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페미니즘을 전하는 살림이스트 유니언 신학대 현경 교수

신간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 통해

보살페미니즘을 전하는 살림이스트 유니언 신학대 현경 교수

헤어스타일과 화장, 옷차림은 물론 자신의 생활 공간 모든 구석을 세심하게 꾸미는 멋쟁이, 나이든 이의 원숙함과 여전히 창창한 육신이 뿜어내는 젊은 기운이 동시에 전해진다.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르려 애쓰지 않지만 놓칠 수 없는 생의 중심은 단단히 움켜잡고 있는 강단이 보인다. 현경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리고 신간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을 읽고 나서 받은 기자의 느낌이다. 한마디로 현경은 ‘저렇게 나이를 먹어가면 좋겠다’라는 부러움을 자연스레 불러일으키는 사람이다. 그녀는 온전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고집이 있지만 남의 말을 들을 줄 알고 변화에 순응하지만, 정신의 노쇠를 허락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에코 농장 실습 에서 유니언 학생들과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불교도. 세계인이 모인 성령 컨퍼런스에서 굿판을 벌인 파격적인 신학자. 모성과 살림을 강조하는 페미니스트로 현경은 크고 작은 논쟁의 중심에 있었다. 남에게 관심을 얻기 위해 한 일도 아니었고 그 논쟁을 의도적으로 만든 적은 없다. 하지만 현경은 논쟁을 피해 본 적도 없다. 그는 생각한 대로 말하고, 믿는 대로 행동한다. 현경에겐 그것이 학자로서의 양심이고, 종교인으로서의 믿음이고, 여성으로서의 자부심이었다. 무엇보다 지위와 젠더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궁극적으로 누려야 할 자유였다. 그런 현경의 태도는 수많은 적을 만들어냈지만, 그 수 이상으로 많은 지지자와 열성 팬들이 생겼다. 특히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성차별이 만연한 한국 여성들에게 남성의 시각, 더 큰 의미로 ‘남의 눈’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가는 현경은 자유롭고 당당한 여성의 롤모델이 되었다.


유니온 신학대 동료 교수들과


현경은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뉴욕의 유니언 신학교에서 ‘아시아 여성 해방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1년 세계교회협의회 총회에서 전통 무속 의식인 초혼제를 선보이며 아시아 여성의 영성 문제를 제기하여 세계신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의 주제 강연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논쟁적인 강연’으로 거론되면서 현경은 극한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다.

보수적인 한국의 교계에서 살해위협까지 받았고 학생운동을 함께 했던 애인이자 동지였던 남편과도 헤어지게 되는 개인적인 아픔까지 겪는다. 현경은 이에 굴하지 않고 여성을 억압하는 남성 위주의 신학을 비판하며 여성 신학, 제3세계 신학을 주장해왔다. 1989년부터 7년간 이대 기독교학과 교수로, 하버드대학교 ‘종교와 여성’ 분야 초빙 교수로 가르쳤고, 1996년 세계 진보 신학의 명문 유니언 신학교의 아시안 여성 최초 종신교수로 부임했다.

현경은 이후 진보적인 학풍의 유니언 신학교 내에서도 논란을 일으킨 행보를 계속했다.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1999년 히말라야의 수도원에서 머리를 깎고 수행을 하고, 이슬람교를 공부하기 위해 2006년부터 1년간 이슬람 17개국을 순례하며 무슬림 여성 200여 명을 만나는 등 종교 간 화해를 위해 애썼다. 세계평화위원회 자문위원이고 평화통일 운동단체 ‘조각보’의 공동대표다.

신학을 퍼포먼스와 제의로 표현하는 ‘신학적 예술가’이며 에코 페미니스트, 해방신학자, 환경 운동가, 평화운동가다. 2015년 5월, 노벨평화상을 받은 각국 여성 수상자 30명과 함께한 ‘위민 크로스 디엠제트’(Women Cross DMZ) 행사는 현경이 추구해 온 다양한 운동들이 한자리에서 표출된 대표적인 이벤트였다.


산타페 여성 영성 리트리트 / 졸업식에서 제자들과


현경은 스테디셀러인 <미래에서 온 편지>를 비롯해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다시 태양이 되기 위하여> 등 다수의 저서를 발표해왔다. 새로 나온 책 <서울, 뉴욕, 킬리만자로 그리고 서울>에서도 이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종교와 여성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주제에 대한 현경 특유의 솔직함과 에너지가 넘쳐난다.

