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생 가난하고 병마에 시달리면서
천하고 무시 당하는 존재에 대한 무궁한 애정을 표현한 작가
‘강아지 똥’ ‘몽실 언니’의 작가 권정생
작가 권정생을 아는지 물어보면 선뜻 답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강아지 똥’이란 이름을 추가하면 적어도 작품의 이름을 들어본 이들은 늘어날 것이며, 공중파 방송의 드라마로도 제작이 된 ‘몽실 언니’를 물어본다면 훨씬 많은 사람이 그를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권정생은 동화 작가, 수필가, 시인이었다. 대표작인 두 작품 외에도 140편의 단편동화, 5편의 장편동화, 5편의 소년소설, 100편이 넘는 동시와 동요, 150여 편에 이르는 산문을 남겼다. 그는 평생 가난하였고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렸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서 높은 인세를 받게 되었지만, 돈에 무지한 그는 자신의 수입마저 다 남에게 빼앗겨 버리고 평생 소박한 삶을 살았다.
사상적으로는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 생태주의자이며 일부에서는 기독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로도 평가받는 권정생 작가, 타계 1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다시 돌아본다.
권정생은 1937년 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방 후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다. 가난 때문에 상점의 점원,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등을 하며 객지를 떠돌던 그는 5년 뒤인 1957년 경상북도 안동군에 들어와 주로 그곳에서 창작하고 생활했다.
19세 때 폐병에 걸려서 항생제를 보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으나 공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허탕치는 날이 많았으며, 같이 폐병을 앓던 고향친구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서 폐결핵과 늑막염을 거쳐 신장결핵과 방광결핵으로 인하여 온몸이 망가져버려서 사람 구실을 못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평생 오줌통을 몸에 차고 살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 부모님마저 차례로 돌아갔고, 집도 없고 기댈 곳도 없어진 그는 196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일직교회 부속의 토담집에서 기거하며 종지기를 하게 되었다. 생활은 여전히 조악해서, 여름이면 소나기에 뚫린 창호지 문 구멍 사이로 개구리가 들어와 울고 겨울이면 생쥐들이 들어와 발가락을 깨물거나 옷 속을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엔 깜짝 놀라고 귀찮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고 나중에는 아랫목에 먹을 것을 두고 생쥐들을 기다릴 만큼 정이들었다고 한다.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 똥>을 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 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 문학상을 받았다. 1984년부터 교회 뒤편의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혼자 살며 꾸준히 창작했다.
81년 작 몽실 언니 등의 베스트셀러를 쓰면서 수억 원에 이르는 인세를 매년 받았으나 정작 산골의 흙집에서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고, 옷도 단벌이어서 이웃사람들은 그가 굉장히 가난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사망 후 수많은 사람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과 그가 남긴 재산에 대해 알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워낙 돈에 무지했던 그를 위해 돈을 대신 관리했던 지인의 농간이라는 의혹도 있다. 또한, 안타깝게도 그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나 사망원인이 의료사고였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권정생의 작품은 대체로 종교적 믿음을 바탕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강아지 똥>은 닭과 진흙에 무시를 당하고 자신을 하찮게 여기던 강아지 똥이 민들레의 거름이 되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는 내용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어 60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현재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몽실언니>는 전쟁과 가난에 허덕이지만 꿋꿋이 버텨내는 한 절름발이 소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1984년 첫 출간 이래 100만 부가넘게 팔렸다. 1990년에는 MBC 드라마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권정생이 아동 문학계에 발을 내디뎌 활동하던 대한민국의 1970년대는 ‘반공’과 ‘조국 근대화’를 표상으로 하는 체제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사회 전반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시기였다. 이 무렵의 아동문학은 후대 이론가들에 의해, 국가적 교육 목표에 순응하는 교훈 주의와 순수하고 착한 동심을 지향하는 일명 ‘동심천사주의’에 치우쳐 있었다는 지적을 받게 된다.
그런 시기에 권정생은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개발 일변도의 사회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적’ 글쓰기를 통해 가난한 이웃들에게 무한한 사랑으로 희망을 주고 고난 극복의 정신을 심어주어 아동 문학계의 중요한 흐름을 선도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권정생은 삶과 문학이 한 몸을 이룬 작가로 일제 강점기, 해방 그리고 6·25전쟁 등을 두루 체험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이념이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왜곡된 역사 인식과 시대의식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종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자기희생적 삶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개인사 덕분에 타계 이후에도 작품뿐 아니라 그의 삶 전반이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아울러 동화, 옛이야기, 동시, 동극, 산문, 평론뿐 아니라 수많은 기고문을 남기는 등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했던 전방위 작가로도 뜻깊은 사례를 남겼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 달라.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말고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또한, 자신의 집터를 허물어 다시 자연으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현재 그의 재산은 유언에 따라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에서 관리하며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 등을 돕기에 사용되고 있다.
에스카사 편집부
한평생 가난하고 병마에 시달리면서
천하고 무시 당하는 존재에 대한 무궁한 애정을 표현한 작가
‘강아지 똥’ ‘몽실 언니’의 작가 권정생
작가 권정생을 아는지 물어보면 선뜻 답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강아지 똥’이란 이름을 추가하면 적어도 작품의 이름을 들어본 이들은 늘어날 것이며, 공중파 방송의 드라마로도 제작이 된 ‘몽실 언니’를 물어본다면 훨씬 많은 사람이 그를 기억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권정생은 동화 작가, 수필가, 시인이었다. 대표작인 두 작품 외에도 140편의 단편동화, 5편의 장편동화, 5편의 소년소설, 100편이 넘는 동시와 동요, 150여 편에 이르는 산문을 남겼다. 그는 평생 가난하였고 오랫동안 병마에 시달렸다.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서 높은 인세를 받게 되었지만, 돈에 무지한 그는 자신의 수입마저 다 남에게 빼앗겨 버리고 평생 소박한 삶을 살았다.
