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인의 아내로 미국에 사는 한국 엄마 홍정연 앗살람 왈에꿈
내가 태어난 나라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살아갈 나라는 자의건 타의건 어찌하든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나라에 와서 살지라도 이민 이유와 상관없이 이민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 합니다. 한민족의 뿌리를 잊지 못하고 타국에서 살아갑니다. 모국을 그리워하는 것만큼 우리의 2세들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정신과 혼을 전해줄지 항상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 이웃 이야기’ 연재 두 번 째는 제 3의 세계인 파키스탄에서 온 남자와 결혼한 후 미국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사는 보통의 한국 엄마 홍정연 씨가 어떻게 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조화시키며 한국말, 우루두, 영어 세 가지를 완벽하게 다 잘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진솔하게 써 내려간 글입니다. 홍정연 씨는 아직도 한국의 뿌리를 후대에 잘 전달하려는 고민하는 중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노력이 후대의 정체성 확립에 조금이나마 거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일 겁니다.

카라치 공항에 도착하니 시댁 식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화려한 색감의 카미즈를 입은 여자들 사이에서 엘리트 티가 물씬 나는 시동생이 인사말을 건넨다. “앗살람 왈에꿈” 이 곳에 오기 전 여러 번 연습했건만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낯선 분위기 탓이기도 했지만, 시누이가 들고 있던 꽃다발에 시선을 빼앗겨서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꽃다발은 편편한 삼각형 종이에 한송이씩 붙여져서 플라스틱으로 감싸진 화환처럼 보였다. 그 옆에서 천진하게 말없이 웃으시던 시어머니는 오래기다리셨는지 지친 모습이었고, 24시간을 비행기 타고 온 나 역시 피곤을 감추며 ‘생큐 생큐’를 연발했다. 반듯한 인상을 주고 싶어 흰 셔츠에 베이지 정장을 입었건만 파키스탄의 5월의 더위는 (거의 섭씨 100도를 넘나드는) 그런 나의 의도를 비웃는 듯했다.
23여 년이 지났지만, 온몸에 훅하며 들어오던 그때의 더운 카라치의 밤공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난 파키스탄 남자와 인연을 맺었고 전래동화의 이야기처럼 아이 셋을 낳고 살고 있다. 요즘은 고국에서도 파키스탄 남편과 한국 여성 커플이 낯설지 않다고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국제 커플은 그들의 나라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제 3국인 미국, 그것도 세계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만났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당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으로 자연스레 학생 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다. 85 학번인 나는 대학시절, 최소한의 양심에 따라 민주화 활동과 반독재 운동의 하나로 학생회 홍보팀에서 활동한 게 다였지만, 졸업 후 운동권 학생이라는 낙인은 취직에 부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서울에 이름만 대면 아는 대부분의 병원에 지원했고 필기시험은 무사히 통과했었다. 그러나 매번 면접에서 떨어졌다. 지금와 생각해 보면 소위 ‘블랙리스트’에 내 이름이 올라 있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두 살 위인 오빠는 운동권 수장으로 경찰에 쫓기고 있던 터라 집에선 나의 취직보다 오빠의 안위가 우선일 수 밖에 없었다. 도망 다니다 지친 오빠가 집에 들러 엄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 한 끼를 먹다잡힐 뻔한 경우도 있었으나 우리 오 형제의 기지로 무사히 고비를 넘긴기억도 있다. 이제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 당시 우리 집은 어두운 긴 터널을 한 조각의 빛도 없이 서로를 의지하며 빠져나오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답답한 심정으로 몇 달을 보내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러 신문을 광고까지 포함해서 세세히 읽곤 하였는데 하루는 해외개발공사에서 미국 간호사 취업을 도와준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엊그제 까지만 해도 미제타도를 외치던 내가 미국을 간다는 것에 쓴웃음이 났지만 마지막 기회라 여기며 등록을 했다. 학원을 오가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남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영어를 중얼거렸고 책이 너덜거릴 만큼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몇 개월 후에 치른 시험에서 100여 명의 지원자 중 2명만이 합격하였고 난 간호학은 통과하였으나 영어 과목은 그렇지 못하여 재도전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명석하게 태어나지 못함을 한탄해보기도 하고 남아 중심의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나의 특기인 오뚝이 정신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때부터인지 어려운일이 생기면 더 오기가 생겨서 안 되고 넘어져도 계속 도전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건 그로부터 6개월 후다. 나에겐 달랑 1000달러가 있었고 그나마 그린카드 수속비를 내고 나니, 남은 돈 300불로 한달 이상을 버텨야 했다. 다행히 그 당시엔 외국인 간호사에 대한 처우가 좋아서 비행기 티켓과 3개월 렌트비를 병원에서 지급해 주었으니 주급만 모으면 지출도 별로 없어서 일단 생활비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겨우 생활 영어 정도만 구사할 수 있는 실력으로 병원에서 근무해야 했으니 실수라도 할까 봐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걷는 것 같았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길에 난 그 푸른 뉴욕의 5월의 하늘을 보면서 기도했다. 오늘하루도 무사히 끝나게 해달라고….
