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진실입니다. 오로지 그것입니다.” ‘전환시대의 논리’ 리영희 선생

지난 32년의 ‘해방후사(解放後史)에 분명히 있으면서도 왜 그런지 사실대로 밝혀지지 않는 일, 진실되게 그 뜻이 해석되거나 이해되지 않은 일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가려져버린 채 거론되는 것이 막혀온 일들…… 이런 것이 오늘 우리의 생존의 ’내적 근거‘가 되어 있다. 맥락을 추려서 그것을 다시 캐내어 똑똑히 들여다보는 것이야말로 어려운 내일을 사는 지혜이고 용기라고 생각한다.(리영희 (2016년 1월15일『)우상과 이성』. 한길사. 26~27쪽.)



진실은 우리를 더욱 더 나은 세계로 안내한다. 진실이 힘을 발휘하고 제자리를 찾을 때 우리는 훨씬 풍요롭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진실은 여간해서는 지켜내기가 쉽지 않다. 다는 아니지만,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위선과 거짓과 가식으로 포장하고 나아가 더 큰 권력을 갖기 위해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 권모술 수에 능한 것이 바로 인간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그 권력을 대중을 위해 쓰지 않고 자신을 위해 썼을 때, 즉, 자신의 권력을 더 공고히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권력을 동원할 때 대중은 암흑의 수렁 속으로 빠지고 만다.


우리에게도 그런 암흑의 시대가 있었다. 불과 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폭압 속에서 자유를 제한당한 채 보여주는 것만 보고, 들려주는 것만 들을 수 있는 조작된 세상에서 살아야 했다. 한데 그 어둠 속에서 은폐된 진실의 장막을 걷고 올곧게 진실을 알리며,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다. 협잡과 밀약으로 세상이 혼탁할 때,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진실만을 좇아 움직인 사람, 바로 리영희 선생(1929년 12월 2일~2010년 12월 5일)이다.


선생은 “진실을 안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선생은 진실을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지난날을 상기하며 이렇게『 우상과 이성』의 서문에서 소회를 밝혔다. “오랫동안 주입되고 키워지고 굳어진 신념체계와 가치관이 자신의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괴로움의 고백이었고, 절대적인 것, 신성불가침의 것으로 믿고 있던 그 많은 우상의 알맹이를 알게 된 사람들에게는 그 잠을 깨는 괴로움을 준 것을 사과한다. 하지만 그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것에 대해 보람차다.” 그 괴로움의 고백은 선생이 힘들게 세상에 알린 진실이었고, 그 진실로 대중들의 몽매를 깬 것에 대한 사과였다. 선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차라리 진실을 몰랐다면 우리는 더 달콤한 꿈을 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희망과 비전은 사상누각일 뿐이며 허상이다.


옛말에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했는데, 기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는 펜(pen)이다. 펜은 진실을 전하기도 하고, 거짓의 성을 쌓기도 하지만 더 큰 힘을 발휘하는 쪽은 진실이다. 선생은 그 펜으로 서슬푸른 독재와 군정 속에서 세상의 진실을 지켜냈다. 선생은 1980년에 출판한『 우상과 이성』의 서문에서 글을 쓰는 유일한 목적은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을 추구하는 그것에서 시작되고 그것에 그친다”라고 했다. 게다가 “진실은 한 사람의 소유물일 수 없고, 이웃과 나누어야 할 생명인 까닭에 그것을 알리기 위해서는 글을 써야만했다”라고 고백하고, 그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이성의 행위”라고 고백했다. 진실을 말하는 것. 진실을 지키는 일. 그것은 자신의 목숨을 건 일이기도 했다. 독재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히려 준엄하게 비판하고 통렬하게 사실을 까발린 선생은 다양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만큼 선생은 사회의 여러 곳에 만연된 부조리와 부정을 목도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며, 그것들을 시대의 기록과 고발로 남겼다.



5·16 쿠데타 당시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던 선생은 모두가 침묵할 때 혁명의 부당성을 국내외에 알리기도 했다. 그렇게 선생의 절망과 증언이 있었기에 우리는 거대한 거짓과 위선에 가려있던 진실의 민낯들을 볼 수 있었다. 선생은 격동의 시대를 산 역사의 증인이기도 하다. 그것도 변방이 아니라 중심에서 치열하게 살고 투쟁해 왔다. 따라서 선생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는 많다. 통역장교, 언론인, 교수, 사회운동가. 선생의 살아온 이력만 보더라도 그 내공이 범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선생은 그렇게 격변기 소용돌이의 중심에서 낱낱이 그 진실을 들여다보고 글로써 세상에 알려왔다.


