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평범한 노년을 꿈꾸는 영원한 보헤미안 '행복의 나라' 한대수

가장 평범한 노년을 꿈꾸는 영원한 보헤미안 '행복의 나라' 한대수

알 수 없는 재난으로 거의 모든 생명체가 사라진 폐허의 지구. 종말을 맞은 세상은 극도로 황량하고 온통 재로 뒤덮여 태양마저 가려져 있다. 그 황량한 땅을 아버지와 어린 아들 2명이 묵묵히 걸어간다. 걷다 보면 바다가 나오고 또 자신들과 같은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2007년 퓰리처 상을 수상한 현대 미국 문학의 대가 코맥매카시의 소설 '길 (The Road)'의 내용이다. 소설 속의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갖는 보호 의식과 사랑은 맹목적이고 지극하다. 식인종이 횡행하고 문명이 사라진 야만의 땅에서 아들을 보호하는 것을 유일한 생존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아버지의 마음이 소설 전편에 느껴진다. 그건 작가의 마음이기도 하다. 코맥 맥카시는 65세의 나이에 셋째 부인에게서 아들을 얻었다. 그는 늦게 얻은 귀한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 길'을 쓴 것이다. 이번 호 표지 촬영을 위해 스튜디오에서 한대수 가족을 만나서 그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기자는 한대수가 코맥 맥카시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긴 머리와 가죽 재킷, 청바지가 여전히 어울리는 칠순의 나이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청년 같은 한대수에게 이미 자신이라는 존재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10살이 된 딸이 이제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그의 삶의 의미였다.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뉴욕에서도 이민자들이 특히 많이 거주하는 퀸스 잭슨하이츠의 2베드룸 아파트에서 올해 한국 나이로 70이 되는 가수 한대수를 만났다. 아내 옥사나 알페로바 (Oxana Alferova), 딸 양호와 함께 지난해 여름부터 살고 있는 집이다.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기자가 말했다.

“선생님, 옛날 이야기는 안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어려서 뉴욕에서 학교를 다녔고 70년대 뉴욕에 와서 생활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20년 가까이 사셨습니다. 그리고 지난 해 가족과 함께 다시 뉴욕에 와서 살고 있구요. 딱 지난 10개월간의 그 이야기만 듣고 싶습니다.”

인터넷으로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는 시대다. 언제 들어도 흥미진진한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지만, 한대수의 이름만 검색해도 넘쳐 나는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자택에 방문한 건 아니었다. 포크록의 전설이나 영원한 히피 등의 상투적인 이미지를 다시 끄집어내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처음 얻은 귀한 딸. 그 딸이 이제는 인생의 모든 목적이고 보람이라고 말하는 늙은 아빠의 평범한 뉴욕 생활을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당연히 첫 질문은 요즘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였다.

“가정주부 역할이지 뭐. 영어로 하면 하우스 허즈번드. 아침에 애 밥 먹이고 학교 데려다 줍니다. 그리고 오후까지 내 일 좀 하죠. 늘 하는 거. 음악하고 미술. 그러다가 2시 넘으면 다시 애 데리러 학교에 가요. 집에 와서 뭐 좀 먹이고, 숙제 도와 주고, 놀아 주고 그러면 저녁 먹을 때 되고. 요즘 내 생활이 그래요. 그렇게 살려고 뉴욕에 온거에요.” 원래 요리하는 걸 좋아하고 집안 일을 잘하기에 체질에 맞는 생활이라고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옛날 이야기는 안하기로 했지만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시 한대수의 일생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소개를 하는 것이 좋겠다.

한대수는 1948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대단한 명문 집안 출신이다. 친조부 한영교는 1930년대 흔치 않은 미국 유학생으로 언더우드 박사와 함께 연희전문을 세웠다. 그의 부친 한창석은 서울대 공대재학 중 핵물리학 분야 최고 명문으로 인정받던 코넬 대학교에 진학했다. 당시 불과 20세인 한창석은 이미 18세에 결혼 해 한대수가 1살 나이였다. 그는 가족을 남겨두고 혼자 유학길에 올랐다. 한대수가 7살이 되었을 때 영화에서 나올 듯한 사건이 생겼다. 가족과 나라의 자랑거리였다는 한인 천재 핵물리 학자 한창석이 미국에서 실종된 것이다. (그의 실종 미스테리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다) 

한편 19살 나이에 싱글맘 신세로 한대수를 혼자 키우던 그의 모친은 결국 실종 사건 이후 재가를 했다. 한대수는 조부모 밑에서 자라며 부산과 뉴욕을 오가는 시기를 보냈다. 55년 부산의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미국에 이민 와 뉴욕 할렘에 있는 초등학교을 졸업했다. 1961년 한국으로 돌아와서 경남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7세 되던 해 기적 같이 아버지의 생존 소식을 듣고 65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롱 아일랜드에서 한국말을 잊어 버린 아버지 그리고 백인 새 엄마와 지냈다. 66년 뉴햄프셔 대학교 수의 학과에 입학했지만 곧 자퇴하고 적성을 찾아 뉴욕 사진학교에 입학했다가 생활고 때문에68년 귀국했다. 50-60년대 한국인으로서는 정말 드문 롤러코스터 같은 소년, 청년기를 보낸 것이다.


