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2) 낯선 환경, 새로운 삶

글을 쓴다는 건, 자기 생각과 감정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일입니다. 지금까지 써 왔던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를 주제로 진솔한 글쓰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연재는 아빠가 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남에게 나를 표현하기가 쉽지 않지만, 딸에게 아빠의 살아온 삶을 말해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찌 보면, 딸이라는 듣는이를 잠깐 빌려 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삶은 이야기를 써 내려 가는 것이기에, 기억을 모아보면 몇 권의 스토리 북이 됩니다. 독자는 스토리텔링을 통해서 한 사람의 살아온 삶을 만나고, 경험을 공유하게 됩니다. 이야기를 이해하고 의미를 찾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 될 것입니다.


몇 년 전 다녀온 시골집 기억나지? 지금은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4차선 도로가 시원하게 깔려서 살기가 편리한 곳이 되었단다. 원래 그 집은 아빠의 외할아버지가 살던 곳이었어. 아랫동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마루에 자리 잡고 있는 큰 기와집이었지. 서울에서 혼자 아이를 낳아 고생하고 있는 큰딸이 안쓰러웠는지 외할아버지가 내 엄마와 나를 시골집에 내려오게 했던 거야. 태어나서 생전 처음 살던 곳을 떠나 새롭게 정착한 곳이란다.


외할아버지는 서산에서 큰 배를 3척을 가지고 있고, 수만 평의 땅을 소유한 부잣집 장남이었어. 요즘 흔히 말하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분이지.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집안 형편은 넉넉한 편이었어. 그런데 사람이 너무 좋아서 남의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재산을 많이 탕진했단다. 남은 거라고는 집과 주변에 있는 땅 몇 마지기밖에 없게 되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이 따뜻하고 정이 많은 분이었단다. 성격이 우유부단한 나머지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서 정작 자기 식구들을 큰 어려움에 빠뜨리긴 했지만 말이야.


내가 돌이 막 지날 무렵 엄마와 함께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시골집에서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어.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된 엄마도 몸과 마음의 안정을 많이 찾았단다. 나도 처음으로 엄마가 아닌 다른 가족들과 생활을 하게 되었어. 외삼촌과 이모들 등에 업혀서 사랑을 많이 받던 때였지. 집안 전체에서 아이가 나 혼자다 보니 관심과 귀여움을 많이 받았어. 사는 게 그리 넉넉하진 않았지만, 가족이라는 게 생기다보니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안정감 있는 하루하루를 보낼 수가 있었단다. 아이가 영아기일 때 잘 성장하려면 애착이라는 게 매우 중요하거든. 내주변에 그런 애착과 관심을 둬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주 낯선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단다. 외할아버지가 엄마를 이웃 동네에서 남자아이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던 분에게 시집을 보낸 거야. 엄마도 내가 딸려 있다 보니 총각과 새로 결혼하기는 어려웠을 거야. 내가 없었으면 훨씬 나은 인생을 살 수 있었을텐데.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연애도 해 보고 가정을 꾸려서 사랑받으며 살지 않았을까?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 한 번도 만나보지도 않은 홀아비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던 거야. 사실, 엄마는 결혼식도 제대로 못 하시고 다음 날 그 집에 가서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신 거야. 아마 외할아버지의 강요였겠지. 그 시절에는 이런 일이 많았단다.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고 결혼을 하거나, 집안끼리 서로 정혼을 하는 일들이 아주 빈번하게 있었던 때였어. 시집가기 전날 밤, 엄마는 말 없이 혼자 우셨다고 하더라.

다행히 새로 만난 아빠는 말씀이 별로 없는 분이었지만 나를 차별하진 않았단다. 시골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초가집에서 자기 땅은 한평도 갖지 못한 가난한 소작 농군이셨어. 집안이 어려워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다 그만두시고, 내내 시골에서 농사만 지으며 살던 분이야. 초등학교 성적표를 가끔 보여주시곤 했는데, 늘 반에서 일 등을 도맡아하던 수재였지. 집안 형편이 어려운 나머지 월사금(초등학교 등록금)을 내지 못해서 학교를 계속 다니지 못하신 거야. 그때 함께 공부했던 분은 서울대학교 법대에 가서, 사법고시도 합격하고, 나중에 국회의원도 하셨다고 하더라. 아빠가 공부를 하지 못한 아쉬움이 늘 있지 않았을까 싶어. 나도 아쉽기도 하고. 아빠가 공부를 많이 하셔서 출세한 분이었다면, 나도 유복하게 살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랬더라면 아마 나와 엄마를 만나지 않으셨을 거야.


부모님은 열심히 일하셨지만, 집에는 돈이 별로 없었어. 자기 농사를 지어야 추수한 곡물을 다 팔아서 돈을 마련할 수 있지. 그런데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다 보니 수확을 해도 반 이상을 땅 주인에게 주어야 했어. 그러니 별로 남는 게 없는 거야.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참 힘든 일이야. 더군다나 하루하루 먹을 양식마저도 넉넉하지 않았으니 사는 게 많이 힘이 부치셨을 거야. 어떤 사람들은 그냥 땅을 많이 가지고 있어서 일하지 않고도 많은 곡식을 받아서 부유하게 살고 있는데, 일은 혼자 다 하고 정작 쥐꼬리만큼의 대가를 받는다는것이 좋을 리가 없지. 그래도 남과 비교하진 않으셨어. 주변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았거든. 누구 하나 더 잘난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고, 그저 순박하게 운명과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며 열심히 사신 거지.


