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려한 외모. 최고의 실력. 컬럼비아 치의대 교수 & Comfort Dental Clinic 원장 프란시스 오

치과 병원 원장 선생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하얀 가운을 입은 조금은 무서운? 그러나 S.CASA 창간호 표지를 장식해준 Comfort Dental Clinic Francis Oh 원장 선생님은 도무지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최강 동안에다가 수려한 외모가 더해져서 아이돌 스타가 왔더라도 울고 갈 정도의 훈남 의사선생님이다.

그뿐이랴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명문대를 나온, 누구나 부러워하는 엄친아다. 남들은 하나만 가져도 대단하다고 할 학위를 몇 개씩 갖고 있고. 그에 걸맞은 화려한 경력을 가졌다. 고백하자면 그는 한마디로 특별한 사람이다. 이런 그가 마치 연예인이 된 듯 S.CASA 창간호 표지 모델에 도전했다. 편집장의 강권으로 이뤄진 일이라지만 새로운 세계를 맛본 듯 그는 적당히 즐겨가며 성실한 태도로 촬영에 임해주었다. 예상대로 표지 촬영 작업은 촬영 내내 웃음꽃이 끊이질 않는다. 결혼식 때 잠깐 받아본 메이크업 시간 외엔 이런 상황이 익숙하지 않다면서 어색한 미소만 지으시는 Francis Oh 선생님. 이런 원장 선생님의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전화기로 쉴 새 없이 찍어서 직원 카톡방으로 옮기는 병원 가족들의 즐거운 수다와 웃음소리에 촬영장은 내내 화기애애하기만 한다.


외모는 아이돌 수준이신데 하고 있는 일은 원장님교수님박사님 이 중에 호칭을 뭐라고 불러드려야 할지 고민됩니다인터뷰 전에 언 듯 프로필을 살펴보다가 특이하게 느낀 점은 박사학위가 두 개에대학원만 4개 이상을 졸업하셨더군요이미 미국 TV 매체나 유튜브 인터뷰 등에도 나와 있듯이 이외에도 다른 공부를 하신 게 많다고 들었습니다현재 하고 계시는 전공과 관련이 없을 수도 있는 공부까지.. 왜 이렇게 많이 하시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전 사실 동안이란 얘길 듣는 걸 싫어했어요. 사실 어린 학생들에게 어려보이는 교수는 별로잖아요. 그런데 어느 새 어려보인다는 얘기를 좋아할 나이가 되어갑니다. (하하)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한 지식은 두 가지입니다. 매 일 해야 하는 일을 더욱 잘하게 해줄 수 있는 전공지식과 내가 사는 세상을 더욱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지식이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영어가 원어로 느껴질 정도로 친숙해졌지만, 어릴 적 유학 생활을 생각하면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인들과 이질감을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파티에서 어울리는 것이라든지 처음 본 이웃과 친해지는 과정 등이지요.

원래 스스럼없는 성격이기에 처음에는 언어의 차이에서 나오는 소통의 불편함이라고 생각하였지만, 언어가 편해짐에도 소통의 이질감이 존재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후로 그 이질감은 문화와 공감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제 드라마에서 본 얘기라든지, 집안 문제라든 지의 차이이지요. ‘서로 간의 소통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언어의 차이가 아니라 공감대의 차이이다.’ 라는 것을 깨달은 후 단순히 사람 사이의 관계 이상으로 내가 미국 사회에서 커가기 위해서는 언어이상으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서 그 후로 전공이던 생화학 이외에도 역사, 철학, 교육학 등에 관심을 두고 공부하였습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의학 공부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은 꽉 찰 듯한데 역사, 철학에 이어 교육학까지 공부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지금도 상식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흔히 우스갯소리로 상식이란 ‘넓고 얇은 지식’이라고 얘기하지만, 상식이야말로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깊게 이해하게 해줄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과 여건만 허락된다면 아직도 하고싶은 공부가 아직도 많습니다. 제가 욕심이 좀 많죠? (웃음)


‘서로 간의 소통이 가능하게 하는 건 언어의 차이가 아니라 공감대의 차이이다.’라는 말씀을 깊이 공감합니다. 결국, 언어란 소통의 도구일 뿐,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모든 영어권인종과 깊은 공감대까지 갖게 되는 건 아니지요. 대학 시절질문 좀 드릴게요. 복수 전공을 하셨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셨나요?

대학 때 복수전공을 한 이유는 사실 영어를 좀 더 늘리기 위해서였습니다. 16살에 미국에 유학 와서 대학까지 잘 진학하고 언어소통의 불편함은 없었지만 이 정도의 영어로는 이 사회에서 성장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했었지요. 그래서 억지로 영문학을 복수전공으로 택하고 쓰고 또 쓰고를 반복하다 보니 영어가 많이 늘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무식할 수도 있는 방법이었지만 그 방법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을 떠올려보려해도 생각나지 않을 만큼 저에겐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암튼 당시의 저는 영어를 조금이라도 더 늘려보기 위해 여러 방법을 다 써봤습니다. 영작 실력을 늘려보려고 대학 신문사에 가서 기자 일을 해보겠다고 했었어요. 샘플 기사를 써보라고 하더군요. 바로 써서 제출했더니 면접하던 분이 그리 맘에 들지 않으셨던지 웃으면서 여기서 일하고 싶으면 대학 운동 경기하는 사진이나 찍어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어요. 그뒤 6개월 후에는 대학 농구경기 짧은 칼럼을 쓸 기회가 주어져서 무척 신 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후로 대학 졸업 시에는 계속 신문사 에디터를 하며 졸업을 했지요. 좀 무식한 방법이고 과정도 힘들었지만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해도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습니다.

