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폭과 도구의 틀에서 벗어나 3차원의 그림을 그리는 ‘공간 드로잉’ 작가 곽선경

스튜디오 탐방 시리즈 세번 째 이야기


“작품이 완성 되는 모든 곳이 저의 작업실입니다.”

화폭과 도구의 틀에서 벗어나 3차원의 그림을 그리는 ‘공간 드로잉’ 작가 곽선경



곽선경 작가에게 인터뷰 요청을하면서 연재의 제목이 ‘스튜디오 탐방’이라고 소개하자 작가는 “그럼 어디서 만나면 좋을까요?”라고 잠시 망설였다. 스튜디오를 찾아 대화를 나누는 기사니까 당연히 스튜디오가 가장 적당하지만 그녀의 망설임엔 이유가 있었다. 사실 곽 작가에겐 이스트 할렘에 오래전부터 작업해 온 공간이 있다. 하지만 대형 설치 작품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작가의 경우, 작품이 실제로 만들어지고 완성되는 공간은 작업실이 아닌 ‘전시 현장’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뉴욕시의 지원으로 시작되어 현재 완성 단계에 있는 대형 공공 예술 작품 현장도 적당할 터였다.

결국, 최종 디테일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현장의 사정상 그리고 대화의 편의를 위해 작가와의 만남은 어퍼이스트의 ‘워터폴(Waterfall)맨션 & 갤러리’에서 이루어졌다. 오랜된 워크업 건물을 리모델링해 럭셔리 타운하우스로 바꿔 화제가 되었던 빌딩이다. 인터뷰가 진행된 4층의 룸 벽면 하나는 작가의 초기 작품들도 장식되어 있었다. 뮤지엄 벽면에 천지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듯한 힘찬 대작만 봤던 기자에게 작은 프레임에 ‘얌전히 갇혀 있는’ 작가의 초기 작품들이 신선했다.

곽선경 작가는 1993년 뉴욕대에서 공부를 시작한 이래 25년간 뉴욕에서 활동했다. 4반세기란 시간 자체도 짧지 않지만, 뉴욕과 한국의 주요 뮤지엄은 물론 세계 각국을 무대로, 어떤 재외 작가보다 왕성한 전시 활동을 해왔던 그의 주요 이력만 간단하게 정리하더라도 허락된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그래서 이번 탐방에서는 최근 완성이 된 퀸즈 코로 나의 공립학교 (PS 298) 가 배경이 된 대형 공공 예술 프로젝트(작품명 : Kairos. 9피트 8인치 X157.1 피트) 에 대해 초점을 맞췄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를 소개해주세요. 꽤 오래 걸린 작업이라면서요?
작업 자체가 오래 걸린 건 아니고 시행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뉴욕시 교육국이 지원하는 ‘공립학교를 위한 공공 예술 Public Art for Public School’ 이란 프로그램이 있어요. 그 프로그램이 퀸즈 코로나에 새로운 학교를 지으면서 학교 외관을 장식할 작품을 경쟁 응모를 시켰는데 제 작품이 당선이 된 거죠. 그런데 사실 그게 2011년이에요. 무려 7년 전이죠. 곧 시작될 줄 알았던 공사는 건설과 부동산에 얽힌 각종 문제 때문에 지지부진하다가 3년 전에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올해 가을 학기 개교를 하면서 완성이 된 셈이죠.



그런 외적인 조건 외에 작품 제작에 관한 어려움도 있었나요?
한 가지 더 문제가 있었는데 제가 처음에 제시한 작품의 재료를 변경해야 한다는 학교 측의 요구였어요. 원래 제 아이디어는 엠보싱 재질이었는데 1층 외관에 그런 재료를 이용하면 조그만 낙서나 손상에도 수리에 애로사항이 많다는 이유였죠. 사실 그건 관리를 담당하는 학교측의 우려가 합당했어요. 그래서 결국 낙서나 손상 등에도 수리가 편한 타일로 재료를 변경했어요. 아무 재료나 사용하기는 싫었고 최상의 재료를 얻기 위해 이태리에서 제조된 타일 3,600장을 들여왔습니다.



