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체전 12연패, 99 미스터코리아 대상,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대통령 훈장 백마장 수상, ‘웨이트 트레이닝 매뉴얼’ 의 저자이자 박사,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아놀드 클래식에서 90kg급 우승과 전 체급을 아우르는 대상인 그랑프리로 선정된 보디빌딩 계의 살아있는 전설 강경원 선수! 그는 전국체전에서 15번째 우승(12연패와 3연패)을 이룩하여 국내와 아마추어 무대에서는 더는 이룰 것이 없다는, 기록으로 설명되는 선수이다.
국내에서 더 오를 곳이 없자 과감히 미국 프로 보디빌더계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처음 출전한 아놀트 클래식 대회에서 우승함으로 프로 카드를 획득했지만 전국체전을 위해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예 미국으로 이주해서 2015 NPC 뉴욕&뉴저지 메트로폴리탄 챔피언십에서 오버롤을 거머쥐며 다시 프로 자격을 확보, 6월 댈러스에서 열린 2015 IFBB 유로파 게임 프로 챔피언십에서 프로데뷔와 동시에 우승을 한 뒤 올림피아 진출권을 획득했다. 이는 아시아인으로서 최초로 이룩한 쾌거였기에 더욱 값진 우승이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 그는 운동선수로서는 이미 은퇴해야 할 45세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아직도 거침없는 도전과 무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미주 한국인의 자긍심을 심어줄 그의 새로운 도전 이야기와 제2의 강경원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산 교훈이 될 그의 인생 풀 스토리를 S.CASA에서 재조명해본다.
어린 시절의 강경원, 방황했던 사춘기
올해 43세인 강경원은 서울 성동구 마장동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아들 강경원과 딸, 두 남매를 키우셨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태권도를 했으므로 특기생으로 고교를 진학하려 했으나 부친상에 부상까지 겹치면서 원하는 학교로 갈 수가 없던 강경원은 어려운 가정형편에 불만을 품게 된다.
아버지 대신 생계를 꾸려나가시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하면서 사춘기를 겪고 자신의 인생 목표마저 상실한다. 집 근처 서북공고에 입학한 그는 막연히 운동을 계속하고싶다는 생각으로 합기도 도장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남동에 살던 친구를 따라 헬스장에 구경을 갔는데 그곳에는 국가대표 선수도 많았다. 선배들이 시합을 나가고 시합성적을 가지고 대학교도 간다기에 그날부터 열심히 운동에 열중했다. 우연히 알통을 키워보고 싶은 마음에 친구 따라 구경하러 간 헬스장에서 미스터코리아 강경원의 진로가 결정된 것이다. 고교 2학년 때 춘계 선수권 대회를 시작으로 정식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 인천 체육 대학
강경원은 고교 시절부터 각종 대회에서 성적을 내자 보디빌딩 특기자로 대학진학을 목표로 정했다. 하지만 당시의 행정처리 시스템은 엉성한 데다가 혼자 힘으로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쁘셨던 어머니는 아들의 대학 진학에 대해 요즘 학부모처럼 신경을 써주질 못했다.
거기에 학교 측의 경험 부족으로 특기자증을 발급해주지 않아 대학진학에 실패한다. 그는 6개월 정도 방황했다. 하지만 다시 바벨을 잡은 그는 YMCA 보디빌딩 대회 일반부에서 3위에 입상하며 특기자 자격을 확보했고 인천대로 진학한다.
대학생이 되어 미스터 코리아 첫 도전을 하였으나 예선 탈락을 하고 군 복무를 위해 입대한 그는 운동경력과 남다른 체구 때문에 조교로 차출되어 오히려 1년 6개월간 개인 운동을 전혀 못 하게 된다. 운동선수에게 20대의 1년 6개월은 인생의 갈림길을 고민하게 만들 만큼 중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니버시티 대회에서 1등과 베스트 포즈상을 받는다.
대망의 1999년 미스터 코리아 우승
1999년 강경원은 미스터 코리아에서 우승한다. 말주변이 없는 그는 당시의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날아갈 것 같더군요. 특히 더 기뻤던 건 대회장에 처음 오신 어머니가 보시는 앞에서 우승해서였어요. 어머님, 동생을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많이 흘렸죠.”
하지만 우승의 기쁨은 잠시였고 그에겐 정상을 지켜야 하는 심리적 부담과 주변의 시선으로 스트레스가 쌓였다.
