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과 함께 하는 근대골목

미술과 함께 하는 근대골목

▲(사진 출처 = 본사 취재)


근대골목 자체가 한 폭의 그림이다. 근대골목을 거닐고 있으면 내 앞에 놓인 모든 장면과 순간이 멋진 그림으로 다가온다. 이상화, 서상돈 고택을 보고 있으면 한 폭의 멋진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뽕나무 잎들이 멋진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는 뽕나무골목을 걷고 있노라면 한적한 고궁 길을 걷는 것 같이 마음이 한결 차분해진다. 높은 곳에 위치한 제일교회 쪽에서 나무 숲 사이로 계산 성당을 내려다보면 그야말로 걸작이다. 이 아름다운 장관은 희대의 서양화가도 놓칠 수 없었나보다. 대구 출신 천재 화가 이인성. 그가 남긴 작품 가운데는 이와 비슷한 위치에서 바라본 계산성당의 모습이 화폭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살았던 시절에는 신식 건물의 제일교회가 없었겠지만, 높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계산성당을 내려다보며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이인성은 계산성당 그리기를 유난히 좋아했다. 초가집 아니면 기와집이 가득했던 대구 하늘 아래 계산성당의 웅장한 기세와 하늘을 찌를 듯한 뾰족한 첨탑이 참으로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이인성이 남긴 그림 중에는 계산성당을 남쪽에서 바라보고 그린 그림도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간에 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열매는 다 떨어지고 나뭇가지만 앙상한 회색빛 감나무이다.신기하게도 계산성당 남쪽에는 지금도 감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이인성 나무’ 라는 푯말을 달고서 말이다. 옛날 이인성이 화폭에 담은 감나무는 아니다. 그 나무는 뽑아내 버리고 없다고 한다. 그를 기리기 위해 수령이 100년 정도 된 감나무를 지금의 자리에 옮겨 심었다. 누구의 생각인지 몰라도 재치가 빛난다. 덕분에 살아있는 감나무를 감상하면서 옛 사람이 된 천재 이인성을 추억할수 있게 되었다.


이인성은 1912년 대구에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지금의 수창 초등학교인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독학으로 수채화 공부를 한 서동진으로부터 수채화 지도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서양화에 입문했다. 1928년 18살의 어린 나이에 수채화 ‘그늘’로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첫 입선을 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어느 후원자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 공부를 했다. 1932년에는 일본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제국미술전람회에서 ‘여름 어느 날’을 출품해 입선했다. 그는 1929년 조선미술전람회를 시작으로 1944년 제23회 마지막 조선미술전람회까지 30여 점이 넘는 작품을 출품해 입선과 6회 연속 특선, 그리고 최고상인 창덕궁상을 받았다. 더불어 일본 제국미술 전람회에서도 여러 차례 입선과 특선을 거머쥐었다. 가난 때문에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관전을 통해 실력을 인정 받았고 ‘조선의 보물’, ‘화단의 귀재’ 라는 수식어를 달며 당대 제일의 화가로 명성을 얻었다.


이인성은 1939년 귀국해 일본에서 의상 디자인을 공부한 김옥순과 결혼했다. 김옥순은 대구에서 알아주는 부잣집 딸로, 그의 아버지 김재명은 세브란스 의대를 졸업한 대구 남산병원의 원장이었다. 김재명은 남산병원 3층에 사위의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다. 1936년 이인성은 그곳에 ‘이인성 향화 연구소’를 열었다. 서울도 아닌 지방에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양화 연구소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만으로 큰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1942년 부인과 사별한 뒤 그의 화필은 힘이 꺾였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 중 술에 취해서 집으로 돌아가다가 검문하던 경찰관과 시비가 붙어 경찰관의 어이없는 총기 오발로 죽음을 맞았다. 불과 39세였다. 천재 화가는 그렇게 떠났다.


이인성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이후 사람들의 머릿 속에서 빠르게 잊혀지는 듯 했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시절에 일찍 세상을 떠난 데다 ‘관전 작가’라는 꼬리표와 함께 친일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동시대 작가인 박수근(1914~1965), 이중섭(1916~1956) 등이 대중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있을 때 그의 이름은 없었다. 그러나 이인성은 한국 근대미술의 도입기이자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 일제 강점기 독보적인 화가였다. 그는 독특한 수채화를 그렸다. 수채화로는 힘든 강렬한 원색을 많이 사용했다. 또 촘촘한 붓 터치가 일품이었다. 후기 인상주의의 화풍을 한국적 토속성과 결합시켜 ‘향토적 서정주의’를 구현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또 인물화에 있어서는 한국적인 인물상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조선의 고갱’ 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거칠면서도 강렬한 필법, 토속적인 색조미로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미적으로 승화시켰다. 이인성은 일제 식민지 가장 출중한 화가임에 틀림없다.