타일 수천 장이 들어가는데 갤러리나 뮤지엄과 달리 작품 진행에 작가의 한계가 있을 듯 한대요?
맞아요. 타일에 색 작업을 하는 기술자가 따로 있고 타일을 붙이는 인부가 따로 있죠. 저는 디자인만 할 뿐 실제 제작 단계에서는 내 손을 떠나게 되죠. 내 손끝으로 완벽하게 디테일 처리를 할 수 없는 것이 이런 프로젝트의 단점이에요. 100% 예술 작품이 아니고 건축과 시공이 섞인 개념이라서 작가로서 양보해야 하는 부분도 있어서…. 제가 공공 예술을 자주 하지 않는 이유기도 합니다.

제한과 어려움이 있는 공공 예술 분야에 어쨋든 손을 대기 시작한 계기가 한국의 삼성 빌딩 작업이었죠?
네. 2007년이었죠. 광주 비엔날레 전시 후에 의뢰가 들어왔어요. 삼성그룹이 시내에서 서초동으로 사옥을 이전하고 삼성 타운을 만들던 시기인데 삼성생명 빌딩 로비를 장식할 작품 의뢰였죠. 로비가 워낙 커서 저만 참여한 건 아니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도 있어요. 작가에게 일정한 금액이 제작비로 지급되었는데 저는 작품의 질을 위해 아낌없이 가장 비싼 재료들을 사용했어요. 나중에 관계자가 보고 이렇게 해서 작가에게 남는 게 있느냐고 오히려 걱정할 정도였죠. 제가 본래 그런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작품 이름은 생명의 힘 (Lif e Force)입니다.

작가님의 대표 작품들은 역동적이고 파워풀하지만 다소 무거운 느낌도 있지 않나요? 초등학생 아이들이 공부하는 공간과 어울리는 작품을 구상하면서 어떤 컨셉을 떠올리셨나요?
사실 저에겐 퍼블릭 공간이 일반 전시 공간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다만 규모의 차이일 뿐이죠. 이번 프로젝트는 학교의 외벽 전면에 걸친 큰 사이즈에요. 즉, 감상의 목적이 되기엔 너무 크다고 할 수 있죠. 또한 학생과 교사, 학부모들이 등교와 하교를 하는 동선에 작품이 이어집니다. 결국 아이들의 동선에 맞춰 함께 하는 작품이 될 수밖에 없는거죠. 나의 동반자가 되는 작품, 보는 것이 아니고 나와 함께 하며 움직이는 작품이 된 겁니다. 물론 전반적인 색채도 이전 보다 훨씬 밝고 가볍습니다.



기자는 8년 전 곽선경 작가와 인터뷰를 했던 인연이 있다. 작가가 첼시 갤러리에서 작품 ‘ 너버스 시스템(Nervous System)’을 전시하던 시기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번 만남에서도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설치 작품을 작업하는 작가들에게는 캔버스에 완성된 작품을 전시하는 화가보다 전시될 공간에 대한 고려와 느낌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붓과 캔버스 대신에 철사, 마스킹 테이프 등을 소재로 대형 ‘공간드로잉’ 작품을 발표해 온 곽 작가의 경우 특히나 전시 공간 자체가 늘 작품의 무대가 되어 왔다. “공간에 대한 첫 시각적, 감성적 반응을 드로잉으로 그 공간 위에 직접 표출”하는 것이 그녀의 작품 스타일이다.



만약 작가의 그림을 직접 보지 않은 독자라면 이 인터뷰 기사만으로는 곽선경 작품의 스케일을 짐작하기 힘들 것이다. 그의 작품은 설치 작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여타의 대형 설치 작품처럼 3차원을 차지하는 구조물들이 아닌 '면'을 사용하는 2차원의 작품들이다. 그러면서도 대표작인 <Untying Space>의 제목처럼 재료와 화면의 제한을 무시하고 공간을 풀어버리는 구성으로, 마치 작품이 관객들의 주변을 둘러쌓고 흐르고 있는 듯한 압도적인 느낌을 준다. (그래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을 3차원적인 조각적인 드로잉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퀸즈 뮤지엄 전시 때는 4개의 벽면과 바닥을 통째로 사용했고, 2006년 한국의 갤러리 스케이프 기획 초대전에서는 갤러리 건물 자체를 마스킹 테이프로 감는 대담한 작업을 했다. 갤러리 근처를 지나던 시민들에게는 한 달 동안의 작업 기간 차체가 작품에 대한 감상 기간이었을 것이다. 관객이자 행인이자 주민이었던 그들은, 작가가 단순히 시각적인 이미지만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생명력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을 고스란히 지켜볼 수 있었다.

