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골목, 진골목

2017-05-14

“어이쿠, 안 본 새 머리카락 많이 질었네. 머리가 질면 땀나니까 할매가 묶어줄게.” 어린 시절 여름방학 때 외갓집에 가면 외할머니가 내게 하시던 말씀이다. 심지어 외할머니는 ‘김’을 ‘짐’으로 ‘김치’를 ‘짐치’라고 발음하셨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겠지만, 진골목은 ‘길다’의 경상도식 방언 ‘질다’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러니까 표준어로 바꾸면 ‘긴 골목’이다.


진골목은 옛 중앙시네마 건물 뒤편부터 시작해서 약전골목과 종로가 교차하는 네거리까지 이어지는 100미터 남짓의 좁고 긴 골목을 말한다. 진골목은 조선시대 때부터 있었는데 당시에는 경상감영까지 이어져 더욱 길었다고 전해진다. 만경관 극장 앞 넓은 도로가 나면서 길이 중간에 뚝 끊긴 것이다. 조선 후기 진골목은 주로 서민들이 지나다녔다.


이 일대에서 경상감영 쪽으로 가려면 종로를 꼭 거쳐야 했는데, 종로는 양반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었다. 종로로 가려니 양반들에게 머리를 숙여야하는 일이 잦자, 서민들은 좀 둘러가도 진골목으로 다녔다. 진골목을 이야기하자면 대구 달성을 본(本)으로 하는 ‘달성 서씨’를 빼놓을 수 없다. 진골목은 조선 후기부터 해방 전까지 대구 토착세력인 달성 서씨들의 집성촌이었다.

근대 초기 진골목의 최고 부자는 서병국 이다. 서병국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구한말에서 해방직전까지 대구에서 최고 부자로 위세를 떨 친 것으로 알려졌다. 약전골목에 오는 객지 상인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일을 했다고 전해진다.



진골목 일대 집과 땅 대부분이 서병국의 것이었다. 서병국의 친인척인 서병원의 저택도 진골목에 있었다. 서병원의 저택은 현재 종로 숯불갈비와 진골목식당, 옛 미도다방 건물, 보리밥식당 등으로 변했다. 해방 이후에도 진골목은 대구 재력가들과 기업인들의 주거주지였다. 코오롱을 창업한 故 이원만 회장이 1933년 진골목에 있는 서병원의 집을 사들였다. 이원만 회장은 1904년 경북 포항시 영일읍에서 태어났는데, 삼성그룹 故 이병철 창업자와 함께 대구 섬유산업이 만들어낸 걸출한 인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이원만은 젊은 시절 일본에 건너가 생활하다가 해방 후 귀국해서 대구 진골목에 정착했다. 이 회장은 이곳 저택에 살면서 1947년 지역의 직물공장을 인수해 한국 최초로 나일론을 생산한 코오롱을 창업했다. 진골목에 가면 ‘정소아과의원’이라는 큰 간판을 내건 저택과 마주하게 된다. 이 건물은 1937년에 지어진 서병국의 방계 형제 서병기의 저택이었다.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양옥으로 일제시대 상류층의 주거 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근대건축물이다. 1947년부터는 소아과 정필수 원장이 매입해 정소아과의원으로 이용했다. 2009년까지 무려 62년 동안 소아과 의원으로 쓰였다. 병의원이 귀하던 시절, 원장은 생명이 위태로운 아이들을 여럿 살려냈다. 그래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한다. 최근까지도 진료를 했으니 정 원장의 낡은 진료실과 손 때 묻은 진료 도구를 구경한 엄마들이 꽤 있으리라. 

진골목 또 하나의 명물은 미도다방이다. 1928년 처음 문을 연 뒤 위치와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현재의 다방 주인 정인숙 씨는 27살이던 1982년부터 30년 넘게 다방을 지켜오고 있다. 그래서 단골손님들이 많은데 정 씨는 잊지 않고 찾아주는 이들에게 친근한 말벗을 자처한다.

요즘도 백발의 멋쟁이 어르신들이 느린 걸음으로 찾아와 ‘정 여사’가 끓여주는 약차 한 잔을 대접받는다. 여기서 차를 주문하면 설탕을 찍어 먹는 생강과 동그랗게 말린 생강 과자도 함께 나온다. 옛날을 추억하는 어르신들의 아지트이지만, 대구 근대골목의 인기로 전국에 입소문이 나면서 젊은이들도 이색적인 풍경을 즐기려고 다방을 종종 찾는다. 단골이었던 대구 출신 故 전상렬 시인은 이곳이 얼마나 좋았으면 ‘미도다방’이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대구의 100년 역사가 진골목 안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것도 도심 한가운데 말이다. 낡고 오래된 것으로부터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진골목에서 온고이지신(溫古以知新)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S.CAS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