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 30분, 래드번 스테이션(Radburn train station)에서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맨해튼으로 향하는 통근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의 어깨에는 출근용 가방이 둘러 매어져 있고 한 손에는 화이트 케인(White cane)이 들려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언제나처럼 그는 생각한다. ‘기차역까지 나를 데려다준 아내 그레이스가 오늘은 어떤 얼굴로 나를 배웅했을까?’ 머릿속으로 아내의 얼굴을 그려보는 일은 분주한 일과 중 때 없이 일렁이는 궁금증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 한 번도 아내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Harvard와 MIT를 졸업하고 월 스트리트의 중견 애널리스트로, 또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의 저자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신순규 씨는 시각장애인이다. 어린 시절에는 또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동네 개구쟁이였던 그는 갑자기 닥친 시각장애로 인해 숱한 좌절을 경험해야 했고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될 시련들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그는 이런 자신의 삶을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이라는 에세이로 엮어 2014년 도서출판 판미동을 통해 책으로 발표했고, 책이 출간되자마자 SBS와 조선일보를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의 높은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언론이 그의 책에 대해 앞다투어 호평을 쏟아놓았던 이유는 이 책이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의 입지전적 스토리기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재탐색하고 마침내 움켜쥐어야 할 인생의 참가치를 발견하는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점자(Braille) 컴퓨터를 이용해 자신의 삶을 담담히 써 내려 갔던 신순규 씨, 그가 오늘 S.CASA 를 만나 따듯한 목소리로 책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반갑습니다. 신순규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 그레이스고요. 미인이죠?”
크지 않은 키에 다부진 어깨를 한 신순규 씨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첫인사를 건네왔다. 곳곳에 가족사진이 걸려있는 거실과 저녁을 물린 식탁,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따듯한 시선에서 ‘가정’이 주는 평온함이 느껴졌다.
“저는 아홉 살이 되던 해에 녹내장과 망막박리로 인해 시력을 완전히 잃었어요. 물론 아홉 살 이 전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술과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엔 그렇게 되었어요. 수술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실명이 되었다던 의사의 소견을 듣던 날 내심 안심이 되더라고요. 이젠 수술 안 해도 되겠구나 하고요”
아홉 살 소년이 마주했을 암울한 운명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아프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는 현실을 피하거나 자기 연민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현실 너머의 세상을 향해 진지한 호기심을 거두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저의 부모님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 맹인으로 산다는 것은 다분히 불운한 삶일 수밖에 없었거든요.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가 있긴 했지만 주로 마사지나 침술을 가르치는 직업양성소 정도였으니 그 미래가 너무 암울하잖아요. 그런데 뭐랄까요, ‘인생 새옹지마다’ 이런 말 하잖아요. 실명하고 맹아학교로 옮겨갔는데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던 터라 거기서 합창단 반주를 맡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합창단이 미국순회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저희가 공연을 했던 뉴저지 오버룩 맹아학교(Overlook School)의 초청으로 결국 유학을 오게 되었거든요. 그때 제 나이 열다섯 살이었어요”
80년대 초반, 조기유학이 흔하던 시절도 아니었고 더욱이 앞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던 열다섯 살 맹아의 미국유학이라니. 당황하는 기자의 표정이라도 읽은 듯 그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제가 좀 낙천적이거든요. 카뮈의 이방인(The Stranger)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인간은 결국 어디에나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기왕 익숙해질 거라면 차라리 즐겁게 익숙해지자 뭐 이런 게 제가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할까요? 실명은 되었지만, 더 나은 환경에서의 교육의 기회를 얻었으니 저로서는 감사할 일이었죠. 그런데 막상 미국에 오고 학교에서 공부를 해보니, 오버룩 맹아학교는 제가 생각했던 그런 곳이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시각장애만 있을 뿐 모든 것이 정상이었던 반면, 다양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함께 있는 학교다 보니 정규교육과정이라는 게 너무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아쉽지만,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스스로를 낙천적이라 말하는 그의 차분한 표정에서 삶에 기꺼이 순응하는 맑은 겸손이 느껴졌다.
