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다시 씨알을 말하다

대한민국은 질곡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으로 인해 고난과 투쟁으로 점철된 시간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억압과 절망 속에서도 꿋꿋하게 일어섰던 민족이 바로 한민족이고, 대한민국이다. 시련이 깊으면 깊을수록, 위기가 닥치면 닥칠수록 그만큼 복원력과 자생력은 더 강해지고, 하나로 단결한다. 내전이 끝나고 세계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 가운데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불과 반세기 만에 세계 경제 대국으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국민이 지니고있는 힘과 근면함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나라나 대한민국처럼 될 수는 없다.

수많은 외침과 내적갈등에 저항할 의지나 동력마저 잃어버린 채 국가의 명맥만 유지하는 나라도 왕왕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분열과 통합을 통해 성숙해오고 발전해 왔다. 그 저항의 정신과 불굴의 투지는 고스란히 한민족의 피톨 속에 스며들어있다. 그것은 강제하고 억압하면 할수록 더 강한 탄성으로 복원된다. 그 어떤 물리적 수단으로도 한민족의 영혼과 정신을 훼손하지 못한다. 한민족의 기개와 절개는 숱한 국가적 위기 속에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한민족의 그런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자기 자신을 지키고, 세상을 지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에 대한 이해와 존재에 대한 성찰이 필수적이다. 자신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읽지 못하는데 어찌 올바른 방향을 정립할 수 있을까. 세상과 인간과 나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방향타가 고장 나버린 선박처럼 제자리를 돌거나 종내에는 침몰해버리고 말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대한 인식과 존재에 대한 성찰은 쉽지 않다. 때에 따라서는 사상의 리더나 사상의 지휘자가 필요한 법이다. 올바른 인식으로 안내하는 자. 구루, 스승, 랍비, 지도자, 선생, 선지자, 이 지구 위에서 그들은 수많은 이름으로 불린다. 그들은 암흑의 세상에 등불을 켜고, 사람들을 안내한다.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위대한 사상가들은 그렇게 인간을 탐구하고 올바른 이해를 제시한다. 우리에게도 그런 사람이 있다. 비폭력저항으로 세계를 감동하게 한 간디 같은 사람. 인도에 간디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함석헌 선생이 있다. 노벨 평화상 후보로 두 번이나
이름을 올린 사람, 바로 함석헌 선생(咸錫憲, 1901~1989)이시다.



함석헌 선생은 역사가이자 교육자, 문필가, 또한 기독교에 인도 사상과 동양철학을 접목한 위대한 사상가이기도 하다. 이렇듯 동서양을 아우르는 선생의 사상은 어두운 시기에 밝은 등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내가 함석헌 선생을 만난 때는 고등학생 때였다. 사춘기도 끝나고, 한창 세상과 나의 괴리에 힘들어할 때,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는 청맹과 니인 내게 눈과 귀를 틔워줬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길라잡이가 돼주었다.

‘씨알’. 선생이 말하는 ‘씨알’은 뭘까. 선생이 부르짖은 ‘씨알’은 곧 만이며, 한 개인이다. 그 ‘씨알’은 썩어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한 알의 씨알로 국가를 구성하는 만인 것이다. 선생은 ‘씨알’을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서민이란 말 쓰지 않는다. 씨알이다. 새 시대를 낳을 씨알이다.”라고.

선생은 저 엄혹했던 시절, 군부독재 정권의 눈치를 보거나 굴하지 않고,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저항과 투쟁을 부추겼다. 더불어 비겁한 지식인들을 향해 올곧게 일어날 것을 독려하고, 독재정권에 정면으로 맞서며 항거했다. 또 선생은 잠들어있던 씨알들을 향해 깨어나라며 죽비로 내리쳤다. 민중, 저항, 투쟁, 혁명…… 당시 금기어였던 단어들은 선생의 입과 펜 끝에서 살풀이춤을 추듯 풀려나와 대량유포 되었다.

.5·16 쿠데타를 비판하고, 독재정권을 나무라며 씨알들의 새로운 혁명을 견인했다. 나는 빠져들었고, 청년들은 숨어 함석헌 선생의 외침과 속삭임을 들었다.

선생의 표현처럼 우리는 모두가 씨알이다. 하나의 완전한 개별자위자 존재이다. 그것이 어찌 작다고 할 수 있을까. 한 알의 작은 씨알에는 우주의 움직임과 처음과 끝, 성과 속, 삶과 죽음이 함께 들어있는 것이다. 그렇게 선생의 씨알 사상에는 생명에 대한 경외심과 전체를 향한 선생의 너른 세상 인식이 들어있다. 시련이 사람을 키운다. 역경을 이겨낸 사람은 그만큼 삶과 세상에 대한 성찰이 깊다. 그 삶은 자신은 물론 타인의 삶도 포함한다. 함석헌 선생 역시 다르지 않았다. 선생의 사상이 웅숭깊어질 수있었던 것은 삶의 고비 구비에서 만난 역경 덕분이었다. 그 시련과 역경이 선생을 키우고 인간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더해주었다. 더불어 세계와 개인, 역사와 개인, 전체와 개인, 자존과 저항, 폭력과 비폭력의 상관관계와 기독교에 대해 자신만의 이론을 정립해나갈 수 있었다. 선생의 인생역정을 따라가 보면 다음과 같다.