사상적으로는 평화주의자, 반전주의자, 생태주의자이며 일부에서는 기독교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로도 평가받는 권정생 작가, 타계 10주년을 맞이하여 그를 다시 돌아본다.
권정생은 1937년 일본 도쿄 시부야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해방 후 경상북도 청송으로 귀국했다. 가난 때문에 상점의 점원, 나무장수, 고구마장수 등을 하며 객지를 떠돌던 그는 5년 뒤인 1957년 경상북도 안동군에 들어와 주로 그곳에서 창작하고 생활했다.
19세 때 폐병에 걸려서 항생제를 보급받기 위해 읍내 보건소를 찾아갔으나 공급이 제대로 되질 않아 허탕치는 날이 많았으며, 같이 폐병을 앓던 고향친구들이 하나둘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의 병세는 점점 심해져서 폐결핵과 늑막염을 거쳐 신장결핵과 방광결핵으로 인하여 온몸이 망가져버려서 사람 구실을 못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평생 오줌통을 몸에 차고 살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 부모님마저 차례로 돌아갔고, 집도 없고 기댈 곳도 없어진 그는 1967년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조탑동 일직교회 부속의 토담집에서 기거하며 종지기를 하게 되었다. 생활은 여전히 조악해서, 여름이면 소나기에 뚫린 창호지 문 구멍 사이로 개구리가 들어와 울고 겨울이면 생쥐들이 들어와 발가락을 깨물거나 옷 속을 비집고 겨드랑이까지 파고들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엔 깜짝 놀라고 귀찮았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고 나중에는 아랫목에 먹을 것을 두고 생쥐들을 기다릴 만큼 정이들었다고 한다.
1969년 단편동화 <강아지 똥>을 발표하여 월간 기독교교육의 제1회 아동 문학상을 받으며 동화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무명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되었고, 1975년 제1회 한국아동 문학상을 받았다. 1984년부터 교회 뒤편의 빌뱅이언덕 밑에 작은 흙집을 짓고 혼자 살며 꾸준히 창작했다.
81년 작 몽실 언니 등의 베스트셀러를 쓰면서 수억 원에 이르는 인세를 매년 받았으나 정작 산골의 흙집에서 평생을 검소하게 살았고, 옷도 단벌이어서 이웃사람들은 그가 굉장히 가난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그의 사망 후 수많은 사람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과 그가 남긴 재산에 대해 알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워낙 돈에 무지했던 그를 위해 돈을 대신 관리했던 지인의 농간이라는 의혹도 있다. 또한, 안타깝게도 그가 사망한 지 10년이 지나 사망원인이 의료사고였음이 밝혀지기도 했다.
권정생의 작품은 대체로 종교적 믿음을 바탕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것들에 대한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한 것으로 평가된다. <강아지 똥>은 닭과 진흙에 무시를 당하고 자신을 하찮게 여기던 강아지 똥이 민들레의 거름이 되어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는 내용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어 60만 부 이상이 팔렸으며 현재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있다. <몽실언니>는 전쟁과 가난에 허덕이지만 꿋꿋이 버텨내는 한 절름발이 소녀의 감동적인 이야기로, 1984년 첫 출간 이래 100만 부가넘게 팔렸다. 1990년에는 MBC 드라마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권정생이 아동 문학계에 발을 내디뎌 활동하던 대한민국의 1970년대는 ‘반공’과 ‘조국 근대화’를 표상으로 하는 체제 이데올로기의 영향이 사회 전반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시기였다. 이 무렵의 아동문학은 후대 이론가들에 의해, 국가적 교육 목표에 순응하는 교훈 주의와 순수하고 착한 동심을 지향하는 일명 ‘동심천사주의’에 치우쳐 있었다는 지적을 받게 된다.
그런 시기에 권정생은 전쟁 후유증에 시달리는 사람들, 개발 일변도의 사회 분위기에 동화되지 못하고 변두리로 밀려난 사람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적’ 글쓰기를 통해 가난한 이웃들에게 무한한 사랑으로 희망을 주고 고난 극복의 정신을 심어주어 아동 문학계의 중요한 흐름을 선도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권정생은 삶과 문학이 한 몸을 이룬 작가로 일제 강점기, 해방 그리고 6·25전쟁 등을 두루 체험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이념이나 사상에 치우치지 않고, 왜곡된 역사 인식과 시대의식을 작품에 담아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종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자기희생적 삶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개인사 덕분에 타계 이후에도 작품뿐 아니라 그의 삶 전반이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아울러 동화, 옛이야기, 동시, 동극, 산문, 평론뿐 아니라 수많은 기고문을 남기는 등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작품 활동을 했던 전방위 작가로도 뜻깊은 사례를 남겼다.
그는 세상을 뜨기 전, “인세는 어린이로 인해 생긴 것이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한다. 굶주린 북녘 어린이들을 위해 쓰고 여력이 되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들을 위해서도 써 달라. 남북한이 서로 미워하거나 싸우지 말고 통일을 이뤄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 또한, 자신의 집터를 허물어 다시 자연으로 돌려달라고 부탁했다. 현재 그의 재산은 유언에 따라 권정생 어린이 문화재단에서 관리하며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 등을 돕기에 사용되고 있다.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