2014년 컬럼비아 치과 대학원 졸업식에서 학생들이 뽑은 올해의 교수로 졸업 축사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교수로 재직하시는 중에 뜻깊었던 일을 꼽으라면?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 지내면서 저는 매우 소중한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순한 교수와 제자 사이가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해 배운 점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관계도 같은 것이지요. 내안의 소중한 무엇을 아낌없이 내어주고 나눠줄 때 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를 더욱 빛나게 하고, 그 빛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 그걸 상대가 깨닫고 내가 확인받을 때 ‘나의 내어줌’에 대한 그 이상의 보답은 없다는 걸 느꼈습니다. 교수로서 가장 뜻깊은 일을  꼽으라면 학생들과 깊은 교감을 느끼며 사람에 대한 관계를 다시 새롭게 배운 점입니다.


어린시절 얘기 좀 들려주세요. 엄청난 공인 ‘엄친아’셨을듯 한대요.(엄친아: '엄마 친구의 아들' 또는 '엄마친구아들'의 줄임말로 대한민국에서 유행하는 용어이다. 고정된 의미는 없으나 주로 여러가지 조건을 갖춘 완벽한 남자의 은유로 사용된다.) 

어린시절 얘기를 하자면 부모님 얘기를 안 할수가 없네요. 어린시절 바쁘신 부모님 스케줄 때문에 많은 시간을 할머님 손에서 컸습니다. 할머니가 들려주신 얘기를 통해 뵌 적은 없지만 훌륭한 의사셨다는 할아버지 얘기를 많이 들었지요.

경성대학 외학부 출신으로 부산에서 의사생활을 하시다가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신설에 참여하시고 미국에 오셔서 당시 동양인을 의대 교수로 받아주었던 하워드 대학이라는 흑인 학생들이 많이 다니는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프리카로 연구활동을 가셨다가 병에 걸려 지금의 제 나이와 같은 40세라는, 의사로서는 한참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하시더군요. 어찌보면 마치 동화속 이야기 같은 얘기를 들으며 ‘훗날 내가 자라면 나도…..’ 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화같던 얘기가 현실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제가 성인이 된 후 할아버지 묘지를 찾았으며 할아버지를 알고 계시던 당신의 미국인 지인을 Washington D.C. 와 Maryland 에서 찾게 되었던 겁니다. 동화속 스토리가 현실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자 ‘나도 조금 더….’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으며 더 노력을 하게 되더군요.


만학을 하시고 지금도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계시는 어머님 얘길 언듯 들었는데… 부모님 얘기도 좀 해주시죠. 

저는 훌륭하신 조부님을 가슴속에 새기며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만큼 부모님도 깊이 존경하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정형외과 의사이신 아버지와 저보다 더 책을 좋아하시는 어머님이 계십니다. 어머님은 50후반에 대학원 공부를 다시 시작하셔서 60 초반에 박사학위를 받으셨어요. 젊은 사람도 힘든 공부를 50대 후반에 도전하신 어머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 어머니지만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분은 언제나 저를 계속 믿어 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오늘의 제가 있을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가족이나 마찬가지 이겠지만 한국 부모님들이 보여주시는 자식에 대한 헌신은 한인들이라면 너무나 당연한 얘기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어느 나라 민족도 따라가지 못할겁니다. 제가 부모님에게 보답하는 길은 더 좋은 생각을 품고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조금이라도 이롭게 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거라 생각합니다. 그길만이 부모님, 조부님께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거라 생각하며 제가 나태해질 때마다 새롭게 마음을 다집니다. 진심으로, 말로 표현하기조차 어렵울 정도로 두 분 부모님께 깊이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단순한 ‘엄친아’가 아니셨군요. 훌륭한 조부님과 두 분 부모님의 가르침속에서 잘 성장하신 선생님의 어린 시절을 듣다보니 숙연해집니다. 오늘의 선생님을 있게 한 훌륭한 조부님과 부모님께 환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도 감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사진촬영을 하면서 여러가지 재미있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표지모델을 해보신 소감 한마디 해주시죠.

시간을 쪼개어 사는 저에게 오늘의 일탈은 무척 즐거운 시간이였습니다. 평소 해보지 않던 포즈를 작가님 요구대로 취하면서 어색하기도 했지만 나온 사진을 보니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라 생각되는군요. 어떤 사진은 평소의 저와 다르게 잘 나와서 ‘속으로 어? 누구지? 이 사진은 정말 멋진데?’ 하면서 스스로에게 감탄하기도 했습니다. (웃음)

오늘 하루 참 즐거웠고 많이 웃었습니다. ‘가끔일탈도 좋구’나 싶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생각나는 건, 저희 어머님이 해주셨던 말씀이셨습니다. ‘무엇 무엇다운 것이 가장 좋다’ 이 말은 제가 항상 가슴속에 넣고 기억하는 소중한 말입니다.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보니, 학생은 학생다운 모습과 마음을 가질 때 가장 예뻐보이고요. 또 선생은 선생다운 모습과 마음을 가지고 행동할 때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의사도 마찬가지겠지요. 가운을 입은 제 모습이 가장 저다운 모습이 아닐 까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오늘 촬영을 하고나서 느낀 점은 다채로운 모습이 우선은 흥미롭고 삶을 즐겁게 해주지만, ‘나에게 가장 어울리는, 나의 나다운 모습’은 어떤 것일까 생각하게 되었고 진정한 ‘가장 나 다움’을 잃지 말고 흔들리지 말며 소중히 지켜가야 한다. 라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메이크업을 도와주신 박 미영 원장님 최진환 작가님 그리고 제니퍼 편집장님과 S.CASA 스텝 여러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뷰와 표지 모델 제의에 선듯 응해주셔서 S.CASA 창간호를 빛내 주신 Comfort Dental Clinic(편안한 치과) Francis Oh 원장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S.CAS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