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14) 목장 산의 이웃들

2018-06-11 10:29

소정이에게 들려주는 아빠 이야기(14) 목장 산의 이웃들


내가 살던 산골 마을에는 집이 네 채밖에 없었단다. 이웃집 근영이네, 아랫집 명숙이네, 동네 작은 산을 벌목해서 만든 목장 집, 그리고 우리 집을 합쳐 네 가구가 살던 마을이었어. 원래는 총 세 가구가 사는 마을이었지. 그런데 서울에서 내려온 박 사장이라는 분이 산을 사서 목장으로 만들었단다. 그래서 목장 집이 하나 더 생기게 된 거야. 박 사장님은 서울에서 사업을 하던 분이셨는데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돌았단다. 아담한 키에 검은색 가죽 자켓을 입은 곱슬머리의 신사셨어. 앞이마가 살짝 벗어지고 배가 나오신 분이었지. 그래서 동네 아이들이 배 사장이라고 부르기도 했단다. 물론, 그분이 없을 때만 우리끼리 그렇게 부르곤 했었지. 나는 돈이 많은 사장님은 다 대머리이고 배가 나오신 줄 알았어. 태어나서 사장님을 처음 만나본 거라서.

동네 앞 작은 산은 고사리가 많이 났었어. 산나물을 채취해서 말렸다가 장에 내다 팔면 아주 좋은 값을 받곤 했었지. 그래서 동생들을 데리고 산나물을 뜯으러 산에 다니곤 했었어. 고사리를 많이 뜯어오면 어머니에게 용돈을 받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학교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산에 가곤 했었지. 가을이면 나무마다 주렁주렁 열린 밤을 따러 가곤 했었지. 한참 익어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밤송이를 작대기를 이용해서 건드리면 주먹만 한 밤알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지곤 했어. 추수가 끝난 가을 저녁, 앞마당에 멍석을 깔고 누워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하나씩 세곤 했었지. 추수하고 나온 왕겨를 태워 모닥불을 만들고 산에서 따온 밤과 밭에서 거둔 고구마를 불 속에 넣어 구워 먹곤 했단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커다란 굴착기와 트럭들이 눈에 들어왔단다. 벌목 인부들이 하얀색 수건을 머리에 두르고 앞 산에 있는 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있었어. 수많은 추억이 깃든 앞 산이 없어지는 것이 내내 서운했었단다. 동네 사람에게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벌목을 해서 목장을 만든다고 했어. 왼쪽 산자락 끝에는 벽돌과 슬레이트를 이용해서 커다란 축사를 만들고, 축사 옆에는 방과 부엌이 딸린 조그만 벽돌집을 짓기 시작했어. 몇 달이 지난 후 목장이 완성되었어. 벌목된 산에는 젖소가 먹을 수 있는 풀들이 심어졌고, 소먹이용 절인 옥수수 저장창고와 큰 규모의 축사와 작은 양옥집이 멋지게 들어섰지. 우리 마을에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신식 목장이 생긴 거야.

며칠 후 서울에서 박 사장이라는 분이 까만색 그랜저를 타고 내려오셨단다. 동네 사람들은 “번쩍번쩍 광이 나는 차를 타고 나타나신 분이 과연 목장에서 살 수 있을까?”라고 수군거렸어. “아마 목장 관리인을 두겠지?” “안 그러면 서울에서만 살던 사람이 어떻게 목장을 운영할 수가 있겠어?” 우리 마을과 아랫마을에 살던 이웃들은 과연 누가 목장 관리인이 될까 궁금했단다.

그동안 벌목 일군들 점심 식사를 도맡았던 어머니는 박 사장을 우리 집에 초대해서 점심을 대접했단다. 맛난 반찬은 없었지만, 박 사장은 밭에서 따온 호박잎과 된장, 빨간 고춧가루로 버무린 배추 것절이, 가마솥에 펄펄 끓인 된장찌개, 그리고 장날 사다가 담가 놓은 간장 게장으로 차려진 점심을 아주 맛있게 드셨단다. “어휴, 이거 정말 맛있네요.” “서울에서는 이런 거 못 먹어요.” 나는 ‘서울 사람들은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매일 먹어서 저렇게 배가 나왔는데, 도대체 시골 음식이 뭐가 그렇게 맛있을까?’라고 의아하게 생각했단다. 아마도 매일 먹는 채소 밥상이 질려서 서울 사람들의 밥상에 동경심을 갖고 있었을 거야.

식사를 마친 박 사장은 아버지에게 목장 관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하셨단다. “목장을 좀 맡아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내가 서울에 사업체가 있어서 이곳에 늘 머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주말마다 내려올 테니 내가 없는 동안 목장 관리를 좀 해 주세요.” 아버지는 얼른 수락하셨지. 그날 밤 어머니는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라며 아주 좋아하셨어. 목장을 관리하면 정기적으로 일정액의 월급도 받을 수가 있고 젖소가 새끼를 낳아 팔게 되면 소 판 돈의 일부를 손에 쥘 수가 있었거든. 논 한 마지기 없던 집에 엄청난 기회가 생긴 거였어.