“오버룩 학교로 유학 오기 전에 몇 주 일찍 미국에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저를 보호해주셨던 분들이 계셨어요. 오머셔 성을 가진(Mr. David Ormesher, Mrs. Marry Ormersher) 부부인데, 학교가 문을 닫거나 방학이 되면 저는 그분들과 함께 지냈어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을 놓고 고민하고 있던 제게 그분들이 일반공립학교로 전학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학교를 다 마치고 성인이 될 때까지 법적 보호자가 되어주겠다고 하셨고요. 그래서 저는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그 댁으로 들어갔고 일반공립학교로 옮겨 제가 원하던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기대치 않았던 분들의 도움으로 그는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공립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 그는 모범적인 우등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리더쉽도 남달랐다. 하버드, 프린스턴, MIT, 유펜 등 세계적인 명문 대학에 동시에 합격했고 그 중 하버드와 유펜에서는 전국장학생(National Scholar)과 벤자민 프랭클린 장학생에 뽑힐 정도로 우수했다.
“하버드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MI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조직학 박사과정을 공부했어요. 사실 고등학교 때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웃기죠? 환자의 환부를 보지 못하는 의사. 말하자면 어불성설인데 그때는 그냥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물론 공부할 방법을 찾아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포기했어요. 그러다 MIT에서 ‘장애인에게 장벽이 있는 직업’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당시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분석전문가)의 전례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첫 성공사례가 되어야겠다. 결심을 했죠. 그리고 졸업 후 JP모건에 들어가 애널리스트로 일하다가 2003년 시각장애인으로써는 세계 최초로 금융 분야의 최종 자격증인 CFA 를 취득했어요. 그리고 현재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Brown Brothers Harriman)에서 재무분석가로 일하고 있고요.”
누구보다 성실했을 삶, 자신과의 사투로 날마다 치열했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모든 시간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이뤄낸 현재의 삶이 영화필름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말한다. 그가 성취했던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은 아내와 더불어 이룬 그의 가정이라고.
“아내는 제가 장애인 선교단체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만났어요. 그레이스도 자원봉사자였거든요. 저야 어쩔 수 없이 장애를 가진 사람이 되었지만, 정상인이 장애인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장인,장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힘든 시기를 거쳐야 했지만, 결국엔 저희를 축복해주셔서 1996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이후, 오랜 기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여러 모양으로 고생했는데 거의 10년 만에 첫아기 데이비드를 얻었어요. 아이를 얻기 위해 그레이스가 겪었던 고충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사실 아이를 넷 정도는 낳고 싶었는데 하나로 만족해야 했죠. 살면서 그게 못내 아쉬웠는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자녀를 보내주시더라고요. 인생의 퍼즐은 한 번에 맞춰지는 게 아니라잖아요.”
사실 그는 장애로 인해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될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 직면의 순간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특별한 사랑의 혜택을 누렸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법적 대리인이 되어주었던 Ormersher 부부의 사랑이 그랬고, 평생 자신의 눈과 발이 되어 준 아내의 사랑이 그렇고, 알게모르게 자신을 도왔던 무수한 무명의 손들이 그랬다. 누구 하나도 그는 쉬이 잊을 수가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봐요. 제가 어린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오지않고 그냥 한국에 살았더라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에서처럼 인생의 모든 순간에는 내가 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미련이나 동경이 있게 마련일 텐데 저는 확신하는 게 있어요.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는 그 사실 하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건 그저 하나의 선택에 불과했고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는 내가 살아오면서 타인들로부터 받은 무수한 사랑과 도움 때문이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몇 해 전부터 그 고마움을 어떻게 다시 사회로 환원하는가에 대해 고민해왔어요.”