선생은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24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선생은 스승 우치무라 간조로부터 기독교를 접하게 되면서 인생의 큰 변곡점을 만난다. 기독교 사상은 선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선생이 만난 기독교는 무교회적인 기독교였다. 선생은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으로 어떠한 종적적인 제도나 형식, 교리와 교회제도 등을 거부하고 저항하였으며, 무교회주의자의 동인지인『 성서조선(聖書朝鮮)』을 창간하는데 참여했다. 성서조선은 조선에서 무교회적 기독교의 정체성을 설파하고, 선생은 현실적인 욕망에서 해방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의(義)'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러나 그가 일본에 있을 당시 선생의 인생을 뒤흔드는 커다란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관동대지진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은 관동대지진을 조선인과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책동한 폭동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했다. 선생 역시 그 광기를 피해갈 수 없었다. 선생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감옥생활을 하게 되지만 목전에 이른 죽음 속에서도 선생의 날카로운 정신은 훼손이 되지 않았고 선생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선생의 시련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죽음의 위기를 딛고 1928년, 어렵사리 귀국길에 오른 선생은 모교인 오산 고등보통학교에서 십 년 동안 교사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심취한 기독정신과 세계관을 아이들에게 전하며 미래의 씨알들을 양성했다. 그러다 1940년 평양 근교에 있는 송산농사학원을 인수해 오전에는 학교를 열어 공부하고 오후에는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송산농사학원의 전원장이었던 김두혁의 항일운동으로 체포되어 또다시 1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두 번째의 옥고인 셈이다.

이어 1942년에는 선생이 창간에 참여한『 성서조선』이 일본의 탄압으로 폐간되고, 이어 1942년 3월호에 실린 글이 문제가 돼 발행인과 독자들 수십 명이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이때 함석헌 선생도 체포되어 또다시 1년을 복역하게 된다. 세 번째 수감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도 신념을 꺾을 수는 없었다. 1945년, 꿈에 그리던 광복이 되자 선생은 자유의 몸이 되어 용암포자치위원회 위원장과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또다시 체포되고 투옥되어 고문을 당했다. 당시 소련에 의해 촉발된 이 사건으로 많은 학생들이 희생되었고 민족주의 활동을 하던 인사들이탄압을 받았다.


이후 함석헌 선생은 1947년 가족들을 두고 홀로 남으로 내려와 평생 이산가족으로 살았다. 남한에서 선생은 여러 학교와 YMCA에서 성경강론을 하고, 여기저기에 사회비평적인 글을 쓰는 문필가로 활동했다. 그러다 다시 1958년,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고, 1961년 박정희의 5·16군사정변 직후부터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평생을 감옥을 드나들며 핍박을 받았지만 그 누구도, 그 어떤 정권도 선생의 신념과 강직함을 꺾지는 못했다. 선생의 복원성은 누구보다 더 강해, 핍박하면 할수록 그 복원성은 탄력을 더해 일어섰다.

동서양을 망라한 폭넓은 지식과 이해로 추출된 선생의 웅숭깊은 사상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한다. 거기에 역사의식을 더해 비로소 선생의 사상은 완성이 된다. 기독교정신이 씨알줄이라면 역사의식은 날줄이다. 기독교와 역사가 서로 교차보충하면서 선생의 사상을 완성한다.

