 사람들이 지휘자 이 전에 한 여성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어요. 사회가 바뀌고 있지만 아직도 여러 분야에서 또 여러 종류의 차별들이 여전히 존재하잖아요. 여성이라 차별받고, 동양인이라 차별받고. 사실 그러한 차별의 시선을 견디는 일이 쉽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그런 문제에 마음이 묶이면 그나마 내가 가진 작은 능력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되더라고요. 그들의 비틀린 시선이나, 그로 인해 내가 받은 상처를 정말로 중요한 일 뒤로 물리는 훈련을 자주 했어요. 일의 우선 순위를 생각하고 당장 눈앞에 주어진 일에 집중하면서 최선을 다했어요.

만일 내가 그들의 성차별을 의식해서 남성 지휘자를 흉내냈다면, 혹은 어느 훌륭한 백인 지휘자 처럼 되려고 그를 모방했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못했을 거에요. 나의 개성과 색깔은 현재 내가 가진 조건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면 나의 결함이, 혹은 그들이 결함이라고 보는 부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고 말할 수도 있겠죠.”


이스트만 박사 과정 중에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룬 그녀는 남편의 이야기가 실린 로컬신문 하나를 보여주었다. ‘Right Brain, Left Brain, Math and Music for teacher at the Hun School’이라는 제목의 그 기사는 음악과 수학을 동시에 가르치는 그녀의 남편 Ryan Brown씨의 교사로써의 활약상을 유쾌하게 보도하고 있었다.

“남편은 원래 수학을 전공했는데, 나중에 음악을 공부해서 이스트만과 인디애나 주립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어요. 현재는 프린스턴 소재의 사립고등학교(Hun School)에서 수학과 음악을 동시에 가르치고 있고요. 항상 긍정적이고 성실한 그를 보고있으면 내가 얼마나 복받은 사람인가를 깨닫게되죠. 오랜 유학생활에 지쳐있을 때 그 사람을 만났는데 마치 제게 단비같은 존재였어요. 그러다 결혼을 하고 각자의 학업과 일로 서로에게 조금씩 소원해질 무렵 딸을 얻었어요. 그땐 그 아이가 우리 둘모두에게 단비같은 존재였죠. 그래서 아이이름을 단비라고 지어주었어요.

이제 초등학교 일학년인데 요즘 피아노 공부에 아주 열심이에요. 단비와 함께 있으면 무언가 내 삶이 충일해지는 느낌이 들어요. 우리 부부에게 그랬던 것 처럼 이 다음에 사회에 나가서도 누구에게나 단비같은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바쁜 일과 속에서도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산책과 독서를 잊지 않는다.

“대부분의 시간은 강의를 하고 강의가 없는 시간에는 연주 준비를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자료 수집과 공부를 해요. 또 여건이 허락되는대로 아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고요. 그리고 제가 출석하는 뉴저지 찬양교회에서 스페셜 뮤직디렉터로 사역하기 때문에 교회일도 병행하고 있어요.  주로 주일 예배와 절기에 맞게 음악을 선곡하고 특별찬양을 기획하고 또 다양한 음악행사들을 디자인하는데요,학생들을 가르치는 일과 더불어 교회음악사역자로 쓰임 받을 수 있어서 기쁘게 일하고 있어요. 매일매일 바쁘죠. 그래도 틈틈이 산책도 하고 책도 읽고 그렇게 시간을 관리하고 있어요.”

12월은 콘서트 시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휘자로 무대에 오르는 그녀 역시 크리스마스 음악회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매년 12월이 되면 Christmas Vespers 라는 학교행사가 있어요. 저희 학교 합창단의 크리스마스 콘서트 인데요, 옌례행사이자 무료콘서트라 모두들 와서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연습하고 있고요, 또 교회에서도 성탄음악회가 있어서 특별음악회를 준비하고 있어요. 종교를 떠나 서로가 서로를 돌아보는 연말이잖아요. 이런 음악회를 통해서라도 함께 기쁨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긴 시간 그녀의 삶과 음악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 갈무리를 부탁하자 지난 시간을 되짚어 볼 수 있도록 기회를 준 에스카사에 고마움을 먼저 전했다.

“고맙고 감사해요. 특별할 것도 없는 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고 뒤돌아 볼 수 있어서 무척 의미있는 시간이었어요.정리해놓고 보니 어린시절 부터 지금까지 음악 하나에 붙들린 삶을 살았어요. 이렇게 음악에만 정진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이 저를 도와주셨어요.

장신대 박창훈교수님을 비롯해서 헝가리 코다이 음악원에서의 Peter Erdei, 웨스트민스터의 Joseph Flummerfelt, 그리고 이스트만의 William Weinert교수님까지. 그 분들은 저의 재능을 알아봐주시고 늘 격려하고 지지해 주셨어요.이제는 저도 누군가에게 그런 스승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그리고 기회가 닿는 대로 더 많은 사람들과 음악을 나누며 살고 싶어요. 그게 저의 바램이에요.”

‘예술가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일은 새로 발견된 고분의 문을 따는 고고학자의 마음처럼 흥분되는 일이다.’ 진중권씨의 말은 옳았다. 유년의 꿈은 어떻게 삶이 되고 그 삶이 또 어떻게 예술이 되었는지 그녀의 내면에 담긴 이야기를 캐내느라 저녁 해가 다 저물도록 나는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음악과 함께 살아왔고 음악을 통해 누군가를 더 많이 사랑하기를 원하는 이선민교수. 그녀가 마에스트로 포디엄(Maestro Podium)의 유리천정을 깨고 더 높이 비상하기를 기대하며 연구실을 나선다.


글 Young Choi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