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인의 아내로 미국에 사는 한국 엄마 홍정연(세번째 이야기) 나도 생선 몸통 먹고 싶단 말이야!

파키스탄인의 아내로 미국에 사는 한국 엄마 홍정연(세번째 이야기) 나도 생선 몸통 먹고 싶단 말이야!

스물여덟이 되던 해에 나는 결혼을 했다. 친할머니는 나이 스물여덟에 할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되셨다. 어렸을 땐 그러려니 했는데 할머니는 참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셨다. 그런 할머니에게 열녀상이 내려졌고 고향 어귀엔 홍살문이 세워졌다. 성리학 중심의 교육을 받은 난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군상들의 삶을 접하면서 그 열녀상이 할머니가 칠순에 돌아가시기까지 끊기 어려운 족쇄임을 알게되었다. 친할아버지는 일제시대에 한량으로 지내다 해방 직후에 나름의 뜻을 펼치고자 경찰이 되셨다. 한국전쟁 중엔 군인 가족이라 몰살을 당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으나 평소에 이웃들과 돈독히 지냈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다 전쟁이 끝나고 지리산에 잔류한 빨치산 소탕 임무를 수행하던 중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다. 

지금도 정복을 입은 젊은 할아버지의 바랜 사진을 멍하니 바라보시던 할머니가 떠오른다. 황망하게 할아버지를 잃고 방황하던 어린 아버지는 홀로 서울 친척 집에 오게 되었다. 마음을 잡지 못하여 말썽을 피우고 있던 차에 법대를 다니던 사촌 형이 사법고시에 합격하자 아버지도 공부에 매진하게 되었다. 혼자되신 할머니가 친척 일을 봐주면서 뒷바라지를 하였으니 그 살림이 넉넉하지 못하였기에 철도고등학교에 진학을 하였다. 철도 고등학교는 학비를 국가에서 지급하여 가난하지만 똑똑한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그만큼 경쟁률도 높았다. 자신감을 얻은 아버지는 세무 공무원이 되었고 야간 대학을 다니면서 누구보다 빠른 승진을하며 공직생활 20년을 보내시고, 회계세무사 자격을 취득한 후엔 자수성가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장학재단을 만들어 가난한 학생들을 돕는것이 꿈이라고 늘 말씀하셨다. 그리고 두 번째 꿈은 다섯 자식 모두를 4년제 대학에 보내는 것이라고 했었는데 홍 씨 문중의 기금으로 장학제도를 마련하여 근로학생들을 도왔고 우리 오 형제 모두 대학진학을 하였으니 그 꿈을 어느 정도는 이루어 내셨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우리 다섯 형제가 그 어떤 재산보다 값지다고 여전히 말씀하신다.



우리 집은 제사를 6대까지 지낸다. 일년으로 치면 추석, 대보름, 설을 제하고도 한 달에 한번 꼴로 제사음식을 차린다. 엄마가 시집 올 때는 매일 부뚜막에 정한수를 떠 놓았고 삼월 삼짓날엔 목욕제계 후 할머니와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4대 독자인 아버지를 부처님의 은공으로 낳았다고 믿으신 할머니는 구복신앙을 추종하였고, 아버지는 선대가 대대로 단명을 하여 후손이 어렵다 여기셨는지 제사에 대하여 철저하셨다.

외며느리인 어머니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기엔 무리가 따랐기에 어려서부터 우리 오 형제는 제사음식 만드는데 총동원되었다. 제사를 지내야 하니 배가 고프고 졸려도 기름진 맛 난 음식 먹기만을 고대하며 기다리기 일쑤였다. 제사를 중시하고 자손이 귀하다 보니 할머니는 장손인 오빠를 특별히 사랑하셨다. 생선이나 고기반찬이 나올 때면 몰래 숨겼다 오빠만 주시곤 했다. 나는 “왜 오빠만 주는데? 나도 생선 몸통먹고 싶단 말이야!” 하고 대들다가 부지깽이로 된통 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고분고분 한 성격이 아닌 데다 남녀평등을 부르짖던 나는 불합리하다는 판단이 들면 오빠에게도 대들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강했던 할머니와 엄마는 그런 날 매로 다스렸고 자존심이 강한 나는 악발이가 되어갔다. 게다가 동네 아이들이 동생들을 괴롭히면 집까지 쫓아가 남자애든 여자애든 혼꾸멍을 내주곤 해서 동네에도 소문이 자자했다. 초등학교 1학년 계집아이는 동네 아이들 흔들리는 이빨도 야무지게 잘 빼줬다. 치과의사는 오빠가 됐는데 소질은 내가 있지 않았을까?


젖이 말라 모유도 제대로 못 먹은 데다 오빠에게 치여 그랬는지 어렸을 때 나는 얼굴이 누렇고 몸매는 깡말랐다. 어느 날 이모 할머니가 내 몰골을 보시곤 애가 죽을 것 같다고 해서 그 길로 나를 본인 시골집에 데리고 가셨다. 당시 고등학생인 고모는 날 탐탁해서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가 가끔 고모의 교련 모자를 슬쩍 해서 동네 아이들한테 자랑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나의 개구쟁이 짓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하루는 이모할아버지가 곰방대로 빠금 빠금 연기를 내뿜는 게 신기하여 따라 해보고 싶었다. 근데 낮잠을 주무실 때도 그 곰방대는 항상 할아버지 손에 쥐어있어 감히 손도 못 대고 있었다. 

호시 탐탐 기회를 엿보던 나는 차선책을 마련했다. 지푸라기 맨 위쪽이 빨대같이 길게 생겨얼추 불을 붙이면 곰방대 역할을 할 거 같았다. 짚을 쌓아둔 헛간에서 불을 붙이고 빨아 보니 눈앞이 찡하니 코가 메케해서 그만 피던 지푸라기를 떨어뜨려 불이 났다. 다행히 이모할머니가 마당에 계시다 바로 발견해서 큰불은 나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이모 할머니는 이 얘기를 돌아가실 때까지 나를 볼 때마다 하셨는데 얼마나 가슴을 쓸어 냈으면 그러셨을까 싶어 지금도 죄송할 따름이다.


나의 이런 호기심은 미국에 와서 제대로 발휘하였는데 영어도 변변하게 못 하면서 낯선 사람에게 “Hello” 하고 말 걸기 일쑤였다. 알면서도 “Would you tell me how to go to the Macy?”를 주야장천 잘할 때까지 맨해튼 길거리에서 물어보고 다녔다 눈떠서 잘 때까지 라디오나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뉴스와 soap opera를 보고는 연습을 한답시고 커피숖이나 쇼핑몰에 가서 말하는 연습을 했다. 

병원에서는 시간이 날 때 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대화하면서 전날 공부한 문장들을 말하곤했다. 그렇게 3개월쯤에 한두 개 들리던 단어가 숙어로 들리기 시작했고 6개월 지나니 통 문장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1년이 지난 후에는 두려움이 사라지고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리고 미국에 온 지 2년쯤에 동생이 방문하였는데 영어로 잠꼬대를 한다고 넌지시 알려주었다. 예전의 말라깽이 꼬맹이가 뉴욕의 한복판에 당당히 서게 된 것이다. (연재는 다음호로 이어집니다.)


글 홍정연 미국전문 간호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