“미스터코리아가 되어 강경원이라는 이름이 알려지니 좋은 점보다는 일단 불편했어요. 사소한 행동과 말이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더군요. 유명세라는 걸 처음으로 치룬거죠.”
슬럼프 그리고 아시안 게임 금메달 획득
이런저런 이유로 강경원은 첫 번째 슬럼프를 겪었다. 그리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보디빌딩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는데 국가대표가 되면서 슬럼프에서 빠져나왔다. 2002년 아시안게임 보디빌딩 부분에는 전체 45개국 중 20여 개국이 참가했는데 몸집이 좋은 중동 선수들의 대세였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 중량급에서 한국 선수가 우승하는 것은 어렵다는 예상을 깨고 강경원은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금메달 강경원! 발표를 듣고 무대로 나가는데 울음을 참느라고 혼났어요. 태극기 올라가면서 애국가가 들리는데 그 기분은 지금도 뭐라 표현이 안 되네요.”
금메달을 목에 걸면 연봉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그의 수입을 물어봤다.
“국가대표로 나가서 금메달을 땄다고 해서 연봉이 갑자기 높아지진 않아요. 사실은 전국 체전 결과가 더 중요해요. 전국체전 평가에 따라 연봉이 정해지거든요.”
그는 총 17회의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성적을 종합하면 25세 때 4위, 26세 때 3위를 한 후 27세였던 99년 첫 우승을 했다. 99년부터 체전에서 12연패를 달성, 2012년과 2013년에도 연속우승을 거두었다. 15년동안 14회의 우승을 한 셈이다.
세계 선수권 출전을 목표로 두고 연습 중인 그에게 어느 날 아놀드 클래식이 눈에 들어왔다. 아놀드 클래식은 여러 종목이 있는 일종의 스포츠 페스티발인데 선수와 팬, 스포츠 기업들이 축제를 벌이는 분위기이다. 몇 번 구경을 하다 보니 출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아시아 선수권에서 경쟁하던 중동 선수들이 아놀드 클래식에서 입상하자 욕심이 생긴 거였다.
“시합 신청하고, 20대 중반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열심히 연습했어요. 처음 나가는 대회라서 순수한 마음으로 운동에만 집중했습니다. 다시 신인이 된 느낌이라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강경원의 목표는 90kg급 탑 5였다. 세계 선수권에서 거둔 개인 최고 성적이 7위였기 때문에 또 하나의 세계대회인 아놀드 클래식에서는 5위를 노렸다. 하지만 결과는 예선 TOP 5을 거쳐 1위를 한다. 함께 참여한 이승철 선수도 100kg급에서 우승했고 두 선수는 아놀드 클래식 체급별 우승자가 되었다.
대망의 아놀드 클래식 그랑프리
“저는 탑 5위를 넘어 1위 우승만으로 이미 목표 이상을 달성한 거였어요. 충분히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죠. 가족이 보고 싶고, 선배님들, 동료와 후배들, 그리고 저를 도와주신 많은 분들과 친구들을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랑프리까지 탈 줄은 몰랐어요. 그때 기분은, 완전 멍했죠. 현실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랑프리를 수상한 강경원에게 아놀드 슈월츠네거가 직접 강경원에게 인터뷰했다. 그에겐 평생 잊지 못할 영광이다.
아내와의 만남.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운동만 하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여자 한 번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기에 결혼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했다. 33세였던 2005년 처음 오픈한 체육관에서 11세 연하인 22세인 아내를 만나 2년 후인 2007년도에 결혼했다. 아내에게 특별히 고마운 점은 본래 아내가 미국에 가고 싶은 맘이 컸다. 우연히 미국에 갈 기회가 오자 아내가 용기를 줬다. ‘안되더라도 가서 부딪혀보자, 안 가고 후회하는 것보다 가서 해본 뒤에 후회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면서 설득했다고 한다. 아들에게도 보디빌딩을 시킬거 냐는 질문에 혹시 한다면 말리고 싶다고 한다. 그만큼 운동이 힘들다는 얘기다. 대신 운동 신경이 발달한 아들이 혹시 다른 스포츠를 원한다면 시키겠다고 한다.
