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파(小波) 방정환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방정환 선생은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어린이》를 창간하여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쓰고 1923년 색동회와 같이 어린이날을 만들었다. ‘어린이’는 사전적 의미로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있다. 1921년, 소파 방정환 선생은 아동을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켰다.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방정환 선생님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소파 방정환.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호는 알아도 그 뜻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소파(小波)는 작을 소 小, 물결파 波 즉, 잔물결을 뜻한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부인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
“부인, 내가 왜 호가 ‘소파’인지 아시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훗날에 큰 물결 대파가 되어 출렁일 테니 부인은 오래오래 살아서 그 물결을 꼭 지켜봐 주시오.”
방정환 선생님은 1899년 태어났다. 호는 소파(小波)이며, 언론인, 문학가, 교육자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독립운동가 권병덕의 소개로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어 공부를 계속 하었다. 보성전문학교에서 공부하던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했고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후 석방된 방정환은 도요대학 철학과에서 ‘아동예술학’, ‘아동심리학’등을 연구했다.
1922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 아동을 위한 최초의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1931년 7월 23일 치열하게 살던 방정환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재정적인 문제 등 극심한 스트레스로 쓰러지게 되고 1931년 7월 23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글 에스카사 편집부
소파(小波) 방정환
5월 5일은 어린이날이다. 방정환 선생은 한국 최초의 순수아동잡지인 월간《어린이》를 창간하여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쓰고 1923년 색동회와 같이 어린이날을 만들었다. ‘어린이’는 사전적 의미로 “어린아이를 대접하거나 격식을 갖추어 이르는 말”이라고 적혀있다. 1921년, 소파 방정환 선생은 아동을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하게 격상시켰다.
어린이의 인격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방정환 선생님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소파 방정환.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호는 알아도 그 뜻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소파(小波)는 작을 소 小, 물결파 波 즉, 잔물결을 뜻한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부인에게 이러한 말을 남겼다.
“부인, 내가 왜 호가 ‘소파’인지 아시오? 나는 여태 어린이들 가슴에 잔물결을 일으키는 일을 했소. 이 물결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오, 훗날에 큰 물결 대파가 되어 출렁일 테니 부인은 오래오래 살아서 그 물결을 꼭 지켜봐 주시오.”
방정환 선생님은 1899년 태어났다. 호는 소파(小波)이며, 언론인, 문학가, 교육자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독립운동가 권병덕의 소개로 1917년 천도교 3대 교주인 손병희의 사위가 되어 공부를 계속 하었다. 보성전문학교에서 공부하던 그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을 배포했고 이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후 석방된 방정환은 도요대학 철학과에서 ‘아동예술학’, ‘아동심리학’등을 연구했다.
1922년 5월 1일 ‘어린이의 날’을 제정하고, 1923년 3월 아동을 위한 최초의 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1931년 7월 23일 치열하게 살던 방정환은 일제의 혹독한 탄압과 재정적인 문제 등 극심한 스트레스로 쓰러지게 되고 1931년 7월 23일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글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