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을 귀하고 아름답게 도나플로르 한율 원장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들 한다. 그렇다면 얼굴의 완성을 좌우하는 가장 큰 요인은 뭘까? 아마 헤어스타일이 아닐까 싶다. 헤어스타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같은 얼굴이 더 예뻐 보이기도 하고 더 어려 보이기도 한다. 헤어스타일만 조금 바꿔도 이미지가 확 달라진다. 그런데 내 이미지에 꼭 맞고 마음에 쏙 들게 머리를 만져주는 미용실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이 미용실, 저 미용실 기웃거리고 지나가다가 손님 좀 많아 보이면 들어가보기도 한다.

취향도 다양하고 변화도 빠른 요즘, 미용실 입장에서도 단골을 확보하기가 여간 쉽지 않다. 하지만 여기 단골만으로 20년 가까이를 굳건히 버텨온 미용실이 있다. 손님을 귀하고 아름답게 여기고 저마다 꼭 맞는 헤어스타일을 찾아주는 도나플로르의 한율 원장. 그의 손끝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Q. 반갑습니다. 우선 미용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군 제대를 얼마 앞둔 어느 날 TV를 보다가 역사가 시작됐죠. 한 사람이 미용사 일에 도전해서 경험해보는 프로그램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일 하다가 원장에게 꾸중을 듣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 일은 도전하고 성취하는 직업이다. 저 일을 해보고 싶다’라고요. 좀 특이하죠?
 


Q. TV를 보다가 직업을 선택하게 되었다니 특이하긴 하네요. 도나플로르가 예약제로 운영된다고 들었는데, 처음부터 쉽지는 않으셨을 것 같아요.
대구에 자리 잡고 2007년에 처음 오픈했을 당시만 해도 예약제 미용실은 대구 정서상 생소한 시스템이었어요. 하루는 지나가던 손님이 들어오셔서 머리를 해달라고 하셨는데 저희가 예약 없이는 안 된다고 거절했죠. 그랬더니 “손님이 없는데 왜 안 되느냐”며 화를 내셨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우리 매장만의 확고한 콘셉트가 있었고 저는 이것을 지키고 싶었어요. 그래서 끝까지 거절했죠. 이것이 거부감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만 일종의 신비주의 전략일 수도 있겠죠. 그리고 예외를 두긴 싫었어요. 그래도 알음알음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단골이 서서히 확보가 되면서 지금은 예약제 시스템이 확실히 자리를 잡았죠. 현재도 예약제로 운영하는 미용실은 전체의 20% 정도 밖에 안 될 겁니다. 그만큼 확고한 철학이 없다면 쉽지 않은 시스템이 아닌가 싶어요.
 


Q. 처음 일을 시작하신 곳은 대구였는데, 서울에서 먼저 크게 성공을 하셨다고 들었어요.
처음 미용 일을 막 시작한 곳은 대구였어요. 그러다 2000년에 서울 청담동으로 올라갔어요. 하지만 처음엔 실망만 가득 하고 내려옵니다. 당시엔 뭔가 나와 맞지 않는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대구에서 다시 일을 하다 보니 계속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때 느꼈죠.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내 시야가 좁았던 것이었구나 하고요. 그래서 1년 후 쯤 다시 서울로 갔습니다. 청담동에서 3년 정도 근무했는데요. 지금까지 제 중요한 경험 중 8할이 청담동에서의 경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 인생의 터닝포인트 였다고 할 수 있죠. 제 목표를 설정한 곳이기도 하고요.

Q. 특이한 이력이 있으시던데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참여하셨다고요? 쉽게 해보지 못할 경험인 것 같은데요.
그렇죠. 당시 일하던 미용실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출연 배우들 헤어스타일을 맡게 되었어요. 그때 저도 현장에 투입되어 배우들의 머리를 만졌죠. 영화배우 원빈과도 그때 인연을 맺게 되었어요. 일이 다 끝나고 숙소에서 다 같이 모여 축구 게임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하루는 원빈의 집에서 영화배우 강동원과 함께 같이 게임을 하기도 했었어요. 원빈과는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데요. 한 번씩 대구에 오면 다녀간다며 연락이 오곤 합니다.


