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동문회 초청 음악회를 준비하는 소프라노 강미자

참척(慘慽)의 슬픔을 음악으로 달래며

“딸이 떠난 빈 자리를 노래로 채웁니다”


서울대 동문회 초청 음악회를 준비하는

소프라노 강미자


엄마와 매일 전화로 긴 시간 수다를 떨며 ‘이젠 나도 아이를 낳고 싶다’고 조잘대던 딸이 다음 날, ‘숨이 멈췄다’는 전화 통보를 끝으로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고 어이없는, 허망한 어미의 심정을 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 세상 그 어떤 말로도 자식을 먼저 보낸 슬픔을 표현할 수 없다. 소프라노 강미자 씨는 딸을 잃은 참척(慘慽)의 슬픔을 자신의 음악으로 달랬다고 했다. 지금도 그녀는 딸이 보고 싶을 때마다 노래를 부른다.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를 부르면 딸이 곁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슬픔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세상에 그녀와 같은 아픔을 겪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을 위로하고 슬픔을 나누고 싶었다. 딸이 살아 숨 쉬던 공간, 한국으로 날아가 예술의 전당 무대에 섰다. 가슴 한편이 조금 편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딸을 보고픈 그리움은 더 깊어갔다. 유품이라도 있으면 허전함이 덜 하련만 딸은 엄마가 사준 옷 몇 가지와 일기처럼 적은 글 외에 세상에 남긴 물건이 없었다. 

결국 그 메모 글을 모아 책을 냈다. 딸의 이름을 넣은 ‘양주희 에세이’는 첫 장만 넘겨도 “이 새벽 다 읽고 울고 또 울었다.”는 딸의 방송 선배 박찬숙 씨의 표현대로 강미자 씨의 애통한 심정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그리운 딸은 이제 책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기자가 책 얘기를 꺼내자 그녀의 말이 길어진다. 마치 딸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의 감정을 일시에 털어내기라도 하듯이 지난 얘기를 끝도 없이 들려주었다.



뛰어난 노래실력으로 명문여중에 입학하다


대한민국 최고의 소프라노 가수로 이름을 떨치던 강미자는 평양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7살이었던 그녀는 1.4 후퇴 때 부모님을 따라 피난 열차 지붕 위에 올라탄 채 남쪽으로 피난을 왔다. “잠시만 머무르다가 다시 평양으로 돌아올 것”을 기대했지만, 강원도 영월의 상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후 25세에 결혼할 때까지 강미자의 삶을 규정하는 단어가 있다면 ‘가난’이다. 피난 전엔 대지주의 딸로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대부분 피난민 생활이 그러했듯이 학창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지독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한국사회 극빈층 자녀의 성공처럼 그녀도 오직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어려움을 극복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표현대로 강미자도 영민함 하나로 부모의 재정적 지원 한 푼 없이 강원도 산골을 벗어났다.

“저는 뭐든지 잘하는 똘똘한 아이였어요. 공부도 노래도 잘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학교에서 일등상은 늘 제 몫이었죠.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제가 가질 기회는 한정적이었어요. 언니가 진학한 강원도 상동 중학교에 갈 수밖엔 없었어요. 그때 담임 선생님이 너는 정말 그냥 여기 있긴 아까운 학생이라며 자신의 돈으로 옷이며 차비까지 마련해서 이화여중을 보내주더군요. 당시에 혼자서 트럭을 타고 기차를 갈아타고 혼자서 서울에 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이화여중 입학시험 때 노래를 불렀다. 이화여중은 당시 KBS 어린이 합창단을 비롯한 어려서부터 음악 실기를 익힌 부잣집 자녀가 많이 입학하는 학교였다. 그는 노래로 심사위원들을 사로잡았다. 당시 이화여중 음악 교사는 내로라하는 한국 클래식의 거물들이었다. 특히 임원식 전 국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는 “어린아이가 저렇게 혼이 담긴 노래를 부르는 것이 놀랍다”며 칭찬했다. 이처럼 어린 강미자의 재능을 간파한 교사들과 선교사의 도움으로 목회자 자녀들을 위해 설립된 기숙사에서 숙식을 해결하게 되었다. 이후 음악인으로서 엘리트 코스인 서울예고와 서울음대 성악과까지 마치게 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졸업 후 성악가의 길을 접고 바로 결혼해버린다. 이유는 역시 경제적인 사정이었다.