어린 시절 자신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기꺼이 보호자가 되어주었던 Ormersher 부부를 생각해보니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삶의 막다른 곳에 주저앉아야만 하는 환경의 아이들, 기회를 얻지 못해 더 나은 내일에 대한 꿈조차 꿀 수 없는 아이들에게 한때 자신이 누렸던 혜택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2012년 YANA(you Are Not Alone) 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어요. 그 단체가 한국에 있는 동명 보육원과 결연을 맺고 그곳에 맡겨진 아이 중 몇 명을 선발해 매년 미국으로 데리고 와서 더 넓은 세상을 볼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리고 미국에서 공부하겠다거나, 미국에 계시는 분 중 그 아이들의 법적 보호자(입양과는 다른)가 되기를 희망하는 가정과 연결해주기도 하구요. 2014년 그 첫 열매가 맺혔어요. 13살 예진이가 미국으로 건너왔고 저희 가정이 그 아이의 법적 보호자가 되어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어요. 예진이는 두 살 때 보육원에 맡겨져 11년을 살았던 아이였는데 다행히 명랑한 성격이라 이곳에서도 아주 잘 적응하고 있어요. 이제 9학년이 되었는데 공부도 무척 잘하고요.”
생면부지의 남을 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사실 남편의 염원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내 그레이스 씨는 ‘사랑의 환원’이라는 남편의 뜻에는 쉽게 동의를 했지만, 막상 아이를 데려오자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예진이가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고 또 아내도 예진이를 잘 알 수 없었기에 크고 작은 갈등이 많았지요.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라 서로 힘들었죠. 그런데 아내가 예진이를 좀 더 가까이 보듬을 수 있었던 것은 두 살 때부터 집단생활을 해 온 아이의 환경과 처지를 이해하면서부터였어요. 자신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던 보육원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 12년 동안 부모의 사랑에 굶주려야 했던 예진이의 형편을 생각하며 아이의 입장이 되려고 애쓰다 보니 이제는 비교적 관계가 자연스러워지고 예진이도 마음을 많이 열게 되었지요. 저희 부부의 보살핌으로 한 아이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저희도 무척 고무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누렸던 기회와 고마움을 다시 누군가에게 되돌려 줄 수 있어서 감사하고요.”
자기가 받은 사랑에서 멈추지 않고 그 사랑이 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 재생산되기를 바라는 신순규 씨의 삶의 자세를 통해 인생의 참가치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제 책에도 썼지만 제가 만일 딱 하루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저는 주변의 소소한 것들을 천천히 들여다 보고 싶어요. 곁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 주변 풍경들, 인사 나누는 이웃과 동료들 그리고 서로 잘 알지는 못해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게 주어진 그 하루 동안 실컷 보고 싶어요.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 그가 무엇을 했고 무엇이 되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하고, 일상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이거든요.”
제한된 시간에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는 없지만, 그의 결론은 명료했다. 하버드 출신의 공인재무분석가로, 그리고 자신의 책을 발표하고 언론사에 고정 칼럼을 쓰는 작가로 사회에 적잖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고 있지만, 무엇보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이고 일터에서 성실한 직원이며 그리고 받은 것을 되돌려 주며 살고 싶은 누군가의 이웃이라고 자신을 스스로 정의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터득한 그의 성찰을 통해
우리 삶을 재탐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아쉬운 인터뷰를 갈무리한다.