“아내는 이해심이 넓고 정말 착해요. 제가 운동하는 것을 많이 이해해주고 생활 패턴 자체가 다 저한테 맞춰져 있어서 식단도 보디빌딩 식단으로 해주죠. 아내를 잘만나서 마음 편안하게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강경원의 꿈 그리고 미래
그는 운동 외엔 앞도 옆도 모르고 살아왔다. 오로지 24시간을 모두 운동과 휴식에 사용하고 있다. 노는 것도 모르고 술도 안 마신다. 운동을 위해 살아온 사나이 강경원. 그는 2014년 11월 25일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왔다. 애초 목표는 한국에서 아마추어 시합에도 출전하고 미국은 왔다 갔다할 생각이었는데 실업팀하고 얘기가 잘 안돼서 은퇴 아닌 은퇴를 하고 미국 프로카드를 받기 위해 MBC아마추어 대회에서 다시 시합을 뛰었다.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자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프로인데 왜 아마추어에서 뛰고 있냐’ 여론이 일어나서 프로연맹이랑 아마추어 연맹에 메일을 보내어 프로선수로 인정을 받기까지 마음고생도 했다. 프로가 되어 달라스 유로파 대회에 나가서 1등을 한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늘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미국이란 나라는 거침없이 달리는 강경원에겐 좋은 도전 장소가 되어주었다.
미국에 대한 생각
한국에서 석 박사까지 공부한 강경원은 미국에 와서 운동도 운동이지만, 부족한 영어공부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에겐 공부할 시간이 없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지니 더 큰 꿈을 위해 운동에만 열중해야 하므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현실이다. 대회를 준비하는 그는 현재 온동할 시간도 부족하여 돈을 벌 수 있는 개인강습도 못 하는 상황이다. 갑자기 생활비 등은 어디서 조달하나 궁금해진다. 그는 ‘다이나믹이라는 보충제 회사에서 스폰서를 받고 있다. 그리고 몬스터마크에서도 후원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 벌었던 돈으로 지금 생활 중이다’ 라고 대답한다. 주요 대회만 마치면 개인 PT 헬스장을 차릴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 와서 바뀐 생각과 각오
강경원은 아내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아놀드 클레식 나갈 때쯤 알게 되었는데 미국에 오고 나서 정신적으로 힘이 들고 기댈 곳이 없다 보니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아내가 한 말 중에 ‘미국에 와서 당신이 잘나서 이런 대회에 나가게 된 게 아니다.’ 처음 그 말을 들을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꿈에 부풀어 무서운 게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존심 상하는 일도 겪었다. 미국이란 나라에 와서 사는 이방인의 현실을 몸으로 느끼며 적응 중이다. 주요 대회를 마치면 제자인 고경민 군이 다니는 대학에서 강의도 들으면서 영어공부도 할 계획이라는 강경원 선수는 아직도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그가 이뤄낼 새로운 꿈을 향해서 말이다.
아놀드 클래식 대회란?
1989년에 시작된 대회로 일세를 풍미했던 보디빌더이자 헐리우드의 톱스타,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주지사였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관하는 스포츠 이벤트로 체조와 탁구, 레슬링, 무술, 양궁, 파워리프팅, 양궁 등의 종목에서 경쟁이 이루어진다. 보디빌딩 종목의 경우, 아놀드 클래식의 위상은 엄청나다. 미스터 올림피아와 더불어 세계 보디빌딩 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양대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미스터 올림피아는 아놀드 슈워제너거가 7번 우승한, 시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보디빌딩 대회다. 출전자격 자체가 극히 까다로워 세계대회(아마추어 부문)에서 전 체급 통합우승(오버롤)을 차지해야 프로카드를 획득하고, 이후 100개가 넘는 프로대회에서 일정 수준의 승점을 획득해야 올림피아 무대에 설 수 있어서 강경원 선수의 출전 이전에는 한국선수 자격으로 이 무대를 밟아본 선수가 없을 정도이다.
■ 강경원식 다이어트 따라하기
비타민과 섬유질 섭취를 위한 오이, 브로콜리, 토마토, 양파, 고구마, 계란흰자, 닭가슴살만 먹는다. 고구마는 오븐에 굽고 양파, 브로콜리는 반드시 물에 데쳐서 먹는다. 보통 식사시간 간격은 3~4시간 정도로 가지며 하루에 4끼에서 5끼를 먹는다. 즉 많은 음식을 한번에 섭취하는 것 보다 여러번 나눠서 섭취하는게 좋다.
S.CASA 편집부
전국체전 12연패, 99 미스터코리아 대상,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 대통령 훈장 백마장 수상, ‘웨이트 트레이닝 매뉴얼’ 의 저자이자 박사, 미국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의 아놀드 클래식에서 90kg급 우승과 전 체급을 아우르는 대상인 그랑프리로 선정된 보디빌딩 계의 살아있는 전설 강경원 선수! 그는 전국체전에서 15번째 우승(12연패와 3연패)을 이룩하여 국내와 아마추어 무대에서는 더는 이룰 것이 없다는, 기록으로 설명되는 선수이다.
