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파일러, 배우가 되다.” 김윤희라는 연극의 2막

2019-04-15 20:33

“프로파일러, 배우가 되다.” 김윤희라는 연극의 2막

(사진출처=본사취재)

프로파일러는 일반적 수사 기법으로는 해결하기 힘든 수사에 투입되어 용의자를 추정한다. 서울 지방 경찰청의 프로파일러 김윤희의 경력은 화려했다.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마포 연쇄 성폭행 사건,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 등에 참여했다. 그러나 8년 차가 된 프로파일러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썼고, 김윤희라는 연극의 제2막이 열렸다. 그 시작은 음악극 <체홉의 봄.여름.가을.겨울>, 그 후 장르 드라마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시그널>의 출연 배우이자 보조 작가로 얼굴을 알리며, 현재 다양한 작품을 통해 배우로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독특한 이력, 어디로 흘러갈지 종잡을 수 없는 매력의 배우 김윤희를 만나봤다.


(사진출처=본사취재)

먼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프로파일러가 어떤 직업인지 간단히 설명 부탁드려요.

프로파일러의 주요 업무는 사건이 발생하면 현장에 남겨져 있는 유, 무형의 증거들을 통해서 범인을 추정하는 거예요. 특정한 바운더리와 수사 방향을 설정해 수사망을 좁히고 범죄 상을 구체화 시켜 사건 해결 방향을 제시해요. 


사실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매체에서 범죄사건을 해결하는 멋진 프로파일러의 모습과 다르게, 실제 그 이면에는 분명 고충 또한 있었겠죠?

그렇죠. 제가 업무상 만나야 하는 사람들은 행복하기 힘든 사람들이었어요. 범죄자, 피해자 그리고 유가족,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들까지 범죄 사건 앞에서는 웃음을 잃죠. 저 역시 항상 슬프고 부정적인 감정을 스스로 컨트롤 하면서 일을 해야 했어요. 또 제안의 이상한 감정들과 마주칠 때가 있었어요. 악한 인간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범죄자들과 면담을 하다 보면 어쩌면 이들 역시 사회의 소외된 계층 혹은 나쁜 환경이 낳은 피해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 가치관이 흔들리기도 했죠. 피를 보거나 역한 냄새를 맡는 것과 같은 물리적 고통보다 그런 점들이 더 힘들었어요. 


그리고 계속해서 중대한 범죄 사건을 접하다 보니, 친구들과 일상 속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수가 없었어요. 겉으로는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지만, 점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저를 발견했죠. 그러면서 일상에서 유리되는 느낌이 들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니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됐어요. 


배우라는 전혀 다른 길을 걷는데에 그런 고충들도 어느 정도 작용을 한 것인가요? 프로파일러와 배우, 표면적 으로 보면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두 분야인데 어떻게 배우의 길을 걷게 되셨는지 계기가 궁금하네요. 

첫 자극은 우연히 찾아왔어요. 뮤지컬을 보는데 ‘무대 위의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렇게 에너지를 뿜어가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가 아마 제 안의 무언가가 눈을 뜨는 순간이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는 워낙 공부만 하던 사람이라 용기를 내지도 못했고, 한 3년을 고민만 한 것 같아요. 


그러다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해봤는데, 만약 커리어를 쌓아서 훗날 이 분야의 전문가나 교수 혹은 경찰청장이 되더라도 저는 전혀 행복할 것 같지 않더라고요. 스스로 가장 행복할 수 있는 미래를 상상해보니, 무대 위에서 웃고 떠드는 내 모습이 떠올랐어요. 그래서 연기에 뛰어들게 됐죠. 


프로파일러로서 커리어를 잘 쌓다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전혀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이 겁나지는 않으셨나요? 

이런 결정을 하고 난 뒤, 사람들은 저를 굉장히 즉흥적일 것이라 생각했죠. 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3년이라는 충분한 시간과 치열한 내적 갈등이 있었어요. 저는 프로파일러로서 꼭 갖춰야 할 자질과 절대 갖지 않아야 할 자질을 모두 가지고 있었죠. 전자는 통찰력, 집요함, 승부욕 같은 거죠. 그래서 사건이나 수사에 있어서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것을 잘했어요. 


그런데 사건에 감정이입이 심하고 예민한 감수성과 같은 점도 가졌어요. 그러다 보면 사람에 대한 프로파일링에 도움이 되긴 하지만, 나 자신을 컨트롤하기 힘들었죠. 계속 이런 식이라면 내가 망가지겠다는 판단이 섰어요. 하지만 긴긴 고민 끝에 이런 점들이 배우로서는 장점이 될 수 있겠다고 판단했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단력 있게 돌진하게 되더라고요. (웃음)


본격적으로 배우로 활동하면서부터는 프로파일러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부담스러울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물론 ‘프로파일러 출신 배우’라는 말이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었죠. 그래서 처음에는 모든 과거를 지우고 배우를 하고 싶었어요. 저를 옥죄는 것들을 다 버리고 아예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돌이켜보니, 프로파일러였던 제가 있었기에 배우 김윤희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은 부담스러운 꼬리표가 아니라 저 자신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어요. 


그렇다면, 현재 배우로서는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시나요?