못다 나눈 이야기는 그의 책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을 통해 더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S.CASA 편집부
아침 6시 30분, 래드번 스테이션(Radburn train station)에서 아내의 배웅을 받으며 맨해튼으로 향하는 통근 기차에 몸을 싣는다. 그의 어깨에는 출근용 가방이 둘러 매어져 있고 한 손에는 화이트 케인(White cane)이 들려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언제나처럼 그는 생각한다. ‘기차역까지 나를 데려다준 아내 그레이스가 오늘은 어떤 얼굴로 나를 배웅했을까?’ 머릿속으로 아내의 얼굴을 그려보는 일은 분주한 일과 중 때 없이 일렁이는 궁금증이다. 왜냐하면, 그는 단 한 번도 아내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Harvard와 MIT를 졸업하고 월 스트리트의 중견 애널리스트로, 또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의 저자로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사는 신순규 씨는 시각장애인이다. 어린 시절에는 또래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동네 개구쟁이였던 그는 갑자기 닥친 시각장애로 인해 숱한 좌절을 경험해야 했고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될 시련들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그는 이런 자신의 삶을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이라는 에세이로 엮어 2014년 도서출판 판미동을 통해 책으로 발표했고, 책이 출간되자마자 SBS와 조선일보를 비롯한 각종 언론 매체의 높은 관심과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많은 언론이 그의 책에 대해 앞다투어 호평을 쏟아놓았던 이유는 이 책이 장애를 가진 한 사람의 입지전적 스토리기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일상을 통해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을 재탐색하고 마침내 움켜쥐어야 할 인생의 참가치를 발견하는 진지한 성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점자(Braille) 컴퓨터를 이용해 자신의 삶을 담담히 써 내려 갔던 신순규 씨, 그가 오늘 S.CASA 를 만나 따듯한 목소리로 책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반갑습니다. 신순규라고 합니다. 이쪽은 제 아내 그레이스고요. 미인이죠?”
크지 않은 키에 다부진 어깨를 한 신순규 씨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첫인사를 건네왔다. 곳곳에 가족사진이 걸려있는 거실과 저녁을 물린 식탁,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의 따듯한 시선에서 ‘가정’이 주는 평온함이 느껴졌다.
“저는 아홉 살이 되던 해에 녹내장과 망막박리로 인해 시력을 완전히 잃었어요. 물론 아홉 살 이 전까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술과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엔 그렇게 되었어요. 수술이 얼마나 힘들었던지 실명이 되었다던 의사의 소견을 듣던 날 내심 안심이 되더라고요. 이젠 수술 안 해도 되겠구나 하고요”
아홉 살 소년이 마주했을 암울한 운명이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아프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는 현실을 피하거나 자기 연민에 갇히지 않고 오히려 현실 너머의 세상을 향해 진지한 호기심을 거두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저의 부모님들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그 당시 한국에서 맹인으로 산다는 것은 다분히 불운한 삶일 수밖에 없었거든요. 시각장애인을 위한 특수학교가 있긴 했지만 주로 마사지나 침술을 가르치는 직업양성소 정도였으니 그 미래가 너무 암울하잖아요. 그런데 뭐랄까요, ‘인생 새옹지마다’ 이런 말 하잖아요. 실명하고 맹아학교로 옮겨갔는데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던 터라 거기서 합창단 반주를 맡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합창단이 미국순회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마침 저희가 공연을 했던 뉴저지 오버룩 맹아학교(Overlook School)의 초청으로 결국 유학을 오게 되었거든요. 그때 제 나이 열다섯 살이었어요”
80년대 초반, 조기유학이 흔하던 시절도 아니었고 더욱이 앞을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던 열다섯 살 맹아의 미국유학이라니. 당황하는 기자의 표정이라도 읽은 듯 그는 말을 이어갔다.
“사실 제가 좀 낙천적이거든요. 카뮈의 이방인(The Stranger)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인간은 결국 어디에나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기왕 익숙해질 거라면 차라리 즐겁게 익숙해지자 뭐 이런 게 제가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할까요? 실명은 되었지만, 더 나은 환경에서의 교육의 기회를 얻었으니 저로서는 감사할 일이었죠. 그런데 막상 미국에 오고 학교에서 공부를 해보니, 오버룩 맹아학교는 제가 생각했던 그런 곳이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시각장애만 있을 뿐 모든 것이 정상이었던 반면, 다양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함께 있는 학교다 보니 정규교육과정이라는 게 너무 형편없었어요. 그래서 아쉽지만,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지요.”
스스로를 낙천적이라 말하는 그의 차분한 표정에서 삶에 기꺼이 순응하는 맑은 겸손이 느껴졌다.