국내에서 더 오를 곳이 없자 과감히 미국 프로 보디빌더계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처음 출전한 아놀트 클래식 대회에서 우승함으로 프로 카드를 획득했지만 전국체전을 위해 포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아예 미국으로 이주해서 2015 NPC 뉴욕&뉴저지 메트로폴리탄 챔피언십에서 오버롤을 거머쥐며 다시 프로 자격을 확보, 6월 댈러스에서 열린 2015 IFBB 유로파 게임 프로 챔피언십에서 프로데뷔와 동시에 우승을 한 뒤 올림피아 진출권을 획득했다. 이는 아시아인으로서 최초로 이룩한 쾌거였기에 더욱 값진 우승이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 그는 운동선수로서는 이미 은퇴해야 할 45세의 나이가 무색하도록 아직도 거침없는 도전과 무한 질주를 계속하고 있다. 미주 한국인의 자긍심을 심어줄 그의 새로운 도전 이야기와 제2의 강경원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산 교훈이 될 그의 인생 풀 스토리를 S.CASA에서 재조명해본다.
어린 시절의 강경원, 방황했던 사춘기
올해 43세인 강경원은 서울 성동구 마장동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식당을 운영하면서 아들 강경원과 딸, 두 남매를 키우셨다. 중학교 3학년 때까지 태권도를 했으므로 특기생으로 고교를 진학하려 했으나 부친상에 부상까지 겹치면서 원하는 학교로 갈 수가 없던 강경원은 어려운 가정형편에 불만을 품게 된다.
아버지 대신 생계를 꾸려나가시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하면서 사춘기를 겪고 자신의 인생 목표마저 상실한다. 집 근처 서북공고에 입학한 그는 막연히 운동을 계속하고싶다는 생각으로 합기도 도장을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남동에 살던 친구를 따라 헬스장에 구경을 갔는데 그곳에는 국가대표 선수도 많았다. 선배들이 시합을 나가고 시합성적을 가지고 대학교도 간다기에 그날부터 열심히 운동에 열중했다. 우연히 알통을 키워보고 싶은 마음에 친구 따라 구경하러 간 헬스장에서 미스터코리아 강경원의 진로가 결정된 것이다. 고교 2학년 때 춘계 선수권 대회를 시작으로 정식으로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한 인천 체육 대학
강경원은 고교 시절부터 각종 대회에서 성적을 내자 보디빌딩 특기자로 대학진학을 목표로 정했다. 하지만 당시의 행정처리 시스템은 엉성한 데다가 혼자 힘으로 생계를 책임지느라 바쁘셨던 어머니는 아들의 대학 진학에 대해 요즘 학부모처럼 신경을 써주질 못했다.
거기에 학교 측의 경험 부족으로 특기자증을 발급해주지 않아 대학진학에 실패한다. 그는 6개월 정도 방황했다. 하지만 다시 바벨을 잡은 그는 YMCA 보디빌딩 대회 일반부에서 3위에 입상하며 특기자 자격을 확보했고 인천대로 진학한다.
대학생이 되어 미스터 코리아 첫 도전을 하였으나 예선 탈락을 하고 군 복무를 위해 입대한 그는 운동경력과 남다른 체구 때문에 조교로 차출되어 오히려 1년 6개월간 개인 운동을 전혀 못 하게 된다. 운동선수에게 20대의 1년 6개월은 인생의 갈림길을 고민하게 만들 만큼 중요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유니버시티 대회에서 1등과 베스트 포즈상을 받는다.
대망의 1999년 미스터 코리아 우승
1999년 강경원은 미스터 코리아에서 우승한다. 말주변이 없는 그는 당시의 기분을 이렇게 표현했다.
“날아갈 것 같더군요. 특히 더 기뻤던 건 대회장에 처음 오신 어머니가 보시는 앞에서 우승해서였어요. 어머님, 동생을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많이 흘렸죠.”
하지만 우승의 기쁨은 잠시였고 그에겐 정상을 지켜야 하는 심리적 부담과 주변의 시선으로 스트레스가 쌓였다.
“미스터코리아가 되어 강경원이라는 이름이 알려지니 좋은 점보다는 일단 불편했어요. 사소한 행동과 말이 사람들의 얘깃거리가 되더군요. 유명세라는 걸 처음으로 치룬거죠.”
