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9) 반공 웅변대회와 실패의 추억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9) 반공 웅변대회와 실패의 추억



더위가 막 시작할 무렵, 매년 6월이 되면 어김없이 학교에서 반공 웅변대회가 열렸단다. 당시에는 북한에서 보내온 삐라 (전단)를 주워오면 공책과 연필로 바꿔주고 어린 학생들에게 북한 공산당의 실상을 알리는 사상교육을 하던 시기였어. 공산당은 붉은 늑대로 표현되는 적이며, 김일성(당시 북한의 주석)은 철천지원수라고 선전하곤 했었지. 지금도 남한과 북한의 관계가 별로 달라진 게 없지만, 그때에는 한 민족끼리의 분쟁과 반목이 더욱 심했었단다.


전교생이 한 800여 명 남짓 되는 초등학교에서 반공 웅변대회는 근처 바닷가로 떠나던 봄 소풍과 전교생과 온 동네 사람이 함께 모이는 가을 운동회와 함께 가장 중요한 학교 행사 중 하나였단다. 반마다 한 명씩 선생님의 추천을 받은 대표주자들이 경연을 펼치는 대회여서 학생들 간의 경합이 매우 치열했어. 각 반의 명예가 걸린 일이기도 해서 선생님들 간의 경쟁과 눈치작전도 매우 뜨거웠지. 우리 반에는 웅변을 아주 완벽히 잘하는 친구가 있었단다. 매년 학교 반공 웅변대회나 군 대항 웅변대회에 나가서 큰 상을 받는 아이였어. 당연히 그 친구가 5학년 우리 반 담임이신 김기호 선생님의 추천을 받았지. 지난해 학교 웅변대회에서 금상을 받은 친구였거든.


의례 그 친구가 다가올 웅변대회에 출전하는 것으로 결정이 되는 찰나, 갑자기 무슨 용기가 생겼는지 내가 손을 들어 대회에 나가겠다고 지원을 한 거야. 아마 4학년 때 칠판을 잘 지우는 일로 선생님의 총애를 받아서 기가 많이 살아났던 것 같아. 선생님과 친구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었던 심리가 발동하기도 했었지. 이미 경연자가 정해진 상황이었지만, 담인 선생님은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허락해 주셨어. “그럼 이번 해에는 우리 반에서 두 명이 반공 웅변대회에 나간다. 둘 다 열심히 준비하길 바란다.” 시골 선생님의 마음이 너그러우셨던 것 같아.전혀 검증되지 않는 학생을 학교 주요 행사이자 학급과 선생님의 명예가 달린 웅변대회에 내보내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거야.


대회에 출전하기로 결정된 후, 열심히 200자 원고지에 웅변 원고를 써내려갔단다. “해마다 유월이 되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북한 괴뢰당 괴수들에 의해 무고한 죽임을 당한 이승복 어린이가 생각납니다.” “저 무자비한 북한 공산당, 그 수괴 김일성은 우리의 철천지원수입니다.” “이 연사 북한 공산당과 김일성을 때려잡자고 강력하고 강력하게 외칩니다!”


이렇게 적은 3~4분 분량의 원고를 부엌에 걸려 있던 낡은 거울을 보면서 날마다 열심히 연습했단다. 담임 선생님의 지도로 원고를 보지 않고 연설하는 방법과 학생들의 눈을 마주치며 말하기, 그리고 말할 때마다 왼쪽 팔을 올리고, 오른쪽 팔을 올린 다음, 절정에 다다라서 외칠 때는 양팔을 하늘 위로 힘차게 뻗는 연습을 매일같이 했지.


드디어 반공 웅변대회가 열리는 날이 되었단다. 학교에 실내 강당이 없어서 전교생이 운동장 흙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어. 이른 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우리들의 까만 머리를 지글지글 불태우는 것같이 더운 날이었단다. 우리 반 주자가 멋지게 웅변을 마치고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어. 선생님이 가르쳐 준 대로 심호흡을 크게 몇 번 한 다음 시멘트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높은 연단 위로 올라갔지.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백 명이 되는 아이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는거야. 옆 귀빈석을 보니 동네 면장님과 교장 선생님 이하 각 반 담임 선생님들이 내가 말을 떼기를 기다리고 계셨지. 그 순간 갑자기 정신이 아찔해지면서 숨이 잘 쉬어지질 않는 거야.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떨렸고, 얼굴은 빨개지고, 앞이 보이지 않았어. 간신히 진정하고 첫마디를 뗀 후에는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횡설수설하고 연단을 내려왔단다. 그래서 내가 김일성을 때려잡자고 했는지 아니면 당시 남한 대통령을 때려잡자고 했는지, 이승복을 이승만이라고 말했는지, 하여튼 그날 웅변을 완전히 망쳤단다.


