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국악도의 도전이 이루어 낸 10년 만의 성과 ‘뉴욕국악축전’ 뉴욕 취타대 이춘승 단장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낸 한 장의 사진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2008년 가을 ‘뉴욕 취타대 창단’이라는 기사가 한인 언론에 조그맣게 실렸다. 사진에는 노란 티셔츠를 입은 10여 명의 어린이들이 어깨동무하고 밝게 웃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단정한 머리에 양복이 어색해 보이는, 마치 신입사원 같은 분위기의 젊은 남자가 서 있다. 그가 당시 33세의 뉴욕 취타대 단장 이춘승이다. 그는 한인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취타대를 조직하고 이들에게 강연과 무대를 통해 한국 전통 음악을 전수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사진 속의 아이들과 단장의 모습, 그리고 그가 밝힌 단체의 목표도 그저 소박했다. 그리고 지난 6월 25일. 뉴욕 칼리지 포인트 프라미스 교회 강당에서 열린 6·25기념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나라 사랑 평화음악회. 1000여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200여 연주자들을 지휘한 뒤, 쏟아지는 기립박수에 상기된 얼굴이 된 사람, 바로 이춘승 단장이다. 이젠 전혀 소박하지 않은, 장대하고 화려한 무대의 중앙에 올라선 이춘승 씨에게 10년이란 긴 시간의 이야기를 짧게 들어봤다.
“Amazing!” “대단하다” “오늘 오길 정말 잘했다!” “백만 불짜리 공연이다”
2시간 40분의 화려하고 웅장한 국악공연이 끝난 후 프라미스 교회를 가득 메웠던 관객들의 입에서 나온 찬사들이다. 그동안 뉴욕에서 전통음악과 무용의 보급과 발전에 힘써온 많은 국악인이 국내외의 정상급 음악인들과 유서 깊은 공연장에서 크고 작은 협연들을 해왔다. 이들 선배 국악인들과 단체들의 활동을 고려한다면 뉴욕취타대의 이번 음악회가 가장 뛰어났다고 혹은 독보적이라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모해 보이던 한 젊은 유학생의 도전이 맺은 이 날의 결실은 그동안 그를 지켜보고 후원했던 많은 관객에게 분명히 벅찬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감동은 누구보다 당사자인 이춘승 단장이 느끼고 있었다.
“10년 만에 뭔가를 하나 이루었구나. 그 생각만 들었어요. 정말 딱 10년만 무조건 도전해보자는 생각으로 달려왔거든요.”
큰 공연을 마친 뒤 쉴 틈도 없이 바로 토론토 워크숍을 위해 준비하고있는 이춘승 단장을 만났을 때 처음 한 말이다. 뉴욕 취타대를 처음 조직했을 때 그 역시 확신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호응해줄지, 재정적으로 꾸려갈 수는 있을지, 기량을 펼칠 무대는 마련이 될지 모든것이 불확실했다. 그래서 조그만 학교 행사부터 코리아 퍼레이드가 벌어진 5 애비뉴까지 뉴욕 취타대가 설 수 있는 곳이라며 무조건 달려나갔다. 초기에는 비용 문제로 복장도 갖추지 못해 단원들은 장사익 씨가 써 준 ‘뉴욕 취타대’ 글씨가 새겨진 노란 티셔츠를 입고 연주를 했다.
그리고 10년 뒤, 이춘승 단장이 기획한 뉴욕 국악축전 무대에 한국, 일본, 중국의 전통악기와 서양 악기를 아우른 다국적 연주팀 ‘월드 전통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뉴욕 프라미스교회 연합찬양대, CBSN 뉴욕 기독교방송국 합창단, 남부 뉴저지 통합학교 어린이 합창단, 뉴욕 기독교선교회 어린이 합창단, 롱아일랜드 한국학교 어린이 합창단 등 200여명이 참여했다. 관객들의 현장 반응이 너무 뜨거운 것도 감동적이었지만, 이후 이 단장의 이메일과 카톡으로 쏟아진 어린이 참가자의 부모들이 보낸 감사의 메시지들은 특히나 고무적이었다.
“한국의 소리가 이렇게 매력적인 걸 미처 몰랐다고 하시는 분들, 아이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분들이 많았어요. 어떤 관객은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기도 하셨죠. 지난 10년간의 노력을 한꺼번에 보상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단장의 이력은 예고에 진학해 일찍부터 전통 음악을 시작한 다른 많은 국악인들에 비해서 다소 특이하다. 그는 세종대학교에서 지구과학을 전공하던 공학도였지만 쇠와 장구의 매력에 빠져 부모님 몰래 학교를 포기하고 중앙대학 한국음악과에 들어갔다. 동기생들 보다 4살이나 많은 나이였다. 남보다 늦은 음악 입문에 부모님의 반대라는 악조건 때문에 더 악착같이 입시 준비를 해 차석으로 합격했고, 한 학기 빠른 조기 졸업을 수석으로 했다.