1969년 ‘세시봉’으로 데뷔 한 한대수는 포크 록이라는 장르를 한국에 처음으로 소개했고, 1974년 첫음반 <멀고 먼 길>을 녹음했다〈. 물 좀 주소〉〈, 행복의 나라로〉 등이 들어있는 이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사상 가장 중요한 앨범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 후 2집이 나왔지만 서슬 퍼런 유신 독재 시대에서 체제 전복이라는 이유로 앨범은 판매 금지되었다. 그는 2집 발표 시절에 첫번째 아내 디자이너 김명신과 결혼해 뉴욕에서 활동하다가 이혼을 했다. 20살 차이가 나는 지금의 아내 옥사나와 뉴욕에서 만나 1992년 재혼, 그리고 한국에서 살던 시기인 59세에 딸 양호를 얻었다. 90년대 후반 일본 록 프로듀서에 의해 재조명된 한대수는 한국에서도 새롭게 인정을 받으며 가수와 예술가로서 제2의 전성기를 보내기도 했다. 지난해 10살이 되는 딸의 교육 문제로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 현재 또 한번 뉴욕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있다.


한대수 가족이 다시 뉴욕으로 돌아간다는 기사가 1년 전 주요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딸이 미국에서 학교 다니게 하기 위해 한국을 떠난다고 하니까, 언제나 교육이 중요한 주제가 되는 한국에서 관심거리가 된 것 같아요. 기러기 가족 문제 등 교육을 이유로 외국에 가는 현상이 이미 오래전부터 있었고 그 때문에 문제점도 많은 나라니까요. 이런 식으로 계속 어린 학생들과 가족들을 떠나게하는 교육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 취지로 기사화 된 것이겠죠. 개인 한대수 일가의 거취를 일종의 사회 문제로 보는 거죠. 

제가 이런저런 이유로 그동안 한국과 뉴욕을 자주 오가지 않았습니까. 젊은 시절에는 내가 만든 노래가 탄압을 받으면서 먹고 살기 힘들어 쫒겨나듯 온 적도 있구요. 그래서 이번엔 한국의 척박한 교육환경이 이들 가족을 쫒기듯 미국에 가게 만들었다는 시각의 기사도 나온 것 같아요.


정말 그렇게 아이가 힘들어 하던가요?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인 양호가 학교 가기 싫다는 말을 입에 달기 시작했어요. 한국의 입시 경쟁이 이미 초등학교 심지어 유치원부터 시작되는 현실을 기자님도 잘 아시쟎아요. 아직 10살도 안된 어린애들은 무조건 친구랑 놀고 즐겁게 학교 생활을 해야 하는데, 초등학생들이 11시까지 공부해야 하다니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세상에서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아이를 이렇게 삭막한 환경에서 키워서는 안되겠다는 결심을 어렵게 한 것이죠. 

여러번 말하지만 내가 뉴욕에 돌아온 이유는 오직 우리 딸 양호를 자유롭게 교육 받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저나 아내 모두 한국을 좋아하고 특히 와이프는 한국 생활의 편안함이 몸에 밴 상태여서 거칠고 힘든 뉴욕 생활을 다시 한다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어요. 나름대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내린 결론입니다.


뉴욕에 와서 생활해 보니 역시 기대 만큼 양호가 잘 적응하고 좋아하던가요?
한대수가 답변을 하려는 순간 마침 양호가 동네 친구와 함께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왔다. 잠깐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다시 친구와 나갔다. 1시간 뒤 기자가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입구에서 친구와 놀고 있는 양호를 다시 볼 수 있었다. 오후 6시 였다. 학교를 마치고 돌아 온 양호의 평일 오후 모습이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확한 대답이었다.