“오버룩 학교로 유학 오기 전에 몇 주 일찍 미국에 들어왔는데 그때부터 저를 보호해주셨던 분들이 계셨어요. 오머셔 성을 가진(Mr. David Ormesher, Mrs. Marry Ormersher) 부부인데, 학교가 문을 닫거나 방학이 되면 저는 그분들과 함께 지냈어요.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일을 놓고 고민하고 있던 제게 그분들이 일반공립학교로 전학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학교를 다 마치고 성인이 될 때까지 법적 보호자가 되어주겠다고 하셨고요. 그래서 저는 학교 기숙사에서 나와 그 댁으로 들어갔고 일반공립학교로 옮겨 제가 원하던 공부를 마음껏 할 수 있게 되었지요.”
기대치 않았던 분들의 도움으로 그는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 공립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특히, 고등학교 시절 그는 모범적인 우등생이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리더쉽도 남달랐다. 하버드, 프린스턴, MIT, 유펜 등 세계적인 명문 대학에 동시에 합격했고 그 중 하버드와 유펜에서는 전국장학생(National Scholar)과 벤자민 프랭클린 장학생에 뽑힐 정도로 우수했다.
“하버드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MIT 대학원에서 경영학과 조직학 박사과정을 공부했어요. 사실 고등학교 때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웃기죠? 환자의 환부를 보지 못하는 의사. 말하자면 어불성설인데 그때는 그냥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물론 공부할 방법을 찾아 온갖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포기했어요. 그러다 MIT에서 ‘장애인에게 장벽이 있는 직업’에 대해 연구를 했는데 당시 시각장애인 애널리스트(분석전문가)의 전례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 첫 성공사례가 되어야겠다. 결심을 했죠. 그리고 졸업 후 JP모건에 들어가 애널리스트로 일하다가 2003년 시각장애인으로써는 세계 최초로 금융 분야의 최종 자격증인 CFA 를 취득했어요. 그리고 현재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Brown Brothers Harriman)에서 재무분석가로 일하고 있고요.”
누구보다 성실했을 삶, 자신과의 사투로 날마다 치열했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모든 시간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이뤄낸 현재의 삶이 영화필름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그러나 그는 단호히 말한다. 그가 성취했던 그 모든 것 중에 가장 귀한 것은 아내와 더불어 이룬 그의 가정이라고.
“아내는 제가 장애인 선교단체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만났어요. 그레이스도 자원봉사자였거든요. 저야 어쩔 수 없이 장애를 가진 사람이 되었지만, 정상인이 장애인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장인,장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힘든 시기를 거쳐야 했지만, 결국엔 저희를 축복해주셔서 1996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이후, 오랜 기간 아이가 생기지 않아 여러 모양으로 고생했는데 거의 10년 만에 첫아기 데이비드를 얻었어요. 아이를 얻기 위해 그레이스가 겪었던 고충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파요. 사실 아이를 넷 정도는 낳고 싶었는데 하나로 만족해야 했죠. 살면서 그게 못내 아쉬웠는데 나중에 하나님께서 다른 방법으로 자녀를 보내주시더라고요. 인생의 퍼즐은 한 번에 맞춰지는 게 아니라잖아요.”
사실 그는 장애로 인해 남들이 겪지 않아도 될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야 했다. 뒤집어 생각하면 그 직면의 순간마다 많은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았고 특별한 사랑의 혜택을 누렸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어린 시절 자신의 법적 대리인이 되어주었던 Ormersher 부부의 사랑이 그랬고, 평생 자신의 눈과 발이 되어 준 아내의 사랑이 그렇고, 알게모르게 자신을 도왔던 무수한 무명의 손들이 그랬다. 누구 하나도 그는 쉬이 잊을 수가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봐요. 제가 어린 시절 미국으로 유학을 오지않고 그냥 한국에 살았더라면 지금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이라는 시에서처럼 인생의 모든 순간에는 내가 택하지 않은 삶에 대한 미련이나 동경이 있게 마련일 텐데 저는 확신하는 게 있어요. 제가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는 그 사실 하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그건 그저 하나의 선택에 불과했고 현재의 내가 있기까지는 내가 살아오면서 타인들로부터 받은 무수한 사랑과 도움 때문이었다는 것을요. 그래서 몇 해 전부터 그 고마움을 어떻게 다시 사회로 환원하는가에 대해 고민해왔어요.”