슬럼프 그리고 아시안 게임 금메달 획득
이런저런 이유로 강경원은 첫 번째 슬럼프를 겪었다. 그리고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보디빌딩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는데 국가대표가 되면서 슬럼프에서 빠져나왔다. 2002년 아시안게임 보디빌딩 부분에는 전체 45개국 중 20여 개국이 참가했는데 몸집이 좋은 중동 선수들의 대세였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 중량급에서 한국 선수가 우승하는 것은 어렵다는 예상을 깨고 강경원은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된다.
“금메달 강경원! 발표를 듣고 무대로 나가는데 울음을 참느라고 혼났어요. 태극기 올라가면서 애국가가 들리는데 그 기분은 지금도 뭐라 표현이 안 되네요.”
금메달을 목에 걸면 연봉이 높아지지 않았을까? 그의 수입을 물어봤다.
“국가대표로 나가서 금메달을 땄다고 해서 연봉이 갑자기 높아지진 않아요. 사실은 전국 체전 결과가 더 중요해요. 전국체전 평가에 따라 연봉이 정해지거든요.”
그는 총 17회의 전국체전에 출전했다. 성적을 종합하면 25세 때 4위, 26세 때 3위를 한 후 27세였던 99년 첫 우승을 했다. 99년부터 체전에서 12연패를 달성, 2012년과 2013년에도 연속우승을 거두었다. 15년동안 14회의 우승을 한 셈이다.
세계 선수권 출전을 목표로 두고 연습 중인 그에게 어느 날 아놀드 클래식이 눈에 들어왔다. 아놀드 클래식은 여러 종목이 있는 일종의 스포츠 페스티발인데 선수와 팬, 스포츠 기업들이 축제를 벌이는 분위기이다. 몇 번 구경을 하다 보니 출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아시아 선수권에서 경쟁하던 중동 선수들이 아놀드 클래식에서 입상하자 욕심이 생긴 거였다.
“시합 신청하고, 20대 중반으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열심히 연습했어요. 처음 나가는 대회라서 순수한 마음으로 운동에만 집중했습니다. 다시 신인이 된 느낌이라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강경원의 목표는 90kg급 탑 5였다. 세계 선수권에서 거둔 개인 최고 성적이 7위였기 때문에 또 하나의 세계대회인 아놀드 클래식에서는 5위를 노렸다. 하지만 결과는 예선 TOP 5을 거쳐 1위를 한다. 함께 참여한 이승철 선수도 100kg급에서 우승했고 두 선수는 아놀드 클래식 체급별 우승자가 되었다.
대망의 아놀드 클래식 그랑프리
“저는 탑 5위를 넘어 1위 우승만으로 이미 목표 이상을 달성한 거였어요. 충분히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죠. 가족이 보고 싶고, 선배님들, 동료와 후배들, 그리고 저를 도와주신 많은 분들과 친구들을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랑프리까지 탈 줄은 몰랐어요. 그때 기분은, 완전 멍했죠. 현실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랑프리를 수상한 강경원에게 아놀드 슈월츠네거가 직접 강경원에게 인터뷰했다. 그에겐 평생 잊지 못할 영광이다.
아내와의 만남.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운동만 하는 단조로운 생활 속에서 여자 한 번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었기에 결혼은 비교적 늦은 나이에 했다. 33세였던 2005년 처음 오픈한 체육관에서 11세 연하인 22세인 아내를 만나 2년 후인 2007년도에 결혼했다. 아내에게 특별히 고마운 점은 본래 아내가 미국에 가고 싶은 맘이 컸다. 우연히 미국에 갈 기회가 오자 아내가 용기를 줬다. ‘안되더라도 가서 부딪혀보자, 안 가고 후회하는 것보다 가서 해본 뒤에 후회하는 게 더 낫지 않겠냐’면서 설득했다고 한다. 아들에게도 보디빌딩을 시킬거 냐는 질문에 혹시 한다면 말리고 싶다고 한다. 그만큼 운동이 힘들다는 얘기다. 대신 운동 신경이 발달한 아들이 혹시 다른 스포츠를 원한다면 시키겠다고 한다.
