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붓질, 아날로그 감성 레이어를 만나다 / 작가 백지훈

2019-01-30

디지털 붓질, 아날로그 감성 레이어를 만나다

작가 백지훈


▲ type02_04, acrylic on canvas, 162.2x130.3 (사진 출처 = 본사 취재)


캔버스 위, 한번 그은 선을 처음처럼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포토샵의 undo 버튼 클릭 한 번이면 너무나 손쉽게 원하는 시점으로 되돌릴 수 있다. 이처럼 디지털 시대의 미술은 점차 손쉬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술의 세계에서 물감과 캔버스가 너무나 당연한 것은 왜일까?


▲백지훈 작가 (사진 출처 = 본사 취재)


포토샵을 이용한 손쉬운 방법 대신, 화면 속 디지털 그림을 실제 캔버스에 옮겨오는 역발상적 예술 세계를 구현하는 현대 작가 백지훈. 그는 질감, 무게감, 공간까지 모든 것이 다른 디지털의 붓질과 실재의 붓질, 이 두 붓질을 캔버스라는 같은 공간 안에서 재해석한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흥미로운 작가 백지훈을 만나보았다.


▲type02_03, acrylic on canvas, 162.2x130.3, 2017  (사진 출처 = 본사 취재)


마치 레이어를 쌓아 올려서 여러 장의 이미지를 겹친 듯 보이기도 하고, 컴퓨터만으로 그린 그림 같기도 한 그림의 작업 방식이 궁금해지네요.
형상이 뚜렷이 보이는 그림들은 2016년 작이고 붓질의 질감이 주된 그림들은 최근작이에요. 먼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린 후, 레이어를 얹은 것처럼 보이는 부분은 컴퓨터 포토샵을 이용해 가상으로 작업을 한 후, 그대로 실제 물감과 붓을 이용해 그대로 그려내 완성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어요.


포토샵 붓질을 캔버스로 옮겨온 재미있는 발상의 계기는 무엇인가요?
물감이라는 재료로 그려낸 붓질의 감각과 컴퓨터로 그려낸 붓질의 감각이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지만, 사실 이 작업을 처음 시작한 건 학부 시절이었어요. 그때는 ‘내 어눌한 그림을 어떻게 포토샵으로 보정할 수 있을까? 혹은 여기서 더 손을 댔다가 돌이킬 수 없이 망쳐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에 포토샵이라는 도구를 가상으로 그림을 완성하는 용도로 사용했죠.


현실 세계에서 지우개는 고작 연필이나 지우는 게 다지만, 포토샵은 레이어 하나를 없애버리면 너무나도 균일하고 깔끔하게 모든 것이 지워지죠. 이처럼 실수를 돌이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는 포토샵에 매력에 빠졌어요.


그 후, 계속 물감으로 이러한 불투명성과 디지털스러운 면을 구현해내고자 끊임없이 탐구하다가 2010년, 유학을 떠나면서부터는 잠시 붓을 놓았어요. 조금 더 넓은 방면으로 다양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영국 캔터베리에 있는 University for the Creative Arts에서 영상과 사진을 공부하며 몇 번의 전시를 했죠. 그러다 어느 순간 제가 페인터의 정체성을 가지고 다른 매체로 작업을 하고 있었던 거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어요. 그렇게 다시 붓을 잡게 됐어요.


지금도 여전히 포토샵이 갖고 있던 컴퓨터 붓질에 대한 특징을 그대로 살려 작업을 하지만, 예전과 다른 점은 지금은 신기하게 붓질을 먼저 한 그림 위에 포토샵을 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로 마음에 들어버리기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그때와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 type01_09, acrylic on canvas, 72.7x60.6, 2016 (사진 출처 = 본사 취재)


드라마 <응답하라 1997>의 배경이 된 90년대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 교차하는 시대였다. 이 시대를 지나온 X세대는 완벽히 디지털화된 지금 시대를 사는 세대나 더 이전의 세대와 달리, 아날로그적 감성과 디지털의 감각 두 가지 모두 가지고 있다. 작가 백지훈, 그 역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교차점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종이 위의 그림뿐만 아니라, 컴퓨터 모니터를 도화지로 마우스라는 붓으로 참 많은 그림을 그렸다. 이 때문일까? 그의 작품에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경계가 없다.

지금은 컴퓨터 속 포토샵이라는 프로그램을 이용하지 않더라고 핸드폰과 패드와 같은 디지털 기기를 이용해 누구나 손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시대가 되었는데, 작가의 관점에서 실제 붓질과 디지털 기기들을 사용한 가상의 붓질이 작품이 되어가는 그 과정이 궁금하네요. 
실제 붓은 얇은 털 한 올 한 올 사이로 물감이 뭉쳐져 있다가 펴지면서 질감이 느껴지는 입체적인 느낌이죠. 반면, 컴퓨터의 붓질은 외곽은 깔끔하게 떨어지되 시작 부분은 둥글어서 평면적인 느낌이에요. 그래서 처음 컴퓨터를 이용해 그림을 그릴 때는 이 가상의 붓 터치감이 거북한 느낌도 있었는데, 곧 그것도 그 나름대로 굉장한 매력으로 다가왔죠.

