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의 거리 대구 종로의 재발견

화교의 거리 대구 종로의 재발견

종로라는 이름은 과거 그곳을 종을 달아놓은 누각이 있었기 때문에 생겼다


대구 읍성이 허물어지기 전만 해도 현재의 반월당 금융플라자와 동아백화점 쇼핑점 사이로 난 길과 약전골목이 교차하는 곳에 영남제일관이 자리했었다. 그 자리에 종로가 있었는데, 종로 앞에서 경상감영 쪽으로 직선으로 뻗은 길을 종로라고 부른 것이다. 영남제일관에서 경상감영까지 이어지는 비교적 넓고 곧은길인 종로는 구한 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글.사진 에스카사 편집부)


사실 ‘종로’하면 서울을 가장 먼저 떠올리기 마련이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서울 종로 또한 생긴 기원이 대구와 같다. 서울의 종로는 지금의 종로 1가에 도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각을 알려주기 위해 큰 종을 달았던 종로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


계절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밤 10시가 되면 종로에서 28번의 종을 울려 4대문을 닫고 외부와의 통행을 막았다고 한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되면 33번의 종을 쳐서 통금을 풀고 4대문을 열었다고 한다. 대구의 경우 종로와 관련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이 밖에 종로는 경기도 수원시와 북한 평양시에도 있다.


대구 종로는 ‘화교 거리’라고도 불려진다. 우리나라 개화기 때 중국 화교들이 이곳에 많이 거주했기 때문이다. 대구에 화교들이 정착한 것은 1905년부터이다. 1904년 경부선 철로가 생기면서 대구는 큰 도시로 거듭나기 시작했고, 화교들에게는 기회의 땅이었다. 세계 각지로 이주한 화교들은 주로 상업에 종사했기 때문에 도시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1900년대 초 대구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은 서문로와 북성로, 포정동 일대였는데 이미 일본 상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종로는 서문시장과 가깝고 약령시가 열린 남성로와 바로 붙어 있기 때문에 화교들에게 정착하기 좋은 땅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화교들 가운데는 장사꾼 말고도 건축가들도 많았다. 당시 조선에는 서양 건축 기술이 없었다. 서양 문물이 빠르게 들어올 그 무렵 서양 건축 기술을 가진 중국인들이 대구에 대거 들어와 초가집을 밀어내고 벽돌집을 쌓아 올렸다. 중국 산둥반도 출신 건축기술자 ‘강의관’과 그의 제자 ‘모문금’, ‘타향록’이 대구에 정착했다. 이들은 남산동 천주교 대구교구 인근에 살면서 주교관과 신학교, 수녀원 등 가톨릭 건축물들을 지었다. 일제시대 붉은 벽돌을 쌓아올려 지은 건물들은 대부분 이들 화교 건축가들의 솜씨이다.


종로에는 지금도 이들이 지은 건물들이 많이 남아있다. 화교소학교와 중학교가 그 때 지어졌고, 소학교 맞은편에 있는 화교협회 건물도 그렇다. 화교협회 건물은 1925년 대구 부자 서병국이 살림집으로 쓰려고 화교 건축기술자들에게 요청해지었다. 그런데 서병국은 1946년 콜레라에 걸려 사망했다. 대구 최초의 콜레라 환자로 기록이 남아 있다.


서울에 갔다가 대구로 내려오는 열차 안에서 먹은 김밥이 탈나서 병을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서병국의 사망 후 가족들은 건물과 일대 부지를 팔기를 원했다. 화교 모문금씨가 대구화교협회를 설득해 1949년 건물과 주변 부지를 사들였고, 지금까지 화교협회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후 화교협회는 협회 건물 앞에 화교학교까지 짓게 되었다.

1934년 조선총독부가 화교입국 제한조치를 내리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우 리나라에서 화교 인구가 다소 감소했다. 그러나 미 군정기 때 화교들이 연합국 국민으로 우대받으면서 우리나라 정착 인구가 다시 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전쟁 당시 서울과 인천에 거주하던 화교들이 대구에 내려오면서 대구의 화교 인구는 5천 명까지 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 화교들이 경제력이 막강해지면서 자국민들이 피해를 입는다는 인식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가 화교들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등 배타 정책을 펼치면서 많은 화교들이 대만과 미국, 호주 등지로 이주했다.


6.25 전쟁이 끝나고 1950년대 후반 종로에는 가구상들이 많이 모였다. 그래서 지금도 나이 든 어르신들 사이에는 종로하면 가구 골목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지금은 가구상들이 대부분 사라졌다. 드문드문 한 두 군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과거 가구상들과 함께 많이 들어선 것은 금고상들이다. 1970년대 대구시내 금고상들이 대부분 종로에 다 모였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만경관 쪽 종로 입구에 금고 가게가 즐비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대부분 사라지고 현재 5개 정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신용카드 사용이 보편화하면서 집집마다 가게마다 현금을 쌓아둘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구의 한복판에 자리한 종로는 굴곡진 대구 근대사를 품에 안고 있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골목인 만큼 시대에 따라 변하고 또 변한다. 지금의 종로 또한 변하고 있다. 대구 근대골목이 유명해지면서 근대골목 코스 중 한 곳인 종로가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나이든 사람들이 과거를 추억하면서 찾는 곳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다면, 요즘은 젊은이의 거리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젊은이들을 사로잡을만한 예쁜 카페와 세련된 음식점들이 계속 생기고 있고, 해가 져도 불야성을 이룬다. 동성로에서 모임을 갖던 대학생들도 도심 주변에서 회식을 갖던 직장인들도 저녁이면 종로로 모여든다. 종로가 한층 젊어지고 있다. 종로가 이렇게 떠들썩하게 변할 줄 10년 전에는 상상할 수 있었을까.


대구 근대의 모습 그대로 가진 채 현대의 옷을 입고 있는 화교의 거리 대구 종로. 시대상을 반영해 유기적으로 변하는 골목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


글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