“아내는 이해심이 넓고 정말 착해요. 제가 운동하는 것을 많이 이해해주고 생활 패턴 자체가 다 저한테 맞춰져 있어서 식단도 보디빌딩 식단으로 해주죠. 아내를 잘만나서 마음 편안하게 운동에만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강경원의 꿈 그리고 미래
그는 운동 외엔 앞도 옆도 모르고 살아왔다. 오로지 24시간을 모두 운동과 휴식에 사용하고 있다. 노는 것도 모르고 술도 안 마신다. 운동을 위해 살아온 사나이 강경원. 그는 2014년 11월 25일 가족을 이끌고 미국으로 왔다. 애초 목표는 한국에서 아마추어 시합에도 출전하고 미국은 왔다 갔다할 생각이었는데 실업팀하고 얘기가 잘 안돼서 은퇴 아닌 은퇴를 하고 미국 프로카드를 받기 위해 MBC아마추어 대회에서 다시 시합을 뛰었다.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자 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저 사람은 프로인데 왜 아마추어에서 뛰고 있냐’ 여론이 일어나서 프로연맹이랑 아마추어 연맹에 메일을 보내어 프로선수로 인정을 받기까지 마음고생도 했다. 프로가 되어 달라스 유로파 대회에 나가서 1등을 한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그는 늘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미국이란 나라는 거침없이 달리는 강경원에겐 좋은 도전 장소가 되어주었다.
미국에 대한 생각
한국에서 석 박사까지 공부한 강경원은 미국에 와서 운동도 운동이지만, 부족한 영어공부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에겐 공부할 시간이 없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무겁게 느껴지니 더 큰 꿈을 위해 운동에만 열중해야 하므로 공부할 시간이 부족한 현실이다. 대회를 준비하는 그는 현재 온동할 시간도 부족하여 돈을 벌 수 있는 개인강습도 못 하는 상황이다. 갑자기 생활비 등은 어디서 조달하나 궁금해진다. 그는 ‘다이나믹이라는 보충제 회사에서 스폰서를 받고 있다. 그리고 몬스터마크에서도 후원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 벌었던 돈으로 지금 생활 중이다’ 라고 대답한다. 주요 대회만 마치면 개인 PT 헬스장을 차릴 계획을 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에 와서 바뀐 생각과 각오
강경원은 아내 따라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존재를 아놀드 클레식 나갈 때쯤 알게 되었는데 미국에 오고 나서 정신적으로 힘이 들고 기댈 곳이 없다 보니 하나님께 더욱 의지하게 되었다. 아내가 한 말 중에 ‘미국에 와서 당신이 잘나서 이런 대회에 나가게 된 게 아니다.’ 처음 그 말을 들을 땐 별 생각이 없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꿈에 부풀어 무서운 게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자 자존심 상하는 일도 겪었다. 미국이란 나라에 와서 사는 이방인의 현실을 몸으로 느끼며 적응 중이다. 주요 대회를 마치면 제자인 고경민 군이 다니는 대학에서 강의도 들으면서 영어공부도 할 계획이라는 강경원 선수는 아직도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그가 이뤄낼 새로운 꿈을 향해서 말이다.
아놀드 클래식 대회란?
1989년에 시작된 대회로 일세를 풍미했던 보디빌더이자 헐리우드의 톱스타, 그리고 캘리포니아주 주지사였던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주관하는 스포츠 이벤트로 체조와 탁구, 레슬링, 무술, 양궁, 파워리프팅, 양궁 등의 종목에서 경쟁이 이루어진다. 보디빌딩 종목의 경우, 아놀드 클래식의 위상은 엄청나다. 미스터 올림피아와 더불어 세계 보디빌딩 계에서 가장 권위가 있는 양대 이벤트이기 때문이다. 미스터 올림피아는 아놀드 슈워제너거가 7번 우승한, 시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보디빌딩 대회다. 출전자격 자체가 극히 까다로워 세계대회(아마추어 부문)에서 전 체급 통합우승(오버롤)을 차지해야 프로카드를 획득하고, 이후 100개가 넘는 프로대회에서 일정 수준의 승점을 획득해야 올림피아 무대에 설 수 있어서 강경원 선수의 출전 이전에는 한국선수 자격으로 이 무대를 밟아본 선수가 없을 정도이다.
■ 강경원식 다이어트 따라하기
비타민과 섬유질 섭취를 위한 오이, 브로콜리, 토마토, 양파, 고구마, 계란흰자, 닭가슴살만 먹는다. 고구마는 오븐에 굽고 양파, 브로콜리는 반드시 물에 데쳐서 먹는다. 보통 식사시간 간격은 3~4시간 정도로 가지며 하루에 4끼에서 5끼를 먹는다. 즉 많은 음식을 한번에 섭취하는 것 보다 여러번 나눠서 섭취하는게 좋다.
S.CASA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