김영호 인하대학교 명예교수는 함석헌 사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함석헌의 일자척인 관심사요, 사유의 주제는 종교다. 그의 사상 형성과 정에서 사유의 기조가 되는 것도 종교와 역사다. 종교가 초월적인 가치를 대표한다면 역사는 그 현실적인 전개에 해당한다. 역사의 발전은 종교가 상징하는 정신적 가치의 실현으로 측정된다. 그가 추구한 자기개혁, 사회개혁, 세계혁명의 원리는 종교에 바탕을 두고 역사가 가리키는 방향과 이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함석헌은 (역사철학자로 볼 측면도 있지만)무엇보다 종교 철학자다. 그는 정치나 교육 등 다른 모든 분야도 종교적 원리와 가치관에 근거해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함석헌 선생의 사상의 뼈대는 기독교다. 뿐만 아니라 함석헌 선생의 사상의 경계와 범위는 넓다. 공자와 맹자를 망라한 동양철학은 물론이고, 인도의 간디가 보여주었던 비폭력무저항을 지지하고 그 또한 실천수단으로 강조했다. 선생은 후일 인간개조와 인간혁명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교육을 지목했는데 그 역시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강조했다. 그 또한 기독교정신에 젖줄을 대고 있는데 아마도 선생의 의식 깊은 곳에는 인류를 위해 죽음을 택하신 예수의 모습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핍박과 저항은 선생의 전 생애를 통해 일상으로 굳어진 것이었지만 때문에 선생은 더 깊게 곰삭고, 더 큰 울림을 가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한쪽으로 편향되거나 매몰되지는 않는다. 선생의 일생을 통해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상들을 연령별로 나누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20~30대의 민족주의와 민중사상, 40~50대의 비폭력·평화사상과 종교다원주의, 세계주의와 60~80대의 ‘씨알’사상과 생명사상, 전체주의로 나눌 수가 있다. 특히 선생이 말년에 선보인 이 전체주의는 선생의 기독교적 사상이 응축된 것이나 다름없다. 선생의 전체주의에서 예수가 강조한 공생주의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자. 우리는 내 발등의 불부터 먼저 끄려고 서로서로 불똥을 떨다가 모든 발등이 다데버린 사람들입니다. 남을 다 제쳐버리고 나만, 이 나 하나만이 살아보려다가, 그 때문에 전체가 다 죽게 된 나라입니다. 생도 사도 전체에 있지, 결코 홀로 해결되는 문제 아닙니다. 무심한 꿀벌도 아는 진리를 우리가 몰라서 되겠습니까. 벌들은 왕봉을 절대 존중해도 먹을 것이 모자랄 때는 먹는 시간까지 같이 먹다 같이 죽지, 결코 먹을 것 부족하다 다툼질 나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공생과 같은 개념이다. 선생의 이 전체주의는 개인을 말살하는 전체주의가 아니다. 개인에서 전체로 나아가는 것이다. 개인, 즉 씨알이 건강해야 전체 역시 건강한 것이다.

“씨알들! 우리는 역사의 나중이요, 시작입니다. 자람, 새로남의 원리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5천년 역사는 우리의 우리 속에 들어있습니다. 이것이 또 미래, 영원한 역사의 태반입니다. 우리는 알들고 영글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홑알은 새끼를 까지 못합니다. 진리로 수정되지 못한 민족, 그것은 홑알로 낳다 죽은 외짝 봉황입니다. 불사의 진리를 가져야 불사조입니다.

여러분. 무조건 뭉쳐라, 복종해라 하는 독재자의 말에 속지 마십시오. 우리는 개성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가 돼야 하지만 그 하나는 분통에 들어가서 눌려서 꼭 같은 국숫발로 나오는 밀가루 반죽 같은 하나는 아닙니다. 우리의 하나는 개성으로 하는 하나입니다. 3천만 중에서 2,999만이 죽는 일이 있어도 남은 한 알 속에서 다시 전체를 찾고 살려낼수 있는,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 속에 하나가 있는 그러한 개성적인 하나입니다.”

이렇듯 선생은 전체를 강조했지만 전체 속의 개인 역시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함석헌 사상의 키워드는 비폭력저항과 기독사상과 전체주의이다. 함선헌 선생의 사상은 우리 사회에 전방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정치와 교육, 문화, 환경과 인간의 숨결이 미치는 곳에는 어김없이 선생의 반성과 지적이 있었다. 특히 선생은 교육을 강조했다. 그리고 비폭력저항은 혁명으로 이루어진 독재정권에 대한 무혈 저항이자, 올바름에 대한 수호였다. 하지만 선생은 자신만을 고집하지 않았다.


“여러분이 나를 잘못이라 생각하시거든 아낌없이 버리십시오. 그러나 만일 옳다 생각하시거든 같은 뜻으로 하나 되어 일어나십시오. 그리하여 이 민족의 운명이 달린 싸움에서 이기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이 정말 아무 사심없는 참으로 일어선다면 악의 세력은 틀림없이 무너질 것입니다. 또 지나간 날의 우리의 잘못에 대한 어쩔 수 없는 값으로 설혹 우리 눈으로 이김의 결과를 보지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역사의 죄인됨을 면하고 믿음을 가지고 기쁘게 죽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역사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살아서 종이 되는 것보다는 사람답게 국민답게 죽는 것이 훨씬 더 영광입니다.”


선생이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종이 되는 것보다 사람답게, 국민답게 죽는 것이 더 영광이라고 말하는 선생의 말씀이 서늘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지금도 선생의 사상은 유효하다. 전체보다는 개인의 중요성이 더주목받는 이때, 같이 죽고 같이 살자는 선생의 외침이 그 어떤 외침보다 더 맑게 들린다.

2017년, 우리는 길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무수히 많은 외침과 달콤한 말들이 마음과 생각을 어지럽힌다. 이런 때 씨알들을 깨우는 선생의 날카로운 소리가 북소리처럼 다시 울려 퍼졌으면 좋겠다.


글 은미희
S.CAS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