▲ 이인성의 사과나무 (사진 출처 = 123rf)

화가 그가 남긴 주요 작품에는 ‘가을 어느 날’(1934), ‘여름 실내에서’ (1934), ‘경주의 산곡에서’(1935), ‘실내’(1935), ‘해당화’(1944), ‘빨간 옷을 입은 소녀’(1940년대) 등이 있다. 최근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2012년, 이인성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작품 ‘사과나무’가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다. 1939년에 그린 ‘사과나무’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대구의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무려 40년 동안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타향살이를 하다 우여곡절 끝에 고향의 품으로 돌아왔다. 


사연은 이렇다. 이 작품은 원래 대구 명덕초등학교에 있었다. 1940년 불명의 소장자가 명덕초등학교에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972년 명덕초등학교는 작품을 국립현대미술관에 빌려줬다. 어떤 식으로 가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교장이 여러 번 바뀌고 세월이 흘러 작품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최근 들어 현대미술관측이 작품의 소유를 명덕초등학교로 확인하면서 그림의 대구 이전이 추진됐다. 결국 과거에 전시회를 하려고 명덕초등학교로부터 빌렸다가 40년 동안 돌려주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시교육청은 ‘사과나무 귀향’을 위해 대책팀까지 꾸려 이 일에 매달렸다. 대구의 상징이던 사과를 주제로 한 대표작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사과나무 가지가 바닥까지 기울어질 정도로 사과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이인성의 ‘사과나무’. 그림을 돌려받은 명덕초등학교는 작품의 보관과 관리를 위해 다시 대구시립미술관에 기탁했다. 

▲ 이인성과 이쾌대 (사진 출처 = 123rf)


대구 근대화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한 사람, 이쾌대이다. 이인성보다는 한 해 늦게 태어났지만, 수창초등학교를 같은 해에 졸업한 졸업 동기이다. 그러나 이인성과 이렇다 할 교우관계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다. 이쾌대는 1913년 경북 칠곡군 지천면에서 태어났다. 대구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장발의 지도를 받았다. 재학 중인 1932년 제 11회 조선미술전람회전에 입선했다. 이어 도쿄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해 공부했으며, 1941년에는 이중섭, 최재덕 등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하여 서울에서 작품전을 가졌다. 8.15광복 후에는 조선조형예술동맹과 조선미술동맹에 간부로 있으면서 진보적인 미술인들의 조직을 이끌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좌익 계열인 남조선미술동맹에 가담했다. 이어 인민군 측 종군화가로 전선에 참가했다가 포로가 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영되었고, 휴전 직후 남북 포로교환 때 북한을 택해서 갔다.

▲ (사진 출처 = 123rf)


대표작품으로는 ‘작품’(1938), ‘운명’(1038), ‘부인’(1943), ‘걸인’(1948), ‘추과’(1949), ‘군상’ 시리즈 등이 있다.특히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1948)이라는 작품을 보면 그의 화풍이 잘 드러나 있다. 이쾌대 자신이 고향마을을 배경으로 붓과 팔레트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중절모를 쓰고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화가는 왼손에 서양 화구인 팔레트를 들고 오른손에는 한국화를 그리는 모필을 들고 있다. 화가의 뒤로는 전형적인 한국의 산이 펼쳐져 있고, 세 여인이 들길을 걷고 있다. 화구를 들고 감상자를 응시하고 있는 이쾌대. 그의 당당한 의지와 희망이 엿보인다.


이쾌대의 그림은 향토적이고 민족주의적 색채가 짙다. 서사적이고 장엄한 화풍을 지녀 ‘한국의 미켈란젤로’ 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완성도 높은 화면 구성에 시대적인 아픔을 은유적으로 작품에 담아냈다. 그러나 월북 화가란 이유로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월북화가들의 작품들이 해금 조치되어 이쾌대의 작품도 세상에 나왔다. 그 후 ‘해금작가 유화전’, ‘월북화가 이쾌대전’, ‘이쾌대 순회전’, ‘광주비엔날레초대전’ 등으로 작품이 전시되었고, 한국근대미술가 1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사망에 대한 이야기는 분분하다. 1965년 북한에서 위장병으로 숨을 거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1987년도에 사망했다는 설도 전해진다. 1960년도를 전후로 해서 숙청을 당해 말년이 불우했다는 설이 있다. 


근대골목의 핵심지인 이상화 고택에 가면 또 한 사람의 대구 출신 화가를 떠올릴 수 있다. 대구의 서양화가 1호라 할 수 있는 이상정. 바로 시인 이상화의 형이다. 이상정은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면서 서양 화구를 최초로 대구에 가져왔다. 1918년경으로 추정된다.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했지만, 한국으로 돌아와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중국 상하이, 난징 등지에서 항일 투쟁을 한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이 밖에 한국 근대를 대표하는 많은 화가들이 대구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6.25전쟁 당시 너도 나도 대구로 피난을 많이 왔기 때문이다. 이중섭 화백 또한 대구로 피난을 와 향촌동 일대를 중심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가난했던 이중섭이 껌 종이로 쓰이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 지인들에게 나눠줬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이다. 우리나라 근대 미술의 중심지였던 대구, 근대골목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출처 월간 에스카사 /  www.STORY-CASA.com

글 권윤수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