선생의 이력이 말해주는 것처럼 선생이 지나온 길도 예사롭지 않다. 선생은 유년시절에 일제강점기 시절을 겪었고, 더불어 청소년기 시절에는 전시동원체제의 강제노동에 동원되기도 했었다. 일제가 패망하고 난 뒤 혼탁한 사회에서 중학생들을 대상으로 야학을 운영하기도 했고, 이어 국립해양대학에 입학해, 우연히 여순사건을 목격하기도 했다.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한 뒤 안동 공립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다 유엔군 연락 장교단 모집’ 공고문을 보고 군 장교 후보생이 되었다. 이후 선생은 조선일보 기자로 취직해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고, 온갖 방해와 협박해도 불구하고 시위에 참여해 행동하고 실천하는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이어 선생은 1972년 1월 한양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조교수로 교단에 섰다가 1987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에서 교환교수로 한국사를 강의하였고, 이후 한겨레신문의 이사 및 논설위원으로 일했다. 기자 시절 선생에게 주어진 별칭은 ‘특종기자’였다. 선생은 두 번의 필화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한번은『 전환시대의 논리』를 출판한 후였고, 두 번째는 한겨레신문에 재직할 때 방북취재를 기획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선생은 모두 아홉 번의 연행과 함께 다섯 번의 기소 또는 기소유예, 총 1,012일 동안의 수감 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선생을 회유하거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나와 서대문형무소(구치소)의 만남은 무슨 잘못된 인연인지 언제나 영하 10도 이하의 혹한에서였다. 그런 탓인지 무악재 고갯마루에 비껴 서있는 우중충하고 음산한 서대문구 현저동 101번지를 회상하면 그 추위부터 생각난다. 하필이면 내가 갈 때마다 왜 그렇게 추웠는지, 세 번 모두 다 그랬다.(네 번째는 새로 옮긴 구치소였다.) 박정희 시대에 두 번, 전두환 시대에 한 번, 박정희 시대인 1964년과 77년, 전두환 정권 때인 94년, 해방 후 현대사에서 아마도 극악의 시대로 역사에 기록될 그 20년 사이에 세 번이나 그들에 의해 묶여 들어갔으니 적은 횟수가 아니다. 생각만 조금 고쳐먹으면 태평성세를 구가하면서 입신도 웬만큼은 누릴 수 있었을 터인데, 생각하면 나도꽤나 우직한 삶을 살아온 셈이다.

(리영희 (2016년 1월15일『) 우상과 이성』. 한길사. 53쪽.)



첫 수감 생활은『 전환시대의 논리』와 관련된 일련의 저작물들이 원인이 되었었다. 선생은 그 엄혹했던 그 시절『 전환시대의 논리』를 펴내고 반공법 위반혐의로 구속돼 2년의 형을 살았다. 선생이 두 번째로 서대문형무소에 들어갔을 때는 조선일보 정치부 외교 담당 기자였을 때였다. 선생은 알제리 수도 알제에서 열리는 아시아?아프리카 연대 기구(AA)외상회의에서 남북한 대표를 그해에 열릴 유엔총회에서 함께 초청하고, 유엔 동시 가입 제안을 검토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당시는 북한에 대한 모든 것은 금기사항이었고, 더욱이 남한과 북한을 동격으로 취급하는 것은 국가정책에 위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그 정보를 기사로 내보냈고, 반공법 위반으로 서대문 구치소에 연행되었다. 선생은 두 번째 옥고를 치를 당시를 이렇게 회고하며 글로 남겼다.


그해 겨울 감방 안에서는 동상에 걸린 열 개의 발가락에서 피를 짜내는 일이 일과가 되었다. 6.25전쟁 발발 때부터 최전방 전투지대에서 휴전조인을 맞이할 때까지 3년 반을 살았어도 동상에 걸려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정치작․사상적 이유로 처넣어진 자기정부의 시설 안에서 동상에 걸리니 어디에 하소연하겠는가. 나라를 잘못 타고 난 죄거나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죄를 한탄할 수밖에..

(리영희 (2016년 1월15일『) 우상과 이성』. 한길사. 60쪽)


당시 기온은 영하 14도였다. 한데 선생에게 주어진 수복은 홑겹의 여름 수복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선생의 정신을 흔들어놓거나 훼절시키지 못했다. 동료들이 협박에 못 이겨 전향할 때도 리영희 선생은 양심에 따라 살 것을 선택했다. 그래서 가난은 혹독했다. 하지만 그 가난이 선생을 비루하게 만들지 않았고, 가난했기에 그의 영혼은 더 맑을 수 있었다. 선생이 지켜내고자 했던 것은 진실이었고, 양심이었고, 정의였다. 정부의 통제 속에 진실이 은폐되고 부정부패가 사회를 지배할 때 양심에 따라 실천하는 지식인의 삶을 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소위 국가기밀이나 국가이익이라는 것이 민주사회의 국민을 시종일관 기만하는 정부체제와 세력에 의해서 이용될 때 그 집권자와 집권세력의 기만을 폭로하는 것 이상으로 애국적인 행위는 있을 수 없다. 지성인의 최고의 덕성은 인식과 실천을결부시킨다는 것이다.