작가는 고대와 현대 미술작품이 망라된 브루클린 뮤지엄에서 2009년 한인 작가로는 최초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곽선경: 280 시간을 감싸안기(Sun.K Kwak: Enfolding 280 Hours)> 라는 제목 그대로 작가가 온 힘을 다해 280시간을 쏟아부은, 거의 5킬로미터에 이르며 뮤지엄 5층 전체를 '휘감은' 대작이다. 그녀의 작품을 대하는 순간 관객들은 그 엄청난 스케일과 넘치는 기운에 탄성을 질렀다. 광주에서 도쿄에서 올
랜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대작을 작업하면서 난관에 부딪친 적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럼요. 2012년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에서 한 'Phantoms of Asia: Contemporary Awakens the Past'가 대표적이죠. 벽에서 드로잉이 밖으로 휘어져 튀어나오는, 공간 드로잉의 즉흥성 때문에 나온 아이디어가 있었어요. 기술적인 문제는 물론 시간적 제한 때문에 거의 한계에 도전했던 작업이었는데 결국은 기적과 같이 실마리를 풀어 시각화될 수 있었어요.

미술관의 스테프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자신의 일처럼 도와줘서 가능했고 모두 기뻐했던 잊지 못할 전시죠. 관객이 보는 결과물만으로는 알 수 없는 수많은 과정상의 이야기가 제 작품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사실 거의 모든 제 공간드로잉이 그런 스토리를 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최근 몇 년간 스스로 평가하기에 의미가 깊었던 전시를 소개해주세요.
우선 작년에 스토니 브룩 대학 찰스 왕 센터의 장기 설치작품인 'Space Drawing' 이 기억납니다. 마치 가수가 힘을 빼고 노래 부르듯이 자연스럽게 작업한 공간 드로잉이었어요. 2015년 타이완 국립예술박물관에서 한 'Artist making Movement' 도 기억이 남아요. 제가 그때 한국 갤러리 스케이프 전시도 준비 중이었거든요. 갤러리 3층을 다 메우는 큰 작업 (125 Rolls of Winding, 48 Layers of Piling, 72 Yards of Looping)을 앞두고 스튜디오에서 밤낮으로 몰두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처음으로 컴퓨터로만 소통하여 이뤄 낸 대형 작업이에요. 개인전 작업 보내고, 그날 밤 타이완으로 가 오픈닝 참석, 다음날 아티스트 토크쇼에 제 차례만 마치고 바로 한국 개인전을 위해 바쁘게 날아갔던 기억이 새롭네요.


곽선경 작가는 내년 초 캐나다(CUAG: Carleton University Art Gallery) 전시를 준비 중이다. 캐나다 대학 중 가장 많은 콜렉션을 보유하고 있는 뮤지엄급 갤러리라고 한다. 여전히 전 세계 뮤지엄과 갤러리의 초청이 쇄도 하는 바쁜 스케줄이다. 마지막으로 ‘여가엔 뭘 하느냐?’는 질문을 다소 조심스럽게 했다. 참고로 작가는 마르고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스타일이다. 이미 만났던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질문을 할 때 조심스러웠다. 기자가 허튼 질문을 하면 “그게 왜 궁금한데요?”라고 바로 지적을 당할 것 같은. 인터뷰를 마치며 기자가 작가에 대해 받은 인상을 솔직히 전하자 그녀는 크게 웃었다.


“제 인상이 그래요? 아닌데. 저 얼마나 성격 좋고 소탈한데요.”마치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는 듯이 웃는 작가에게 기자는 좀 더 친근함을 느끼게 되었다.


글 Won Young Park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