어린 시절 자신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기꺼이 보호자가 되어주었던 Ormersher 부부를 생각해보니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런 기회를 제공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삶의 막다른 곳에 주저앉아야만 하는 환경의 아이들, 기회를 얻지 못해 더 나은 내일에 대한 꿈조차 꿀 수 없는 아이들에게 한때 자신이 누렸던 혜택을 되돌려주고 싶었다.
“2012년 YANA(you Are Not Alone) 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어요. 그 단체가 한국에 있는 동명 보육원과 결연을 맺고 그곳에 맡겨진 아이 중 몇 명을 선발해 매년 미국으로 데리고 와서 더 넓은 세상을 볼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리고 미국에서 공부하겠다거나, 미국에 계시는 분 중 그 아이들의 법적 보호자(입양과는 다른)가 되기를 희망하는 가정과 연결해주기도 하구요. 2014년 그 첫 열매가 맺혔어요. 13살 예진이가 미국으로 건너왔고 저희 가정이 그 아이의 법적 보호자가 되어 지금까지 함께 살고 있어요. 예진이는 두 살 때 보육원에 맡겨져 11년을 살았던 아이였는데 다행히 명랑한 성격이라 이곳에서도 아주 잘 적응하고 있어요. 이제 9학년이 되었는데 공부도 무척 잘하고요.”
생면부지의 남을 내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사실 남편의 염원만으로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아내 그레이스 씨는 ‘사랑의 환원’이라는 남편의 뜻에는 쉽게 동의를 했지만, 막상 아이를 데려오자 적잖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예진이가 마음을 쉽게 열지 않았고 또 아내도 예진이를 잘 알 수 없었기에 크고 작은 갈등이 많았지요. 특히 사춘기에 접어든 나이라 서로 힘들었죠. 그런데 아내가 예진이를 좀 더 가까이 보듬을 수 있었던 것은 두 살 때부터 집단생활을 해 온 아이의 환경과 처지를 이해하면서부터였어요. 자신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던 보육원 생활, 그리고 무엇보다 12년 동안 부모의 사랑에 굶주려야 했던 예진이의 형편을 생각하며 아이의 입장이 되려고 애쓰다 보니 이제는 비교적 관계가 자연스러워지고 예진이도 마음을 많이 열게 되었지요. 저희 부부의 보살핌으로 한 아이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저희도 무척 고무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누렸던 기회와 고마움을 다시 누군가에게 되돌려 줄 수 있어서 감사하고요.”
자기가 받은 사랑에서 멈추지 않고 그 사랑이 또 다른 사람에게로 흘러가 재생산되기를 바라는 신순규 씨의 삶의 자세를 통해 인생의 참가치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된다.
“제 책에도 썼지만 제가 만일 딱 하루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저는 주변의 소소한 것들을 천천히 들여다 보고 싶어요. 곁에 있는 가족들의 얼굴, 주변 풍경들, 인사 나누는 이웃과 동료들 그리고 서로 잘 알지는 못해도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제게 주어진 그 하루 동안 실컷 보고 싶어요.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할 때, 그가 무엇을 했고 무엇이 되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그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사는 것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한 일을 하고, 일상에 감사하며 사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가치 있는 삶이거든요.”
제한된 시간에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을 수는 없지만, 그의 결론은 명료했다. 하버드 출신의 공인재무분석가로, 그리고 자신의 책을 발표하고 언론사에 고정 칼럼을 쓰는 작가로 사회에 적잖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가고 있지만, 무엇보다 그는 가족을 사랑하는 가장이고 일터에서 성실한 직원이며 그리고 받은 것을 되돌려 주며 살고 싶은 누군가의 이웃이라고 자신을 스스로 정의한다.
‘앞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터득한 그의 성찰을 통해
우리 삶을 재탐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아쉬운 인터뷰를 갈무리한다.
못다 나눈 이야기는 그의 책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을 통해 더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S.CAS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