내가 살던 곳은 충남 서산군 성연면 오사리 2구 모식골 458-2번지란다. 아주 깊은 산 속이었어. 원래 공식 번지수가 있었지만, 편지봉투에 꼭 모식골이라는 지명을 붙여서 썼단다. 번지수를 몰라도 “모식골 삽니다”하면 주변 동네 사람들이 어디 사는지 다 알곤 했지.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작은 마을이었어. 조금 큰 아랫마을에 가려면 한참을 걸어 내려가야 했단다. 전기도 없이 집 네 채가 오손도손 모여 있었어. 주변은 온통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큰 마을로 내려가는 작은 길이 하나 나 있고, 밭길 옆으로 작은 개천이 흐르던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었어. 밤에는 산짐승 우는 소리가 들려오고, 하늘은 맑은 별로 가득 차있었지. 아침에 일어나면 뽀얀 안개가 골짜기에 가득하고, 큰소리로 외치면 산들이 메아리로 응답해주었단다.


온종일 힘든 농사일을 마치면 큰 가마솥에 솔가지와 장작불로 밥을 짓고 국을 끓였지. 작은 석유풍로로 밭에서 따온 호박과 가지로 밑반찬을 만들고, 커다란 아궁이에 고구마와 감자를 구워 부족한 배를 채웠어. 쌀이 귀하다 보니 보리를 많이 넣어 밥을 짓곤 했는데, 아빠와 나는 특별대접을 받았어. 엄마는 보리밥을 드셨지만, 우리는 가마솥 한쪽에 따로 쌀만 모아서 지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을 먹곤 했단다. 생선이나 고기가 비싸서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먹을 수가 없었단다. 요즘에는 보리밥, 채소, 산나물 식단을 좋아하는 걸 보면 좀 묘한 기분이 들어. 내가 요즘 부자가 제일 원하는 식사를 매일 하고 살았던 거야. 지금은 그걸 없어서 못 먹는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야. 작년에 시골에서 가져온 무시래기와 산에서 따 말린 고사리를 서울에 사는 분들에게 갖다 드렸더니 너무 좋아하더라고. 쉽게 구할 수 없는 것을 가져온 거야. 살아가다 보면 참 역설적인 일들을 자주 경험한단다. 나쁜 게 꼭 나쁜건 아니고, 좋은 게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니고.


부모님 두 분이 논과 밭에서 저녁 늦게까지 일을 했기 때문에, 네 살 위 형과 나는 혼자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지. 아주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여전히 부모님의 손길이 많이 필요했지만, 혼자 지내는 것에 익숙해져야 했어. 더구나, 형이 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늘 혼자 집을 지켜야 했어. 종종 엄마가 일하다 말고 들어오셔서 음식을 챙겨주시고 보살펴주시기는 했지만 말이야. 내가 ‘섬집 아기’라는 동요를 즐겨 부르는데, 아마 어린 시절 혼자 지내던 기억이 많아서 유독 그 노래를 좋아하나 봐. 그 동요의 가사는 일하러 간 엄마와 혼자 집에 남아 있는 아이에 대한 내용이야.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들려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동요가 되었어. 아마 어린 시절에 하나둘쯤 이런 기억을 안고 살아가기 때문일 거야.


혼자 지내다 보니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장난감이었지. 걷지 못했을때는 밀고 다니는 보행기와 딸랑이가 친구이자 놀잇감이었어. 점점 다리에 힘이 생기고 걷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자연이 제공하는 장난감들, 즉, 흙, 모래, 나뭇가지, 돌, 그리고 들에 핀 꽃과 친하게 되었지. 그래서인지 내 장점은 잘 참고 인내한다는 거야. 아무것도 안 하고 몇 시간 앉아 있어도 별로 지루하지 않으니까. 그게 나중에 커서 공부할 때 도움이 많이 되었어. 자연스럽게 혼자 있는 연습을 했기 때문에 외로움에 매우 익숙하단다. 그리고 참을성을 갖게 되었어. 또, 어차피 원하는 것을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이 잘 안되더라도 크게 상관하지 않게 되더라고. 잠시 조금 힘들지만 말이야.


사람은 신기하게도 생명력이 아주 끈질기단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도, 압도적인 도전 앞에서도, 시간이 좀 걸리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줄곧 적응하게 되지. 살던 집에 큰 대나무밭이 있었어. 태풍이 불고 눈보라가 쳐도, 곧고 딱딱한 참나무는 속속 부러지지만, 가느다란 대나무는 늘 그 자리에 서 있단다. 이러저리 흔들리다가, 잔가지 몇 개, 이파리가 조금 떨어져 생채기가 나기도 하지. 그런데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늠름한 푸르름으로 따스한 햇볕을 맞이하고 산들산들 바람을 만들어 준단다. 그러고 보니 대나무는 사람을 참 많이 닮은 것 같다. 그래서 우리에게 낯설게 않게 느껴지나 보다.


S.CAS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