나의 첫 근무지는 200 침상을 보유한 지역 병원으로, 대부분이 고령 환자인 비교적 수월한 병원이었다. 하지만 전화 받는 일은 진짜 고역이었다. “Could you speak slowly? One more time please?”도 두어 번 쓰면 알아듣는 척해야 해서 환자의 약을 제대로 오더 받았는지 알 수가없었다. 전화벨만 울리면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피하곤 하였지만, 창피함 보다는 환자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던 나는 수간호사에게 여러번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후로도 1년 정도 전화 울렁증은 계속 나를 괴롭힌 것 같다.
(연재는 다음호로 이어집니다.)
글 홍정연 미국전문 간호사
에스카사 편집부
파키스탄인의 아내로 미국에 사는 한국 엄마 홍정연 앗살람 왈에꿈
내가 태어난 나라를 선택할 수는 없지만 내가 살아갈 나라는 자의건 타의건 어찌하든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나라에 와서 살지라도 이민 이유와 상관없이 이민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그리워 합니다. 한민족의 뿌리를 잊지 못하고 타국에서 살아갑니다. 모국을 그리워하는 것만큼 우리의 2세들에게 어떻게 하면 우리의 정신과 혼을 전해줄지 항상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 이웃 이야기’ 연재 두 번 째는 제 3의 세계인 파키스탄에서 온 남자와 결혼한 후 미국에서 아이 셋을 키우며 사는 보통의 한국 엄마 홍정연 씨가 어떻게 세 나라의 문화와 언어를 조화시키며 한국말, 우루두, 영어 세 가지를 완벽하게 다 잘할 수 있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진솔하게 써 내려간 글입니다. 홍정연 씨는 아직도 한국의 뿌리를 후대에 잘 전달하려는 고민하는 중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노력이 후대의 정체성 확립에 조금이나마 거름이 되길 바라는 마음일 겁니다.
카라치 공항에 도착하니 시댁 식구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화려한 색감의 카미즈를 입은 여자들 사이에서 엘리트 티가 물씬 나는 시동생이 인사말을 건넨다. “앗살람 왈에꿈” 이 곳에 오기 전 여러 번 연습했건만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낯선 분위기 탓이기도 했지만, 시누이가 들고 있던 꽃다발에 시선을 빼앗겨서이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꽃다발은 편편한 삼각형 종이에 한송이씩 붙여져서 플라스틱으로 감싸진 화환처럼 보였다. 그 옆에서 천진하게 말없이 웃으시던 시어머니는 오래기다리셨는지 지친 모습이었고, 24시간을 비행기 타고 온 나 역시 피곤을 감추며 ‘생큐 생큐’를 연발했다. 반듯한 인상을 주고 싶어 흰 셔츠에 베이지 정장을 입었건만 파키스탄의 5월의 더위는 (거의 섭씨 100도를 넘나드는) 그런 나의 의도를 비웃는 듯했다.
23여 년이 지났지만, 온몸에 훅하며 들어오던 그때의 더운 카라치의 밤공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난 파키스탄 남자와 인연을 맺었고 전래동화의 이야기처럼 아이 셋을 낳고 살고 있다. 요즘은 고국에서도 파키스탄 남편과 한국 여성 커플이 낯설지 않다고 한다. 아마도 대부분의 국제 커플은 그들의 나라에서 만났을 가능성이 클 것이다. 하지만 나와 남편은 제 3국인 미국, 그것도 세계의 중심지인 뉴욕에서 만났다.