▲‘아다지오 칸타빌레’ 배토벤 ‘비창’ 소나타 제2악장 강미자 소프라노, 강우성 Piano 예술의 전당 2017. 6. 6


가난을 벗어나고자 결혼한 강미자

“졸업하고 곧바로 음악 교사로 취직을 했어요. 성악가를 꿈꿨지만, 돈을 벌어 집안을 돕지 않으면 안 될 환경이었으니까요. 대학 4년 동안에도 남자와 데이트 한번 해본 적이 없어요. 너무 가난해서요. 연애 같은 낭만을 누리는 건 사치였지요. 그러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했어요. 당시 외제 차를 몰고 다니며 비누 제조업을 하던 성공한 청년 실업가였는데 맘에 들진 않았어요. 그래도 이 사람과 결혼하면 ‘나와 가족들이 곤궁에서 벗어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농담이 아니고 심청이의 심정으로 결혼을 한 거죠.”

결혼 후, 아이 둘을 낳아 키우며 30대 후반이 될 때까지 가정주부로만 살았다.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사랑 없는 결혼일 뿐 아니라 남편의 주사가 상상을 초월했다. 다행히 술에 취해도 아내를 때리는 가정 폭력범은 아니었다. 오히려 숫기가 없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저 매일 술을 마시고 취해서 살았다. 젊은 나이에 돈을 벌었고 사업 때문에 술자리가 많았던게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진 것이다. 결국 남편은 술로 인한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결혼으로 음악도 포기했건만, 남편과 가정불화를 겪으며 살자니 강미자는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자살을 생각한 적도 있었다. 생활은 안정적이고 여유가 있게 되었지만, “내가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절망감이 때때로 엄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집 안 청소를 하다가 갑자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카탈라니의 오페라 ‘라 왈리’에 나오는 아리아 ‘나 멀리 떠나가리’를 듣게 되었다. 강미자는 음악을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도저히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절박함에서 38살의 나이에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성악 레슨을 받기 시작했고 작은 독창회도 하게 되었다.



스타 성악가로 우뚝 선 강미자

일생의 중요한 고비마다 노력과 용기를 잃지 않자, 운도 따라줬다. 당시 저명한 지휘자 겸 작곡가였던 장일남 교수가 우연히 강미자 독창회의 포스터를 보고 공연장을 찾아왔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부유한 집 딸의 독창회”라고 생각한 장일남 교수는 강미자의 노래를 듣고 반했다. 공연 다음 날 강미자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 TV에 출연하라는 제의였다.


처음엔 장난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MBC가 준비한 3.1절 특집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해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강미자는 각 방송사가 출연 요청을 하는 스타 성악가로 갑자기 떠올랐다. 영화 같은 벼락 성공담이다. 소프라노 강미자는 가곡이 사랑받는 대중문화 환경이 만들어 낸 스타이기도 하다. 80년대만 해도 TV에서 성악가들이 귀에 익은 서양과 한국의 가곡들을 부르는 프로그램이 성인 시청자들의 큰 인기를 받았다. 대중의 귀를 사로잡는 목소리와 미모를 겸비한 강미자에게 방송 관계자들의 러브콜이 쏟아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결과였다.


유학을 떠난 강미자, 일생 3대 은인을 만나다

유명 성악가로 인기를 얻었지만, 채워지지 않은 갈증이 있었다. 서울 음대 졸업 후, 10년의 공백이 주는 부족함이 느껴졌다. 많은 음악인이 거쳤던 선진 음악 학교에서의 유학 경험이 부러웠다. 그래서 40대의 나이에 유학을 결심한다. 처음부터 장기간의 해외 체류를 결심했던 것은 아니다. 아주 잠시라도 외국의 학교에서 젊은 음악인들이 어떻게 교육 받는 지 함께 체험하고 싶은 바람 정도였다.


