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례 수필집 ‘가난한 부자’ 중에서 미국 거지

2018-04-23

조현례 수필집 ‘가난한 부자’ 중에서 미국 거지

어떨 때 옷장에 들어가 보면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옷이 너무 많은 것처럼 보인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린다. “죽을 때까지 입어도 되겠다. 절대로 옷은 사지 말아야지.” 그런데 어는 날엔 그런 생각을 까맣게 잊는다. 건망증 때문이 아니다. “이렇게 마땅한 옷이 없을 줄이야!”

옷가게 가서 훑어보듯 빽빽하게 걸려 있는 옷들을 뒤적거려 본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빨리 나가야 할 경우 결국은 가장 손쉽게 늘 즐겨 입는 옷을 들쳐 입고 나가게 된다.

“엄마! 일 년 내내 한 번도 안 입은 옷은 엄마가 싫어하는 옷이니까 버려요.”

옷걸이가 휘어질 듯한 걸 보며 큰딸이 벌써 몇 번째 뱉어 놓은 말이다. 그런데 왜 못 버리는 걸까? 아까워서? 미련이 있어서? 아니면 시큐리티 블랭케트처럼 끈끈한 정이 있어서란 말인가. 나이가 들면 무엇이든 버리지 못하는 하찮은 것들에 대해 집착하는 습성이 있어서일까?

한두 해 전쯤 되었을까? 뉴저지에 있는 양품점엘 갔을 때다. 꽤 유행 감각이 있어 보이는, 나보다는 5, 6년가량 젊은 여자가 주인이었다. 나는 우리보다 훨씬 젊은 후배와 함께였다. 내가 명품 옷을 입지도 들지도 않았는데 가난해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성질이 퍽 급해서였을까? 나한테 어울릴만한 옷을 보여주며 권유도 해보지 않고 다짜고짜로 “사모님 연세에 있는 분들도 돈이 있으셔도 1,000불 이상짜리 옷은 덜컹 못 사시지요.” 하는 거였다. 장사를 할 건지 지레 안 살 거라고 점을 친 건지 내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우리는 젊었을 때 전쟁을 치른 세대가 아닙니까?” 하는 거였다.

하기야 내가 1,000불 이상짜리 비싼 옷을 입고 또 비싼 핸드백을 들고 다니면 동네 개도 웃을 것만 같다. 그런 눈에 뜨이는 고급 옷을 입으면 친구들을 만나도 나 자신이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허심탄회하게 친구와 눈을 맞추며 대화를 나눌 수 없지 않을까. 도대체 그런 값비싼 옷을 사준다 해도 입고 갈 데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람들은 고작 결혼식이나 교회에 갈 때 가장 화려한 옷을 입는 것 같다. 어떤 이는 장례식에 갈 때도 그 빛깔이 검은색이라는 이유 하나를 내세우며 감히 비싼 옷을 과시한다.

돈이 억수로 많은데 어쩌겠는가. 가령 남이 절대로 쫓아올 수는 없는 값비싼 옷을 입고 교회에 나타난다고 상상해보자. 교회는 성스러운 곳인 동시에 자유로운 곳이니까. 그런 사람은 자신이 온갖 부러움과 선망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다고 착각할지 모르나 실은 그 시선이야말로 자신이 얼마나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런지.

한국에서는 지금 내가 떠나온 30년 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부유하게 사는 것 같다. 슈퍼마켓에 반찬거리를 사러 가면서도 천여 불이 넘는 옷차림이란다. 며칠 있으면 서울에 간다고 설레는 마음을 감출 길이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 씁쓸한 뿐이다. 나는 또 진바지에 편한 잠바를 입고 갈 판인데 ‘미국 거지’라고 흉을 봐도 할 수 없다. 나는 내 수준에 맞는 편한 옷차림과 오래 신어서 길들 편한 신발에 족하고 좋은데야 어찌하랴.


글 조현례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