디지털 기기로 하는 가상의 붓질은 실제 붓질을 모방한 일종의 시뮬레이션 액션이라고 볼 수 있지만, 컴퓨터 붓질만의 특징도 분명히 있거든요. 예를 들어 포토샵의 지우개 툴은 이미지의 표면, 물성을 무시한 채 칼로 오려낸 듯 이미지를 깔끔히 지워 버리고 투명도를 조절할 수도 있죠. 그래서 컴퓨터만이 가지고 있는 툴의 특성을 실제 물감이라는 재료로 옮겨졌을 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까 탐구하며 작업을 하고 있어요.

사실 작업을 하다 보면 뭐가 먼저, 뭐가 다음이다 하는 생각의 경계는 무너져요. 곧 전시를 앞둔 작품도 지금 방식과는 다르게 진행할 생각이에요. 두 개의 레이어를 겹쳐놓은 게 아니라, 디지털이지만 실제의 붓질 같기도 하고 실제 붓질이지만 디지털 같기도 한 하나의 층에 두 가지 특성을 모두 표현할 수 있도록 탐구하고 시도하고 있어요.



▲ type01_11, acrylic on canvas, 72.7x60.6, 2016 (사진 출처 = 본사 취재)


기계적인 선과 손맛이 살아있는 선, 비비드한 색감 하지만 조화로운 그 무엇.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가 공존하는 그의 캔버스 속 영감은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일까? 작가 백지훈, 그는 페인터로서 백지훈이 아닌, 인간 백지훈으로서 그의 일상 속 소소한 유희에서 영감을 얻는다. 그리고 조형적인 아름다움의 요소를 작품에 녹여낸다.

붓의 터치감 뿐만 아니라 비비드한 컬러감의 조화로움이 돋보이는데, 영감은 주로 어디서 받으시나요?
많은 취미가 있지만, 특히 수집에 취미가 있어요. 프라모델을 하나둘씩 만들다가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다양한 컬러가 조합된 이런 조형물들을 모아놓고 보니 희열감이 느껴졌달까요? 특히 건담 피규어 같은 경우에는 컬러 군이 굉장히 다양하고 소형 입체 조각 같은 느낌도 들어요. 그래서 굳이 멀리서 영감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제 일상 속 친숙한 것들에 영감을 얻어요.


또 디지털의 붓질을 실제로 옮길 때는 테이프를 오려 붙여 그 위에 물감을 칠하는 일종의 ‘마스킹 기법’을 쓰는데, 프라모델에 도색 할 때도 이러한 마스킹 기법을 쓰죠. 이처럼 프라모델 도색할 때 얻었던 팁을 작품에 응용하기도 하면서 기술적인 부분에서도 소스를 많이 얻었어요.

▲ (사진 출처 = 본사 취재)


프라모델에서 조형적 아름다움과 색감의 조화를 캐취하는 점이 특이하네요. 그렇다면 중에서도 어떤 프라모델이 작품에 가장 영향을 준 편인가요?
일본 에니메이션 <에반게리온>이요. 만화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형식 번호가 1호기는 EVA-01, 2호기는 EVA-02 이런 식으로 표기됐어요. 제 작품의 제목 역시 형식번호와 같은 방식을 차용해 TYPE_01, TYPE_02로 진행돼요. 과거의 작업 또한 현재 작업의 테스트 또는 프로토타입이라 생각해 TYPE_00이라는 제목으로 큰 흐름 안에 넣었어요. 신작 역시 TYPE_03로 갈 생각이고요. 사실 제목은 그냥 형식적인 부분을 따온 것인데, 재미있게도 지금 진행 중인 TYPE_03의 메인 컬러가 블랙인데 3호기의 컬러도 검은색이죠.


2016년 서울 예술재단의 공모전 <포트폴리오 박람회>의 수상으로 주목받은 신예 작가,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일상과 예술 사이의 경계를 작품세계에 녹여내는 백지훈은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되는 작가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과 함께 어떤 작가가 되고 싶으신지 말씀해 주세요.

개인전 위주로만 계속 활동을 잡고 있다가 좋은 기회로 10월 10일부터 대구예술발전소에서 열리는 기획 전시회에 참여해요. 이번 전시는 저뿐만 아니라 13명의 작가님과 함께 하는 단체전이에요. 이후에는 작업의 큰 골격은 유지하되 완전히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계획입니다. 제 작품이어도 똑같은 건 싫어요. 항상 주변에서 제게 영감을 주는 것들을 놓치지 않고 탐구하는 작가가 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글 손시현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