몇 달 후 주말, 박 사장은 예외 없이 목장에 내려왔단다. 그런데 그 날은 혼자가 아니었어. 그랜저 뒷좌석에는 내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단다. 동네 사람들은 그 여자애가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드라마에 나왔던 아역 탤런트라고 했어. 박 사장은 서울에 살던 조카를 데리고 목장에 내려왔던 거야. 큰 도시에서만 살아서 심심해 했는데 마침 시골구경을 하고 싶다고 해서 같이 온 거라고 하더구나

박 사장은 여자 조카 아이를 데리고 우리 집에 방문했단다. 마루에 잠깐 걸터앉은 여자아이의 하얀 얼굴에 반짝반짝 광채가 났었어! 이름을 물어보았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또박또박 서울 말투로 이름과 사는 곳을 알려주었지. 시골에서 매일 뙤약볕 밑에서 흙장난만 하고 지내던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지면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단다. 함께 점심을 먹는 내내 가슴이 꽁닥꽁닥 뛰는 소리가 들렸단다. 아주 신기한 하루였지. 마치 내가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비현실감이 들고 몸이 허공에 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이 온종일 느껴졌어.

점심을 먹은 후 박 사장은 목장을 둘러보고는 조카 여자아이와 함께 서울로 돌아갔단다. 그 후 여자아이의 소식은 들을 수가 없었어. 몇 달 후 박 사장은 목장을 다른 사람에게 팔아넘기고는 더는 시골에 내려 오지 않았단다.

박 사장이 떠난 목장에 새 주인이 들어 왔단다. 군산에서 고기잡이 배를 많이 가지고 있던 가족이었는데 아들을 위해서 목장을 사준 거였어. 아들 이름이 김명은이었는데, 우리는 명은이 아저씨라고 불렀단다. 어머니와 함께 우리 집에 찾아온 명은이 아저씨는 선천적인 뇌성마비 장애인이었어. 걷는 것도 불편하고 말도 많이 어눌했었지. 장애가 있어서 늘 집에만 있던 아들을 시골로 요양을 보낸 거였어

목장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지만, 장애인인 명은이 아저씨를 위해서 아버지는 목장 관리인 노릇을 계속할 수가 있었단다. 관리인으로서 한 가지 조건이 더 추가되었어. 바로 명은이 아저씨의 삼시 세끼를 챙겨드리는 거란다. 식사준비를 할 수가 없기 때문에 명은이 아저씨는 우리 집에서 식사하곤 했단다. 식사가 준비되면 명은이 아저씨를 부르러 가는 것은 늘 내 몫이었단다. 한걸음에 목장 집에 달려가 명은이 아저씨를 큰 소리로 부르곤 했었지. “명은이 아저씨, 식사하세요.” 그러면 아저씨의 정겨운 대답이 들려오곤 했어. “알았어, 빨리 갈게.” 식사하러 오시는 명은이 아저씨는 빨리 올 수가 없었지. 나도 아저씨를 따라 천천히 풀 길을 따라 걸어오곤 했단다.

거동이 불편한 아저씨는 주로 방에서 음악을 듣곤 하셨어. 아주 복잡하게 생긴 턴테이블과 커다란 앰프 두 개가 딸린 전축 레코드판에서 흘러 나오는 음악을 듣는 취미를 갖고 계셨단다. 종종 목장 집에 놀러 가면 아저씨는 음악을 들려주시곤 했단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비틀스를 비롯해서 당시 유명한 팝 음악을 즐겨 들었어. 우리 집에서는 8트랙 카트리지 오디오 테이프로 ‘뽕짝 메들리’라는 음악을 주로 듣곤 했었거든. 팝송이 뭔지도 몰랐지만 명은이 아저씨를 통해서 신식 문화를 처음으로 경험할 수가 있었단다.

일여 년을 가족같이 함께 지낸 명은이 아저씨가 군산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소식을 들었단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갑자기 떠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단다. 혼자 지내기가 외로워서 군산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디 마실 한 번 못 가보고 방안에서 음악만 듣고 있으니 많이 심심하셨을거야.

군산에서 오신 어머니와 함께 이삿짐을 정리하던 명은이 아저씨는 그동안 애지중지 아끼던 전축과 몇백 개가 넘는 팝송 레코드판을 내게 주셨어. 이별하는 것이 몹시 서운하셨던 것 같아. 아저씨가 떠난 후 텅 빈 목장 집 방안을 둘러 보았단다. 노란색 장판 위에는 아저씨가 덥고 주무시던 무명 이불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먹다 남은 과자 봉지와 필기도구들이 여기저기 방안을 굴러다니고 있었어. 그 후 며칠은 가슴이 텅 빈 듯한 느낌으로 살았단다.

그 후 목장은 읍내 농업고등학교에서 사들인 후 축산과 학생들을 위한 실습장으로 사용되었단다. 아버지도 관리인을 그만두시고 다른 농사일을 하게 되셨지.

몇 해 전, 지금은 없어진 고향 마을에 다녀왔단다. 살고 있던 동네 사람들이 읍내나 서울로 모두 떠나 버렸단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이 되었지만, 목장 산은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단다. 축사와 옥수수 저장창고, 조그만 벽돌집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어. 추억으로 얽힌 나무, 오솔길, 작은 연못은 마치 오랜 친구를 환영하는 것처럼 보였단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고 있을까? 목장 산에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추억의 뒷전에 머물러 있겠지만, 사람을 만나서 맺은 소중한 기억은 여전히 생생히 가슴속에 남아 있단다.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나는 누군가의 추억으로 남아 있겠지? 그 추억이 아름답게 기억되기를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야겠다.


글 윤성민 박사, DSW, LCSW-R, CASAC, RPT-S, ACT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