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말자 세월호 2014년 4월 16일 그날

2014년 4월 16일 나는 한국을 도보 국토 순례 여행 중이었다. 전국 일주를 거의 마무리 짓고 전북 일부 지방만 남겨놓은 상태였다. 이날 아침 숙소를 나서는데 TV에서 진도 앞바다에 여객선이 침몰했는데 타고 있던 학생들이 전원 구조되었다는 자막이 나타났다.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음 여행지를 향해 발길을 옮겼다. 종일 걷고 다시 모텔을 잡아 들어가니 TV 화면에 세월호가 선미만 남기고 물에 잠긴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아직 배 안에 3백 명 넘는 학생들이 있다는 말에 경악했다. 그러나 항공기 수십 대가 동원되고 구조 선박이 2백여 척이 동원되어 구조작업에 나섰다는 뉴스를 보고 속히 구조되기만 바라며 피곤한 몸을 눕혔다. 그날부터 사흘 동안은 걸으면서도 온통 물에 빠진 학생들 걱정에 도저히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4월 20일 나는 전북 함례에서 부활절 미사와 인근 성지를 둘러보았다. 이로써 나의 사순절 조국 국토순례도 일단 끝난 셈이다. 이제부터 귀국할 때까지는 그동안 놓쳤던 곳과 친지들을 찾아보는 것으로 일정을 잡으면 될 것 같았다. 계획했던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한 셈이기에 마음의 부담은 덜었으나 세월호가 발목을 잡는다. 그 비극의 현장에 동참하지 않고서는 이번 순례의 의미도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전주역에서 이번 도보 여행길에서 사귄 목포 김 선생께 전화했다. 내가 팽목항에 갈 뜻을 밝히자 선뜻 길라잡이를 자청하신다. 다음 날 아침 목포에서 그분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팽목항으로 향했다. 그분은 내 덕분에 희생자 가족들을 직접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며 오히려 고마워한다. 애초부터 가서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다만 화장실 청소를 하든 하다못해 쓰레기라도 치울 일이라도 있다면 무엇이든 자원봉사로 동참하고 싶었다.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는 부활 아침 예수님 부활하신 빈 무덤을 보고 놀라 달려간 여인들처럼 단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조되는 기적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사고가 난 지 닷새가 지났는데도 말이다.



팽목항에는 많은 경찰이 입구에서 출입을 제한하고 있었다. 허락을 얻어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수많은 관계기관과 사회단체들이 저마다 천막을 치고 활동하고 있어 소속된 단체가 없으면 개인 차원에서 봉사할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길이 없을까 궁리하는데 멀리 사제복 차림이 보인다. 반가워 달려가니 광주 대교구청 청소년 사목 국장 김관수 신부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수녀도 한 분 곁에 있었다. 내가 아무 일이라도 봉사하고 싶다고 하자 함께 기도하면서 가족들을 위로하는 것이 큰 봉사란다. 김 신부는 인근 천막으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에는 엠마오 여행을 이곳으로 택한 장흥 성당 신부와 신자들과 봉사하는 수녀 몇 분이 희생자 가족들과 미사를 시작하고 있었다. 성가도 없이 낮은 목소리로 진행된 차분하고 조용한 성제였다. 사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몸소 보여주신 우리들의 부활 신앙이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면서 참석자들을 위로했다. 우리는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눈물을 흘리며, 꼭 껴안아 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미사 후 잠시 만난 신부는 나에게 우리가 함께 아파하는 것 외에 무엇으로 그들을 위로할 수 있겠느냐며 광주 교구에서는 가족들이 모인 진도 체육관에도 천막을 치고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하고 있다며 관심과 기도를 당부했다.




이날 팽목항에서 만난 몇몇 희생자 가족들은 종일 거짓말만 되풀이하는 보도에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또한, 홍보용으로 현장을 방문하여 구조작업을 방해하고 공허한 말로 생색내는 정치인들에게도 분노했다. 오죽하면 현장을 방문한 국무총리가 물벼락을 맞는가 하면 대통령에게도 야유를 보냈겠는가.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한시라도 빨리 내 자식들을 꺼내달라는 것이었다. 사실 현장에서 보니 그동안 TV마다 24시간 특집으로 내보낸 세월호 보도가 많은 대부분 과장되고 터무니없는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불과 십 수 명이 작업하기도 어려운 현장에 잠수부 6백 명이 투입되었다느니 항공기 수 십 대와 선박 수 백 척이 동원되었느니 하는 보도들은 희생자 가족들의 염장을 지르는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정부로서는 구조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홍보하기 위해 모든 수치를 끌어모아 발표한 것이겠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유가족들은 팽목항 부두에 앉아 구조선이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구조선이 인양된 시신을 싣고 부두에 도착하면 우르르 달려가 시신을 확인하고 통곡과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게시판에는 신원이 확인된 사망자 명단이 기록되고 있었다. 무간지옥과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팽목항 방조제에 스님 한 분이 정좌한 채 독경도 잊고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파란 수평선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스님의 표정이 너무 처연해 옆으로 접근해보니 얼굴이 온통 눈물에 젖어있었다. 스님은 힘없이 목탁을 두드리다 또 멍하니 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긴 아수라가 판치는 무간지옥에서 염불인들 쉽게 나올 수 있을까. 문득 내 귀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는 수많은 단원고 학생들의 절규가 2천 년 전 헤로데가 학살한 무죄한 아기들의 울부짖음과 겹쳐 환청으로 들려왔다. 누가 이 아이들을 죽였나. 이 시대의 헤로데는 누구인가. 승객들을 버려두고 뺑소니친 승무원들인가.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무능한 정치인들일까. 괴물로 변해버린 사악한 자본인가. 아니면 인간성을 포기하고 물질만을 추구해 온 이 시대 우리가 모두 카르마일까. 먹먹하고 답답하기만 한 나의 시야에 누가 시작했는지 모를 구구절절 애간장을 녹이는 사연들이 빽빽이 쓰인 커다란 벽보판이 가득 들어왔다. “우리 모두가 너희들을 죽였다.” 수많은 의문과 복잡한 상념이 꼬리를 이어 답답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내내 아무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거의 3년 후 지난 1월 7일 밤 광화문 광장에서 스님 한 분이 소신공양의 길을 택했다. 그분은 세월호 참사와 일본군 위안부협정 등 박근혜 정권의 나무라고 퇴진을 요구하는 유서를 남겼다. 나는 신문에 그분이 세월호 침몰 당시 팽목항을 찾아 유가족들과 함께했었다는 보도를 보고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당시 내가 찍은 사진과 신문에 난 그분의 얼굴을 대조해 보았다. 그때보다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지만, 눈매며 기품 어린 모습이 그분이 틀림없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기어코 내 방에 들어가 꺼이꺼이 소리 내며 한참이나 통곡했다. 세월호는 지금까지도 많은 국민 내면의 트라우마로 자리 잡고 있다. 미수습자 아홉 분의 시신만이라도 인양되었으면 좋겠다.


S.CAS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