마치 그동안의 거침 없는 행보마저도 충분하지 않았다는 듯 “꿈에 책의 신이 나타나 잔인할 정도로 솔직히 쓰여야 한다”고 했다는 후기가 붙을 만큼 아끼지 않고 자기 생각을 풀어놓는다. 거기에 60살이라는 의미 있는 나이를 지나는 저자에게서 “30대, 40대와 다른 좀 더 진화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성찰과 각오도 엿보인다. 현경을 롤모델로 여기고 멘토로 존경하는 젊은 여성들이 아닌 그와 비슷한 혹은 윗세대 여성들이 특히 책을 읽으며 크게 고무될 수 있는 부분이다.

60이라는 나이에 대해 현경은 “기존의 컴퓨터 프로그램을 완전히 다 삭제하고 내가 원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다시 다운로드하여 새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다. 그것은 단순한 업데이트가 아니고 “어쩌면 내게는 지난 60년이 연습과 준비였고 앞으로 60년이 진짜 인생을 사는 멋진 신세계”라는 기대감이기도 한다. 동아시아의 우주론에 의하면 환갑의 나이는 인생의 의무가 끝난 시기이며 남은 삶은 덤에 불과했다. 하지만 요즘 세상에 환갑잔치를 벌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자신을 ‘늙은이’로 여기는 60대는 없다. ‘60대는 새로운 40대’라고 주문을 외우며 노년이 아닌 장년의 삶을 살아간다. 현경은 그 수준을 넘어 자신이 ‘0살’이 되었다고 여기며 새로운 인생을 맞을 준비에 거의 들떠 있다.

한편, 늘 당당해 보이는 현경의 모습에 관해, 인터뷰했던 기자로서 꼭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이 있다. 평소 글이나 말에서 자칫 오해살 수도 있는 표현도 그가 스스럼없이 하는 것은 ‘남들이 뭐라고 하건 나는 눈치 안 보고 신경 안 쓴다’ 식의 오만과 무신경은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남의 시선을 의식하기보다는 자기 내면에 충실함”을 늘 강조해 온 태도의 결과물이기도 하지만 그에겐 “오해를 한다면 해석하기 나름이다. 잘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다. 나랑 대화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라는 자신감이 바탕에 있다. 예를 들어 현경이 강조하는 ‘모성’과 ‘살림’이란 단어는 강요된 모성과 여성 혼자만 떠안는 가사에 환멸을 느끼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심하게 싫어할 단어들이다. 당연히 현경이 말하는 모성은 그 모성만이 아니고, 살림은 그 살림만이 아니다. 그의 설명을 듣고 나면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할 광의의 개념들이다. 이번 책에서는 더욱 과감한 표현도 등장한다. “이슬람 여성들은 맞서 싸우려 드는 서양의 페미니즘보다는 한국의 기생 문화에서 배울 게 더 많다고 얘기해.”

장담하지만, 악의를 가진 누군가가 글의 앞뒤 문맥을 자르고 딱 이 구절만 따로 발췌해서 ‘현경 교수가 한 말이다’라고 SNS에 올리면 그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에 동의하고 매춘 문화를 옹호하는 것이냐’라는 식의 집중포화를 맞을 수도 있다. SNS의 험악한 단면을 알고 있는 독자들은 공감할 것이다. 현경이 종교적인 이유로 험한 공격을 받았었지만, 일부 과격한 페미니스트들의 도그마는 종교의 도그마에 버금가기 때문이다. 그런 기자의 걱정에 당사자는 오히려 아주 태연하다.

“젊은 페미니스트들 대부분 나에게 동의해요. 그런 공격 별로 받지 않아요. 그리고 혹시 그렇다 하더라도 원래 젊을 때는 당연히 그런 거죠. 과격하게 공격도 하고 싸우고 그래야죠.”

그런데도 오해가 풀리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나를 오해할 권리가 있고, 나는 해명 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 현경의 태도다. 그에게, 지금 정말 의식하는 대상은 따로있다.

“이제는 남이 뭐라 하건 별문제가 안 돼. 내 안의 진아. 신의 목소리. 신의 눈에 나는 어떻게 비칠까. 그 거울이 제일 중요하지.”

신간의 제목에서 보이듯이 <서울…>은 현경이 김수진 작가와 세계 곳곳을 함께 여행하며 대화 한 기록의 모음이다. 두 사람의 생물학적 탄생지인 서울, 현재 현경의 삶의 터전인 뉴욕, 모든 인류의 출발점인 동아프리카를 거쳐 다시 서울로 돌아오는 여정은 각각 운명과 선택 그리고 회귀라는 챕터로 정리된다.