뉴저지의 음악대학에서 한 달 정도 공부할 생각으로 미국에 왔다. 강미자의 운은 그곳에서도 찾아왔다. 탱글우드 음악제에서 만난, 그가 일생의 3대 은인 중 한 명으로 꼽는 줄리어드 음대 오렌 브라운 교수에게 발탁되어 그녀의 수제자가 된 것이다. 오렌 브라운 교수가 펴낸 성악교습서에는 주디스 블레겐 등과 함께 강미자를 이렇게 소개해놓았다. “나는 그를 제자이며 한 예술가로 10년 이상을 알고 있다. 그의 음성은 열정과 개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관중과 교감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언어와 음악으로 감정의 깊이를 표현하는 데 있어 비유할 수 있는 성악가는 극히 드물다. 재능과 지혜를 겸비한 흔치 않은 성악가이다.”

음악인으로의 성공과 비교하면 그의 가정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현재의 남편인 이채진 클레어몬트 매케나 대학 정치학 교수는 그녀 나이 63세에 만난 인연이다. 선비 스타일에 젠틀한 교육자인 이채진 교수는 강미자의 존경을 받을만한 인품과 학식을 지녔다. 그녀는 여생을 그와 함께 보내기로 하고 미국으로 오게 된다.



딸을 잃은 슬픔을 노래로 견디다

미국 생활은 평온했다. 늘 연구와 강의 준비를 하는 품위 있는 남편과 안정된 생활, 사시사철 쾌적한 미국 서부의 기후는 만족할 환경을 제공했다. 하지만 친구와 지인이 없고 변화가 없는 생활은 다소 지루했다. 게다가 강미자는 운전하지 않아 생활 공간의 제약이 컸다. 가끔 한국이 그리웠고 평생 친구처럼 지내는 딸과의 통화가 큰 낙이었다. 그러다가 그의 일생에 가장 큰 비극이며 아직도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일이 발생했다. 


가장 소중한 그의 딸이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매일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통곡을 하다가 혼절을 했다. 남편도 그런 모습을 보며 함께 힘들어했다. 교회에 다녀보기도 했다. 기도와 사람들의 위로를 받았지만, 안정을 찾을 수 없었다. 강미자의 고통을 덜어준 것은 결국 음악이었다. 지난해 6월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7년 만에 독창회를 했고 딸을 잃은 참척(慘慽)의 아픔을 노래로 표현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딸을 잃은 아픔은 너무도 쓰라린 그리움으로 남아있습니다. 모두 이젠 그만, 딸을 놓아주라고 말하지만, 너무도 보고 싶은 마음에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아 노래로 울부짖고 있는 내 모습을 봅니다. 노래는 기도이며 나의 전부이기에 내가 딸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노래뿐입니다.”


딸을 그리며 부르는 노래 & 남편 이채진 교수

2010년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의 무대는 특별했다. 미국에서 공부와 공연 활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와 경남대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할 때 맺은 팬들이 몰려왔다. ‘미사모(소프라노 강미자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팬클럽에는 100여 명의 각계각층의 유명인들이 있다. 영화감독 이장호, 방송인 김세원, 황인용, 변호사 안동일, 화가 이두식 등이 그들이다. 또 70년대 최고의 가수 이장희의 친구인, 친동생 기타리스트 강근식도 출연했다. 이제 강미자는 인생의 황혼기인 70대 중반에 접어들었다. 가장 사랑하던 가족을 잃고 외국에서 여생을 보내는 강미자에게 지금 인생의 의미와 목표는 무엇일까? 그녀는 우선 평생 학자인 남편의 내조자로서 해야 할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남편이 강의가 있으면 함께 갑니다. 청중 속에 섞여 강의를 들으면 ‘이 사람이 정말로 머릿속에 귀한 지식이 많은 학자’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80세가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하루 5시간씩 연구에 매달리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이지만 존경심이 듭니다. 아내로서 이 사람이 오랫동안 더 활동할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이 보람 있는 일이란 생각이 들어요.”


▲친동생인 기타리스트 강근식과 함께 2017. 6. 7 예술의 전당


딸 10주기를 추모하며 내년 6월 카네기홀 무대를 준비하다

지금과 같은 한류 문화가 없던 시절, 소프라노 강미자는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낸 적이 있다. 88올림픽을 기념한 뉴욕 센트럴파크 백남준 비디오 쇼에서 노래했는데 그 모습은 세계 5개국에서 동시에 위성 중계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저명 음악평론가 팀 페이지(Tim Page)는 뉴욕 머킨홀의 강미자 독창회를 보고 <뉴욕타임즈>에 “밝고 매력 있는 목소리와 놀라운 재능, 우아한 무대매너, 뛰어난 발음과 드라마틱한 감성으로 청중들을 감동하게 했다”고 썼다. 강미자의 나이는 올해 74세이다. 딸이 그리울 때마다 노래 부르던 그녀는 이제 슬픔을 딛고 소프라노 강미자로 다시 돌아오려고 한다.