Q. 정말 꿈같은 이야기네요. 그런데 한창 잘 나가던 때에 또 다시 다 접고 유학 결심을 하셨다고요?
저는 목표가 생기면 저지르는 스타일입니다. 스스로 후회하기 싫어서지요. 영국 캔터베리칼리지스쿨에 등록해 1년 정도 유학생활을 했어요. 어릴 때부터 영국은 가보고 싶었던 곳입니다. 마침 기회도 생겼고요. 지금은 아니지만 우리나라는 한 때 ‘할 일 없으면 기술이나 배워라’며 미용 일을 하등시하는 인식이 있었죠. 그런데 영국은 그게 아니었거든요.

명문대를 나온 헤어디자이너도 많았을 만큼 헤어디자이너에 대한 인식이 좋았죠. 그것도 부러웠고요. 저도 커리어 좋은 헤어디자이너가 되고 싶었어요. 유학생활 동안 영국에서도 많은 걸 배웠고 제 시야도 더 넓어졌어요.


Q. 서울에서 성공했고 영국에서 유학도 하셨는데 서울이나 영국이 아닌 다시 대구로 돌아오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애초에 서울이든 영국이든 살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어요. 그곳은 도전하는 곳이었죠. 저는 대구에서 저의 목표를 실천하고 싶었어요. 미약하겠지만 대구의 미용 수준을 업그레이드하는 게 꿈이었어요. 그리고 현재 미용협동조합에서 후배들을 양성하고 있습니다. 미용실 디자이너들을 상대로 그들의 스킬을 높여주는 강의를 매주 수요일마다 봉사형식으로 하고 있어요. 맞춤교육이라고나 할까요?


Q. 정말 바쁘게 살고 계시네요. 힘든 적도 많으셨을 거 같은데,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한참 힘들 때가 있었죠. 기술자와 경영자 두 포지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게 정말 어려웠어요.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죠. 그럴 땐 혼자 카페에 가서 책 한권을 다 읽을 때까지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책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거 같았거든요. 자기계발서나 중국 고전 등 다양한 책을 읽었던 거 같아요.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책이 거의 같은 지점에 포인트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어요. 그러면서 제 시야도 달라진 거 같고 내려놓는 법도 배웠죠. 안달내지 않고 길게 보자는 생각도 하게 됐어요. 그러다보니 여유를 찾게 되고 기존의 제 방법에 확신도 생겼죠.
최근 경기가 좋지 않다보니 주변에 다른 상가들이 자주 바뀌기도 하고 저녁 일찍 문을 닫기도 했어요. 미용업계도 경기를 많이 타는 업종 중 하나죠. 그러던 중 한 손님이 들어오시더니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이 미용실만 가게가 바뀌지도 않고 늦은 시간까지 불이 켜진 것을 보고 믿음이 생겨 들어와보았다” 하고요. 그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았죠. 아, 내 방법에 확신을 갖고 끝까지 끌고 갈 수 있겠다 하는 믿음도 생겼고요.


Q. 마지막으로 물을게요. 앞으로의 계획이 있으시다면 무엇인가요?
대구의 랜드마크가 되는 미용실을 만들고 싶어요. 그렇다고 프랜차이즈를 만들 생각은 없어요. 프랜차이즈는 각 매장이 가지는 색깔이 희석되고 이름만 빌리게 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저는 우리 매장만의 색깔을 끝까지 지키고 싶어요. 그래서 대구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그런 색깔 있는 미용실을 만들고 싶습니다. 앞으로 갈 길이 멀죠? 안달내지 않고 지금처럼 꾸준히 하면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S.CAS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