이 책이 이전의 저서와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면 현경의 목소리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30대 여성 작가인 김수진 씨를 통해 전해지는 형식이다. 그리고 1년을 목표로 했던 출판이 4년이라는 예상하지 못한 긴 산고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책이 나오기까지 이렇게 긴 진통을 겪은 것은 현경이 ‘자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애초 출판사의 기획대로 현경이 어린 세대의 작가에게 멘토로서 대화하는 형식이었다면 훨씬 수월했을 과정이다.

현경은 그러나 그 형식이 부담스러웠다. “나는 아직 깨달은 자도 아니고 내 삶의 많은 문제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고 매일 조금씩 더 배우고 더 깨우쳐 나가는 과정”에 있을 뿐이었다. 이미 유명한 학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말이 저절로 권위를 얻게 되고 작가는 순순히 그 말을 옮기는 일은 피하고 싶어서 더 많은 이해와 숙성의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현경이 천성적으로 ‘꼰대’가 될 수 없는 사람임을 보여준다. 게다가 뜻하지 않게 30년 가까이 어린 세대 작가와 다른 코드가 많았다.


유니온 신학대학원 제자들과 세계 종교학회 여성들을 위한 텐트에서


현경과 작업한 작가가 그 세대를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를 통해 보인 지금의 20~30대는 젊은이다운 치열함이 부족했다. 주변과 쉽게 화해하며 순응하는 듯했다. “다 그렇죠”, “뭐 그럴 수도 있죠”라는 식으로 60대인 현경보다 오히려 더 세상에 초연하고 달관한 듯한 태도를 보였다. 현경은 갑자기 어려워진 가정환경 때문에 독하게 공부해 장학금을 받았다. 대학 시절 기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정도로 열성적인 운동권이었다. 기존의 종교인들에게 살해 위협을 받아도 위축되지 않았다.

남성 우월주의, 가부장 사회에서 대항했던 1세대 페미니스트다. 미국에서 교수가 된 후에도 인종과 성별에 대한 차별에 맞서면서 지금의 위치를 만들었다. 그처럼 투사로서의 기질이 다분한 현경에게 작가의 그런 모습들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지적했고 작가는 불편해했다. 만남의 초반에 대화는 진전 없이 맴돌았다. 함께 책을 만들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게 갈등과 오해의 과정을 거친 후에야 서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면서 거칠 것이 없는 현경은 그런 면에서 기질적으로 꼰대다. 요즘 기성세대는 어린 세대에게 말조심이 습관화되어 있다. 꼰대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전전긍긍한다. 주차장 알바생에게 무식한 모녀가 갑질을 하면 순순히 무릎을 꿇는 것이 요즘 세대들이다. 그걸 지적하는 여교수에게 젊은 세대는 물론 같은 세대들이 앞장서서 ‘꼰대’라고 손가락질을 하는 세태다.

자신보다 어린 세대에겐 무조건 이해하는 척하고 다독이고, 그도 아니면 그냥 무시한 것이 쿨한 기성세대라는 인식이다. 현경은 그런 기성세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겪었던 갈등인셈이다. 하지만 현경과 작가 모두 인정했듯이, 유익한 시행착오였고 꼭 치뤄야 했던 수업료였다. 4년간의 여행 끝에 한 명은 무뎌지고 한 명은 날카로워지면서 서로 닮아갔다.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서로 접점을 찾은 후에 우리는 사회 변혁, 연애, 섹스, 신성, 우주에 대해 막히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래서 사람은 만나고 이해하고 친구가 되고 사랑해야 하나 보다. 인생은 끊임없는 변화이고 그래서 살아볼 만하다.”



책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현경은 또 한 번 인생의 평범한 진리를 되새긴 셈이다. 그렇게 젊은 작가와 함께 3개 대륙을 여행하고,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거치며 4년간이나 대화한 기록물인 <서울…>에서 현경이 결국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모습은 어떤 걸까? 다시 정리해 보는 시간이었어요. 살아가는 모든 만물에 대한 연민과 사랑에 근거한 페미니즘, 그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앎에 근거한 페미니즘, 욕하고 손가락질하기 보다는 다독여주며 같이 잘살아 보자는 페미니즘… 나는 이러한 페미니즘을 살림이스트 보살 페미니즘이라고 부르고 싶어요. 만약 신이 허락한다면 앞으로 60년의 삶은 살림이스트 보살 페미니즘이라는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해서 살고 싶어요.”


기획 Jennifer Lee 글 Won Young Park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