그는 졸업 후 중앙대 은사이자 경기도립국악관현악단, 안산시립국악 관현악단 지휘자였던 김재영 교수와의 인연으로 국내외 많은 공연을 함께 했다. 장사익, 김영임, 김덕수 등 국악계 큰 선배들과 연주하는 기회도 얻었다. 2006년 그는 뉴욕으로 음악 유학을 왔다. 국악축전 공연에서 200여 대연 주단을 능숙하게 지휘하는 이 단장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면 그를 단순한 사물놀이 연주자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춘승 단장은 브루클린 컨서버토리 오브 뮤직에서 지휘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다.
공부를 마친 후 뉴욕에 남아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이 단장은 이곳에 다양한 장르의 국악 활동이 있었지만 유독 ‘취타대’는 찾아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군대에서 배운 취타대 퍼레이드를 거리축제가 끊이지 않는 이곳 맨해튼 퍼레이드에서 재현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로 가까운 지인들의 아이들과 함께 취타대를 조직했다. 사실 취타대는 대규모 인원과 악기 및 의상 등으로 한국에서도 하기 힘든 국악장르다. 하지만 대학 시절 보여준 ‘일단 하고 싶은 일은 지르고 보는’ 그의 성격과 젊은 패기가 있었다. 그는 악기를 한국에서 공수하고 2008년 여름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캠프장에서 행진에 따른 제식과 음악 지도를 시작으로 마침내 국외 최초의 민간 취타대를 결성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무대의 크기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 달려가 연주를 하면서 현지인들의 관심과 환호를 받았고 조금씩 취타대의 활동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런 활동을 통해 생긴 자신감으로 수많은 대학에서의 공연, 자연사 박물관, 링컨센터, FBI 연주회, 뉴욕 메츠 구장 공연 등으로 무대의 범위를 넓혔고 마침내 대규모 국악축전의 성공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항상 전통을 뿌리에 두고 세련된 음악으로 발전시켜 그 어떤 나라의 예술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계발시키는 것이 저의 의무이며 책무라 여겨왔습니다. 우리 음악을 알리고 우리 예술의 혼을 전 세계에 불어넣는 일에 앞으로도 뚜벅뚜벅 걸어갈 겁니다.”
뉴욕 취타대의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는 이춘승 단장의 각오다.
* 취타대는 조선시대 임금의 어가행렬이나 군사행진시 나발, 태평소, 용고 등을 연주하며 장엄한 행진을 하는 나라의 고적대를 일컫는다.
사진 뉴욕취타대 제공
에스카사 편집부
젊은 국악도의 도전이 이루어 낸 10년 만의 성과 ‘뉴욕국악축전’ 뉴욕 취타대 이춘승 단장
인터넷 검색으로 찾아낸 한 장의 사진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2008년 가을 ‘뉴욕 취타대 창단’이라는 기사가 한인 언론에 조그맣게 실렸다. 사진에는 노란 티셔츠를 입은 10여 명의 어린이들이 어깨동무하고 밝게 웃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단정한 머리에 양복이 어색해 보이는, 마치 신입사원 같은 분위기의 젊은 남자가 서 있다. 그가 당시 33세의 뉴욕 취타대 단장 이춘승이다. 그는 한인 어린이, 청소년을 대상으로 취타대를 조직하고 이들에게 강연과 무대를 통해 한국 전통 음악을 전수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사진 속의 아이들과 단장의 모습, 그리고 그가 밝힌 단체의 목표도 그저 소박했다. 그리고 지난 6월 25일. 뉴욕 칼리지 포인트 프라미스 교회 강당에서 열린 6·25기념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나라 사랑 평화음악회. 1000여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무대에서 200여 연주자들을 지휘한 뒤, 쏟아지는 기립박수에 상기된 얼굴이 된 사람, 바로 이춘승 단장이다. 이젠 전혀 소박하지 않은, 장대하고 화려한 무대의 중앙에 올라선 이춘승 씨에게 10년이란 긴 시간의 이야기를 짧게 들어봤다.
“Amazing!” “대단하다” “오늘 오길 정말 잘했다!” “백만 불짜리 공연이다”
2시간 40분의 화려하고 웅장한 국악공연이 끝난 후 프라미스 교회를 가득 메웠던 관객들의 입에서 나온 찬사들이다. 그동안 뉴욕에서 전통음악과 무용의 보급과 발전에 힘써온 많은 국악인이 국내외의 정상급 음악인들과 유서 깊은 공연장에서 크고 작은 협연들을 해왔다. 이들 선배 국악인들과 단체들의 활동을 고려한다면 뉴욕취타대의 이번 음악회가 가장 뛰어났다고 혹은 독보적이라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모해 보이던 한 젊은 유학생의 도전이 맺은 이 날의 결실은 그동안 그를 지켜보고 후원했던 많은 관객에게 분명히 벅찬 감동의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감동은 누구보다 당사자인 이춘승 단장이 느끼고 있었다.
“10년 만에 뭔가를 하나 이루었구나. 그 생각만 들었어요. 정말 딱 10년만 무조건 도전해보자는 생각으로 달려왔거든요.”