다양한 일을 하고 있어요. 연기와 함께 전직 관련된 방송을 하기도 하고 시나리오나 방송 프로그램을 할 때 자문을 해드리기도 하고 가끔 강의도 하고 있죠. 그래도 역시 지금 하는 일 중에 가장 큰 비율은 배우죠. 최근에는 소설을 무대화한 연극인 <서울 사람들>이라는 공연을 했어요. 이 작품은 소설을 소재로 하는 연극이고, 저는 최선이라는 역할과 극 중 나레이션을 맡았어요. 소설 자체의 나레이션을 그대로 가져오되 중간중간 장면을 연극적으로 표현하는 형태의 전개라서 제게도 새로운 경험이었죠.  


연기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배역은 어떤 역할이죠?  

확실히 <시그널>의 윤상미 역할이었던 것 같아요. 제가 거기서 맡은 배역은 프로파일러 시절 제가 너무나 해결하고 싶었던 신정동 사건의 피해자 역할이었죠. 그 시절 어떤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 신정동 사건이에요. 피해자가 느꼈을 공포를 100분의 1도 느끼지 못했겠지만, 감정을 계속 그려보기 위해 한 달가량 일기를 썼어요. 그 과정에서 많이 울었던 것 같아요. 짧은 장면이었지만 프로파일링할 때보다도 오히려 몰입했어요.

  

장기 미제사건을 다루며 크게 주목받은 tvN 드라마 <시그널>은 <쓰리 데이즈>, <유령>, <싸인>을 집필한 김은희 작가의 작품이다. 김윤희는 이 작품에서 보조작가로 참여했다. 장르물 불모지인 안방극장에 한국형 범죄수사극을 정착시킨 김 작가의 필력에 ‘미생’ 김원석 PD의 섬세한 연출력이 더해진 드라마 제작사 에이스토리의 이 작품은 신드롬급 인기를 누렸다.

(사진출처=본사취재)

프로파일러의 입장과 배우의 입장은 어떻게 달랐나요? 

사건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프로파일러로서 제가 할 일이었다면, 이 친구 시각으로 그 현장을 바라보는 것이 배우로서 제가 할 일이었어요. 윤상미라는 역의 배우로서는 ‘이 사람이 걸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같은 심리를 정말 디테일하게 짚어야 했죠. 


극 중 김혜수 씨가 그랬듯 저 역시 프로파일러 시절 희생자가 걸었던 길을 걸으며 납치됐던 장소에서 한참 동안 서성였어요. 배우가 돼서 다시 똑같은 길을 걸어보니 프로파일링을 할 때는 오히려 너무나 객관적이었기에 내가 놓친 부분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죠. 그래서 배우가 되고 나서 오히려 그때 부족했던 걸 더 많이 깨닫기도 해요. 


어떤 역할을 계속 분석하고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배우라는 직업은 다른 방식의 프로파일러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맞아요. 배우는 매번 다른 옷을 입고 저를 찾아야 하는 직업이잖아요. 그래서 내가 과연 배우에 적합한 사람일까? 배우를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질문을 던지면서 끊임없이 저 자신을 프로파일링했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배우 하기에 좋은 성격은 아니었어요. 생각보다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고 끼도 많은 편이 아니죠...이런 점은 배우가 되기까지 종종 걸림돌이 될 수도 있겠지만, 또 먼 훗날 김윤희가 김윤희로서 살고 싶을 때 가장 적합한 직업 역시 배우가 아닐까 하는 확신이 들었죠.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이었지만, 그래도 배우라는 길을 걷게 되면서 후회한 적은 없으세요?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해요. 프로파일러를 관두고 배우가 된 것에 대해 후회가 없냐고. 그리고 넌 왜 항상 좋은 기회들을 다 놓쳐버리냐고 묻죠. 드라마는 물론이고 최근 연극 역시 그래요. 서울 연극제에서 5관왕을 차지할 정도로 좋은 작품을 왜 1회만 함께 했느냐고요. 그런데 만약 그때 너무 과분한 걸 얻었다면 부족한 실력에 굉장히 오만해졌을 것 같아요. 


그래서 보기에 따라 제가 기회를 못 잡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저는 걸어온 모든 길에서 배움을 얻었다고 생각해요. 거기서 받은 상처들까지도 너무 소중해요. 이런 과정들이 모두 모여 나를 성장시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 순간 행복하죠. 예전에는 이 행복이 달아날까 봐 조바심이 났다면, 지금은 이 행복을 만들어가는 주체가 나고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언제나 내 곁에 행복이 머문다는 걸 느껴요. 


앞으로 어떤 배우가 되고 싶으세요?

‘진짜'를 말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연기를 하다 보니까 뭔가 꾸며내게 되거나 더 잘 보이고 싶게 되는 식의 제 일상이 반복됐어요. 그런데 배우가 되기 전에도 날 무시하지 못하게 전문지식과 같은 단단한 것으로 저를 무장 했었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해보니 배우가 된 진짜 이유 중 하나가 ‘진정한 나’를 드러내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됐죠. 그래서 이제는 진짜를 말하는 배우, 진짜 김윤희가 되고 싶어요. 누군가 제 꿈에 관해 묻는다면 ‘어떤 배우 김윤희 '라기보다는 ‘어떤 사람 김윤희’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을 바꿔야겠네요. 앞으로 어떤 사람으로서 어떤 삶을 살고 싶으세요?

저는 제 가슴이 이야기하는 것을 거역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어요. 지금껏 너무 많이 거역하고 살았거든요. (웃음) 내 안의 답을 찾기 위해 너무 많은 투쟁을 했죠.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느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람들과 같이 잘 살기 위해서'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는 것이었어요. 여태껏 나를 사랑하는 과정을 겪었다면, 이제는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고 싶어요. 그게 앞으로 제 인생의 가장 큰 목표 같아요.


글 손시현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