(리영희 (2016년 11월10일『) 전환시대의 논리』. 창비. 26쪽)


그 진실과 양심과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는 어떠한 정파에도 속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팔지도 않았다. 특히 국가의 엄혹한 반공정책에 우리 모두가 레드 콤플렉스에 시달릴 때 선생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설파했다. 그 은유에 어떤 사람들은 통쾌해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를 격리했다.


좌’가 뭐고 ‘우’가 뭔고? ‘좌’는 절대로 나쁘고 ‘우’는 절대로 옳다는 전도된 사고방식은, 그런 위험하고 유치한 이분법의 대표적 신봉작인 레이건이라는 사람조차 이제는 부정하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중략- 인간보다 못한 금수의 하나인 새들조차 왼쪽 날갱화 오른쪽 날개를 아울러 가지고 시원스럽게 하늘을 날고 있지 않은가? 그것이 우주와 생물의 생존원리가아닐까?

(리영희 (2014년 6월30일『)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한길사. 24쪽)


어째서 이 나라에서는 인간말살의 범죄가 ‘공비’나 ‘빨갱이’라는 한마디로 이처럼 정당화 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그 후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은 내가 이데올로기의 광신(狂信) 사상과 휴머니즘에 대한 멸시를 깨쳐야겠다는 강렬한 사명감 같은 것을 느낀 계기가 되었다.

(리영희 (2005년 3월10일『) 분단을 넘어서』. 한길사. 274~275쪽.)


실제로 세계의 패권국인 미국이 가장 번영했을 때를 추적해보고 분석해보니 진보와 보수가 균형을 이룰 때였다는 보고가 있다. 이념의 균형이 무너지고 강요 때문에 한쪽이 전체를 지배할 때 세상은 오히려 부조리와 억압을 낳고 또 다른 폭력을 배태하며 사회발전은 물론 경제발전 또한 역행하는 것이다.


『뉴욕타임즈』대 정부의 소송사건이 언론의 승리로 끝나고 그 충격을 완화하려는듯 닉슨의 중공방문이 발표되었을 때 오웬 라티모어 박사는 미국의 30년에 걸친 불행은 매카시즘의 반지성주의 때문이라고 한마디로 진단했다. -중략- 그는 1950 년대 매카시즘의 공포분위기와 사상통제라는 반지성주의가 미국국민의 창조력과 자유를 철저하게 위축시킨 탓에 정부화 학계와 여론지도층에는 거의 어용적 성격의 지식인만이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민주주의는 자체가 ‘적극적 개념’이며 창조적 상상력이다. 반공주의란 부정(否定)의 개념이며 그것 자체로서 소모적이며 파괴적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중략- 라티모어 박사는 매카시즘이 미국이 세계에 자랑할모든 가치와 전통을 철저하게 짓밟았다고 항의한다. 그 자신도 매카시즘의 희생자의 한 사람이다.

(리영희 (2016년 11월10일『) 전환시대의 논리』. 창비. 35쪽.)


선생의 폭로와 외침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그리고 글을 관통하는 선생의 식견과 세상에 대한 이해는 사람들이 새로운 비판의 기준을 제시했다. 선생이 펴낸『 전환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 등 일련의 책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당시의 상황과 형편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근거가 되고 있다. 모든 진실이 은폐되고 통제되는 혼탁한 사회에 양심을 지키고 진실을 좇는 지식인 있었다는 사실은 그래도 사회가 아직 살아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그런 선생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과 같은 민주주의를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다. 리영희 선생의 일생은 진실과의 투쟁이었고, 혼탁한 시대의 등불이었다. 선생이 소망하는 상식이 지배하는 세상을 기대해본다.


한달 동안 신문에 반영된 이 사회를 생각하면서 느끼는 것은 하루 속히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되어야겠다는 절실한 희망이다. 영국의 정치에는 그렇게 많고 심오한 이론이 동원되질 않는다고 한다. 이론으로 안 될 때는 상식에 맞는 것이 영국 국민의 지혜이고 생활경험이다. 상식이란 무엇인가. 소박한 민중이 까다로운 이론 조작․설득․세뇌 노력없이 오랜 생활경험으로 옳거나 그르거나를 판단하는 바로 그것이다.

(리영희 (2016년 1월15『) 우상과 이성』. 한길사. 97쪽.)


글 은미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