큰 공연을 마친 뒤 쉴 틈도 없이 바로 토론토 워크숍을 위해 준비하고있는 이춘승 단장을 만났을 때 처음 한 말이다. 뉴욕 취타대를 처음 조직했을 때 그 역시 확신이 없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호응해줄지, 재정적으로 꾸려갈 수는 있을지, 기량을 펼칠 무대는 마련이 될지 모든것이 불확실했다. 그래서 조그만 학교 행사부터 코리아 퍼레이드가 벌어진 5 애비뉴까지 뉴욕 취타대가 설 수 있는 곳이라며 무조건 달려나갔다. 초기에는 비용 문제로 복장도 갖추지 못해 단원들은 장사익 씨가 써 준 ‘뉴욕 취타대’ 글씨가 새겨진 노란 티셔츠를 입고 연주를 했다.
그리고 10년 뒤, 이춘승 단장이 기획한 뉴욕 국악축전 무대에 한국, 일본, 중국의 전통악기와 서양 악기를 아우른 다국적 연주팀 ‘월드 전통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뉴욕 프라미스교회 연합찬양대, CBSN 뉴욕 기독교방송국 합창단, 남부 뉴저지 통합학교 어린이 합창단, 뉴욕 기독교선교회 어린이 합창단, 롱아일랜드 한국학교 어린이 합창단 등 200여명이 참여했다. 관객들의 현장 반응이 너무 뜨거운 것도 감동적이었지만, 이후 이 단장의 이메일과 카톡으로 쏟아진 어린이 참가자의 부모들이 보낸 감사의 메시지들은 특히나 고무적이었다.
“한국의 소리가 이렇게 매력적인 걸 미처 몰랐다고 하시는 분들, 아이들에게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분들이 많았어요. 어떤 관객은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기도 하셨죠. 지난 10년간의 노력을 한꺼번에 보상받은 기분이었습니다.”
이 단장의 이력은 예고에 진학해 일찍부터 전통 음악을 시작한 다른 많은 국악인들에 비해서 다소 특이하다. 그는 세종대학교에서 지구과학을 전공하던 공학도였지만 쇠와 장구의 매력에 빠져 부모님 몰래 학교를 포기하고 중앙대학 한국음악과에 들어갔다. 동기생들 보다 4살이나 많은 나이였다. 남보다 늦은 음악 입문에 부모님의 반대라는 악조건 때문에 더 악착같이 입시 준비를 해 차석으로 합격했고, 한 학기 빠른 조기 졸업을 수석으로 했다.
그는 졸업 후 중앙대 은사이자 경기도립국악관현악단, 안산시립국악 관현악단 지휘자였던 김재영 교수와의 인연으로 국내외 많은 공연을 함께 했다. 장사익, 김영임, 김덕수 등 국악계 큰 선배들과 연주하는 기회도 얻었다. 2006년 그는 뉴욕으로 음악 유학을 왔다. 국악축전 공연에서 200여 대연 주단을 능숙하게 지휘하는 이 단장의 모습을 보고 놀랐다면 그를 단순한 사물놀이 연주자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춘승 단장은 브루클린 컨서버토리 오브 뮤직에서 지휘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다.
공부를 마친 후 뉴욕에 남아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던 이 단장은 이곳에 다양한 장르의 국악 활동이 있었지만 유독 ‘취타대’는 찾아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군대에서 배운 취타대 퍼레이드를 거리축제가 끊이지 않는 이곳 맨해튼 퍼레이드에서 재현하면 어떨까라는 아이디어로 가까운 지인들의 아이들과 함께 취타대를 조직했다. 사실 취타대는 대규모 인원과 악기 및 의상 등으로 한국에서도 하기 힘든 국악장르다. 하지만 대학 시절 보여준 ‘일단 하고 싶은 일은 지르고 보는’ 그의 성격과 젊은 패기가 있었다. 그는 악기를 한국에서 공수하고 2008년 여름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캠프장에서 행진에 따른 제식과 음악 지도를 시작으로 마침내 국외 최초의 민간 취타대를 결성하게 되었다.
앞서 말한 대로 무대의 크기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든 달려가 연주를 하면서 현지인들의 관심과 환호를 받았고 조금씩 취타대의 활동을 인정해 주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이런 활동을 통해 생긴 자신감으로 수많은 대학에서의 공연, 자연사 박물관, 링컨센터, FBI 연주회, 뉴욕 메츠 구장 공연 등으로 무대의 범위를 넓혔고 마침내 대규모 국악축전의 성공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항상 전통을 뿌리에 두고 세련된 음악으로 발전시켜 그 어떤 나라의 예술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계발시키는 것이 저의 의무이며 책무라 여겨왔습니다. 우리 음악을 알리고 우리 예술의 혼을 전 세계에 불어넣는 일에 앞으로도 뚜벅뚜벅 걸어갈 겁니다.”
뉴욕 취타대의 새로운 10년을 시작하는 이춘승 단장의 각오다.
* 취타대는 조선시대 임금의 어가행렬이나 군사행진시 나발, 태평소, 용고 등을 연주하며 장엄한 행진을 하는 나라의 고적대를 일컫는다.
사진 뉴욕취타대 제공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