80년대 대학을 다닌 당시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같은 심정으로 자연스레 학생 운동에 참여했을 것이다. 85 학번인 나는 대학시절, 최소한의 양심에 따라 민주화 활동과 반독재 운동의 하나로 학생회 홍보팀에서 활동한 게 다였지만, 졸업 후 운동권 학생이라는 낙인은 취직에 부정적으로 작용하였다. 서울에 이름만 대면 아는 대부분의 병원에 지원했고 필기시험은 무사히 통과했었다. 그러나 매번 면접에서 떨어졌다. 지금와 생각해 보면 소위 ‘블랙리스트’에 내 이름이 올라 있지 않았나 싶다. 게다가 두 살 위인 오빠는 운동권 수장으로 경찰에 쫓기고 있던 터라 집에선 나의 취직보다 오빠의 안위가 우선일 수 밖에 없었다. 도망 다니다 지친 오빠가 집에 들러 엄마가 차려주신 따뜻한 밥 한 끼를 먹다잡힐 뻔한 경우도 있었으나 우리 오 형제의 기지로 무사히 고비를 넘긴기억도 있다. 이제는 추억이 되었지만, 그 당시 우리 집은 어두운 긴 터널을 한 조각의 빛도 없이 서로를 의지하며 빠져나오는 분위기였다.
그렇게 답답한 심정으로 몇 달을 보내고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러 신문을 광고까지 포함해서 세세히 읽곤 하였는데 하루는 해외개발공사에서 미국 간호사 취업을 도와준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엊그제 까지만 해도 미제타도를 외치던 내가 미국을 간다는 것에 쓴웃음이 났지만 마지막 기회라 여기며 등록을 했다. 학원을 오가는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남의 시선엔 아랑곳하지 않고 영어를 중얼거렸고 책이 너덜거릴 만큼 미친 듯이 공부를 했다. 몇 개월 후에 치른 시험에서 100여 명의 지원자 중 2명만이 합격하였고 난 간호학은 통과하였으나 영어 과목은 그렇지 못하여 재도전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명석하게 태어나지 못함을 한탄해보기도 하고 남아 중심의 부모님을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나의 특기인 오뚝이 정신으로 다시 일어섰다. 그때부터인지 어려운일이 생기면 더 오기가 생겨서 안 되고 넘어져도 계속 도전을 하는 버릇이 생겼다.
미국 땅을 처음 밟은 건 그로부터 6개월 후다. 나에겐 달랑 1000달러가 있었고 그나마 그린카드 수속비를 내고 나니, 남은 돈 300불로 한달 이상을 버텨야 했다. 다행히 그 당시엔 외국인 간호사에 대한 처우가 좋아서 비행기 티켓과 3개월 렌트비를 병원에서 지급해 주었으니 주급만 모으면 지출도 별로 없어서 일단 생활비 걱정은 없었다. 하지만 겨우 생활 영어 정도만 구사할 수 있는 실력으로 병원에서 근무해야 했으니 실수라도 할까 봐 하루하루가 살얼음을 걷는 것 같았다. 아침마다 출근하는 길에 난 그 푸른 뉴욕의 5월의 하늘을 보면서 기도했다. 오늘하루도 무사히 끝나게 해달라고….
나의 첫 근무지는 200 침상을 보유한 지역 병원으로, 대부분이 고령 환자인 비교적 수월한 병원이었다. 하지만 전화 받는 일은 진짜 고역이었다. “Could you speak slowly? One more time please?”도 두어 번 쓰면 알아듣는 척해야 해서 환자의 약을 제대로 오더 받았는지 알 수가없었다. 전화벨만 울리면 화장실에 가는 척 자리를 피하곤 하였지만, 창피함 보다는 환자의 안위가 더 걱정되었던 나는 수간호사에게 여러번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후로도 1년 정도 전화 울렁증은 계속 나를 괴롭힌 것 같다.
(연재는 다음호로 이어집니다.)
글 홍정연 미국전문 간호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