아직도 그녀가 들려주는 노래를 기다리는 팬이 많기 때문이다. 올해열린 미주 서울대 동문 모임에 참석하자, 뉴욕 동문이 카네기홀 콘서트를 제안했다. 오늘의 소프라노 강미자를 있게 해준 카네기홀은 그녀에겐 특별한 무대이다. 내년 6월, 다시 그 무대에 서는 날을 위해 그녀는 마치 장거리 시합을 앞둔 선수처럼 매일 연습을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 누구보다도 재능있고 똑똑했던 딸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양주희의 어머니, 소프라노 강미자 씨는 이제 눈물 대신 자신의 소리를 닦고 있다. 이제 그녀는 가슴에 사무치는 그리움을 뒤로하고 단거리 선수의 질주처럼 최선을 다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무대 위에서 쏟아낼 것이다. 75세에 다시 무대에 서는 그녀가 들려줄 노래는 과연 어떠할지 그날이 무척 기대된다.

profile

강미자 Mi-ja Kang, soprano
이화여중, 서울예고, 서울음대 졸업
1980 Oren Brown(Juilliard 교수) 과 Tony Hartman Management 초청으로 도미
Juilliard음대 및 전문연주과정 졸업(재학시 오페라 ‘라보엠’에서 미미 역 출연)
독창회
뉴욕: Carnegie Recital Hall, Merkin Concert Hal, Lincoln Center Alice Tully Hall
베를린: KonzertHaus
워싱톤D.C.,: Providence, New Orleans,
캐나다: Vancouver, Ottawa
LA: Zipper Hall
서울: 예술의전당 Concert Hall, 호암아트홀, LG아트센터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
울산: KBS홀, 마산 MBC홀 등에서 30여회
오케스트라 협연
펜실바니아 Scranton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오케스트라
모스코바, 헝가리Budapest, Savaria오케스트라
체코Budweiser오케스트라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
런던심포니오케스트라(지휘 Colin Davis)와 CD 녹음
독일 라이프치히게반트하우스오케스트라(지휘 Martin Fischer-Dieskau) 와 CD 녹음
오페라 출연
뉴저지 “Opera at Flohram”(오페라단)에서 ‘Turandot’ Liu역
88 올림픽기념오페라 초청공연(국제오페라단) ‘라보엠’에서 미미 역
LA 88올림픽기념음악회초청연주(Music Center)
88 올림픽축제 1월 1일뉴욕 Central Park에서 백남준과 함께 TV 출연
국내 TV, 가곡의 밤, 해외순회공연 최다 출연
수상: American Opera Audition 최종입상(1986), 한국방송대상수상(1992) 성악부분
음반: 강미자 애창곡 독집 제1집~제4집, 강미자 성가곡집, 강미자 명곡 선집
경력: 서울예고 강사, 뉴욕신학대학 종교음악과 강사, 경남대 교수, UCLA 방문 교수


소프라노 강미자의 딸 양주희 에세이 中에서
휴가


글쓴이 양주희(1968-2009)
소프라노 강미자 씨의 외동딸로 서울에서 태어나 뉴욕 Susan Wagner High School 졸업, 뉴욕Parsons 대학 재학 중에 귀국, 고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동대학원 국제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다시 유학을 와서 New York University 행정대학원을 졸업한 뒤, 고대 국제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이수하고
KBS 외신 뉴스캐스터로 일하다가 41세에 세상을 떠났다.