연단을 내려오면서 선생님 얼굴을 쳐다봤는데 좀 난감해하시는 것 같더라고. 아주 안타깝고 속상하셨을 거야. 자기 반 아이가 웅변대회를 완전히 망쳐놨으니 많이 창피하셨겠지. 자리에 돌아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얼굴에 난 땀을 닦았지. 얼굴이 너무 달아올라서 화끈거리는 게 수상자들에게 시상을 다 마친 후에도 고개를 들지 못했단다.


그날 참가한 연설 주자들 대부분이 받았던 장려상도 못 받고, 창피하고 의기소침한 나머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학교를 나서고 있었단다. 갑자기 내 뒤에서 여자아이들 몇 명이 쑥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어. “재가 꼴찌야!, 제일 못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다는 게 그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 같더라고. 며칠 풀이 죽어서 학교 가기도 싫을 정도였지.


다음 해, 6학년이 된 나는 또 웅변 잘하는 그 친구와 같은 반이 되었단다. 선생님도 5학년 때 담임이셨던 김기호 선생님이 계속 맡게 되었어. 어김없이 6월이 돌아와 똑같은 반공 웅변대회가 열린다는 발표가 있었단다. 담임선생님은 작년에 금상을 받은 웅변의 달인, 그 친구를 또 반대 표로 뽑으셨지.


그런데 내가 또 웅변대회 나가겠다고 자원을 했어. 생각해보면 참 속도 없었지.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시더니 나를 또 내보내기로 하셨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늘 나가면 상을 받는 반대표 한 명과 나가면 꼴찌 하는 나, 이렇게 총 두 명이 반공 웅변대회에 출전하게 되었단다. 지난해의 실패를 교훈 삼아서 이번에는 더욱 열심히 원고를 쓰고 연습했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한 결과 작년보다 훨씬 연설하는 데 안정감과 노련미가 생기더라고. 선생님도 지도를 더 열심히 해주셨단다. 방과 후에 따로 불러서 연설하는 목소리와 동작들을 지도해주셨어. 드디어 웅변대회를 하는 날이 밝아 왔단다.


대회 당일 비가 많이 내려 전교생이 기다란 교정의 실내 복도에 모여 앉았어. 맨 앞에 나무 연단을 몇 층 쌓아서 임시 무대를 설치했지. 연단 바로 밑에서부터 맨 끝까지는 상당히 먼 거리여서 아이들의 얼굴을 다 볼 수도 없었어. 뜨거운 햇볕 아래서 웅변하던 작년에 비하면 연설하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던 환경이었단다.


지난 일 년 간 칼을 갈고 기다려온 대회가 끝나갈 무렵, 드디어 내 순서가 되었어. 작년에 참석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마음이 덜 떨리고, 호흡도 정상이고, 얼굴도 아주 말짱했단다. 준비한 원고를 들고 연단에 서서 몇 초 동안 멋지게 연설을 하기 시작했어. 첫 느낌이 아주 좋더라고. “이러다 상 받는 거 아니야!” 이런 생각이 들 찰나, 실내 환기를 위해서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오더니만 내 연설 원고를 낚아채서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거야. 순간, 당황이 되더니만 또 극도의 불안증세가 몰려왔단다.


결과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횡설수설하다 내려와서 또 꼴찌를 하고 말았지. 순박한 시골 학교였기 망정이지 도시 학교였으면 아마 일 년 내내 왕따를 당하다가 졸업했을 것 같아. 그래도 선생님이 고생했다고 위로하시던 생각이 난다. 선생님도 무척 창피하셨을 것 같은데 학생의 마음을 보듬을 줄 아는 훌륭한 교육자이셨던 것 같아.


지금도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창피한 기억이란다. 두 해 연속 전교생 웅변대회에 나가 큰 실패를 경험했지.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또 도전했단다. 웅변대회 나가서 완전히 망쳤다고 해서 내가 평생연설을 못할 거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했어. 그 후에 계속 시도하고 도전해서 지금은 남들 앞에 서는 것도 편하고 연설도 주저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단다. 웅변대회에서 실패한 경험이 큰 성장의 계기가 된 것이란다. “어차피 창피함을 다 당했는데 이보다 더 난감한 일이 생긴 들 어떤가’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훨씬 편해진단다.


시시때때로 우리는 어려움과 실패를 겪게 된단다. 실패하게 되면 마음이 아주 아프고 생채기가 남기도 하지. 하지만, 순간의 좌절감에 머무르지 않고, 실패는 잠시라고 생각하고 노력하게 되면 어느덧 성공도 이룰 수가 있게 된단다.


글 윤성민 박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