개 데리고 있는 집은 이 심정 알 것이다. 애 데리고는 힘들어 그렇지 어디든 갈 수 있다. 개 데리고는 어디도 못 간다. 덕보는 여름에 휴가는 죽어도 꼭 가야 했다. 돈이 없어 ‘여관’보다 ‘여인숙’에 가까운 숙박시설에 묵으면서도 휴가는 꼭 가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10년 넘게 늘 8월이 마지막 주에 휴가를 갔다. 돌돌이를 엄마에게 맡길 수밖에 없는데, 엄마는 방학 때마다 바빴고 개강을 앞둔 8월의 마지막 주에야 서울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올해도 우리는 휴가를 8월의 마지막 주로 미뤘다. 엄마가 그때야 돌아오시니까. 그리고 돌돌이를 2박 3일만 맡아달라고 했다. 우리는 휴가를 어디 멀리 오래가지도 못한다. 그토록 돌돌이에게 얼고 떠는 엄만데, 그런데 돌돌이와 같이 살 수 있는 시한은 2박 3일이 맥시멈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돌돌이가 예뻐 어쩔 줄 모르고, 돌돌이 역시 엄마만 있으면 백만 대군을 얻은 것 마냥 온갖 버르장머리 없는 어리광을 부렸다. 그런데도 둘은 같이 살지는 못한다. 사실 엄마는, 혼자서는 돌돌이를 ‘길러’ 본 적이 없다. 예뻐만 했을 뿐, 돌돌이도 그걸 안다. 그래서 엄마 집에서 왕자로 사느니, 구박받으면서 우리 집에 서서 사는 걸 속 편하게 여긴다. 돌돌이는 엄마 집에만 가면 그렇게 우리 집으로 달려온다. 흔한 속설로 개와 고양이를 예로 드는데, 고양이는 ‘터’를 중시 여겨, 주인이 누구인 것은 상관 않고그’집’에만 정을 붙인다고 한다. 그리고 개는 고양이와 반대라는 것이다.


나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개에게 제일 중요한건 사랑하는 주인일 테지만, 개이게도 ‘터’라는 것, 자기 집이라는 건 단순히 편안함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올여름엔 휴가를 앞두고 걱정이 태산이다. 돌돌이를 이제, ‘돌 시각장애 건’이라고 불러야 하나? ‘돌 봉사’라고 불러야 하나. 눈도 안 보이고 계단도 못 오르내리는 놈을 엄마 집에 맡길 생각을 하니 휴가 갈 일이 아득하다. 아마 돌돌이 저지레에 엄마의 참을성이 더더욱 사라져, 2박 3일도 못 채우고 와야 할지도 모르겠다. 덕보만 아니라면 속 편하게 차라리 안 가고 싶다.



여관도 아닌 여인숙 수준의 숙박시설에 묵던 우리의 여름휴가는 해마다 발전했다. 돈을 모으지 못해 그렇지 우리도 벌만큼 벌었다. 최근 몇 년간은 제주도에서 반드시 신라호텔에서만 묵었다. 그건 우리의 첫 제주도 여행에서 품은 포한 때문이었다. 서귀포의 장급 여관+콘도에서 밥해 먹던 우리는 버스를 타고 중문 해수욕장에서 놀다가 신라호텔 투숙객들만 다니는 호텔로 곧장 향하는 길을 걸었다. 신라호텔 투숙객들은 거기서 민물로 발을 씻고 곧장 호텔로 들어갔다. 따락보니 별천지였고, 돈이 아까워 로비에서 커피도 한 잔 못 사 마신 우리는 돈벌면 반드시 제주신라호텔에 묵을 것을 다짐했었다.


그 정도 꿈은 이루어졌다. 그리고 과연, 특급호텔은 대리석 욕조에 샤워 부스에 수건도 두텁고 톡톡한 것이 대한민국이 OECD에 가입할 만한 선진국가라는 착각을 심게 했다. 그런데도 덕보와 나는, 돌아오면 역시 우리 집이 ‘최고’라는 생각부터 했다. 쓴 돈이 아까워서라도 그런 생각을 안 하려고 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2박 3일 동안 돌돌이 산책시키고 돌돌이 얼고 떠느라 지친 엄마가 돌돌이를 데려다주면서, 너하고 살 때 까칠하고 털도 엉망이던 애가 저렇게 윤기가 흐르고 잘 생겼다는 엄마의 자찬을 한참 들은 뒤 다시 우리 세 식구가 오롯하게 남고 돌돌인 집안 구석구석이 안녕했는지 닫힌 문은 없는지, 방마다 다니며….


우리 셋 모두 ‘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폭삭 집안에 안기는 일 그게 매년 여름휴가의 하이라이트였다. 어쩌면 휴가라는 건 내 집 고마운 줄 알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는 그 느낌이 더 각별할것 같다. (2005.08.15)


진행 Won Young Park 글 Jennifer Lee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