내가 이 말도 자주 했습니다. 저는 일부 기러기 가족들처럼 더 좋은 교육을 위해서 혹은 남보다 더 앞서가는 스펙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이곳에 온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가장 평범한 아이처럼 키우기 위해서 온 겁니다. 내가 1950년대에 뉴욕 할렘에서 초등학교 다닐 땐 숙제도 없었고 매일 친구들과 맨해튼 길거리에서 놀았던 추억이 뚜렸해요. 그땐 한국도 그랬었겠지만 이젠 어린 아이들에게 너무 힘들게 변했쟎아요. 뉴욕은 여전히 그런 생활이 가능하다고 기대했죠. 근데 미국도 좀 변한 건있어요. 생각보다 숙제가 너무 많아졌어요. 딸 애 숙제 봐 주면서 매일 씨름하는 게 큰 일이라 한번은 담임 선생님 찾아가 숙제 적게 내달라고 했습니다 (웃음) 사람은 10대, 20대 때 충분히 인생을 경험하고, 여행하면서 지리학을 배우고, 일상생활을 하면서 철학을 배우고,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미술을 배우고, 연애를 하면서 성교육을 배우면서 청년기의 경험과 추억을 쌓아야 하는 겁니다. 그게 전혀 특별한 것이 아닌거죠. 양호도 그렇게 자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남 보다 나은 교육이 아닌 가장 평범한 교육을 받게 하기 위해 아이를 데리고 뉴욕에 왔다”는 그의 말이 조금도 거짓이 아님은 객관적인 현실이 증명한다. 양호는 비싼 사립이나 보딩 스쿨을 다니는 것이 아니다. 한대수 가족이 살고 있는 잭슨하이츠는 뉴욕을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백인 중산층 지역이 절대 아니다. 활기차고 분주하지만 맨해튼과는 전혀 분위기가 다른 지극히 평범하고 심지어 허름해 보이는 지역이다. 오히려 백인을 거리에서 보는 일이 아주 드문, 스패니시와 아랍계와 인도계와 아시안이 골고루 섞여 사는 전형적인 이민자 동네로 당연히 공립학교의 인종 구성도 마찬가지다.

한대수는 처음부터 맨해튼은 꿈도 꾸지 않았고 이번에 미국에 오면 '이런 동네'에 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인종 차별 없고 고만고만한 이민자 자녀들이 함께 어울리는 학교를 다니며, 과외도 학원도 없이 수업 듣고 끝나면 맘껏 놀기만 하며 자라기에는 적합한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의 입장에서 '평범한 아이로 자라기' 외에 어찌 기대하는 바가 전혀 없었겠는가. 그는 넓고 인구가 많은 미국땅에서 딸이 맘껏 뜻을 펼치고 사는 미래를 희
망한다.



한국의 교육은 왜 그렇게 어려서부터 아이들을 괴롭히고 경쟁을 강요할까요?
미리 말씀드리지만 저는 절대로 학부모나 선생님, 교육 관계자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책임보다는 근본적으로 나라가 너무 작아요. 그렇게 경쟁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거죠. 그런데 그렇게 경쟁해서 조금 뛰어난 사람이 된다고 해도 얼마나 뜻을 펼치고 살고 물질적으로 보장이 됩니까? 미국에선 가수가 히트곡이 하나 있으면 평생을 먹고 삽니다. 록스타가 되면 팬이 수억이 되니까요. 인구가 많고 시장이 크니까 가능한 일이죠. 

일본만 해도 록음악 애호가가 한국의 수십 배는 많습니다. 이번에 전인권 씨도 뉴욕에 와서 공연하지만, 전인권, 신중현, 임재범 그런 재능을 가진 록스타들이 만약 한국이 아닌 미국이나 일본에서 태어나고 활동했으면 어땠을까요? 남 얘기할 것 없이 저를 보세요. 50년 동안 음악을 했고 나름 유명한데 월세도 못 내요 (웃음) 우리 양호가 공부는 얼마나 잘할지 모르지만, 음악, 미술 쪽에 재능이 있습니다. 제대로 재능을 펼치고 살 수 있도록 넓은 곳에서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도 컸습니다. 잘되건 못되건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노릇이지만 부모가 돼서 길은 열어주겠다는 겁니다.


기대만큼이나 걱정하신 부분도 있었을 텐데 가장 불만스럽다거나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돈이죠. 생활비 문제. 먹고 사는 일이 역시 만만치가 않네요. 물가 비싼 뉴욕이라 당연히 각오하고 왔지만 막상 도착해 집 구하는 순간부터 정말 화가 나더라구요. (그는 자신의 아파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아파트가 맨해튼에서도 20년전에 800달러 정도 했습니다. 지금 3천달러가 넘어요. 퀸즈에서는 300-400 달러 했어요. 지금 얼마나 비쌉니까. 이건 좀 아니에요. 그래도 저나 아내가 낙관적인 성격이고 돈에 너무 연연하지 않는 편이라 그때 그때 해결하면서 살고는 있어요. 그리고 전반적인 뉴욕의 문화 환경이 너무 상업화 되었어요. 규격화 되고 일반화 되고 ... 깨끗하고 편해지긴 했는데 제가 젊은 시절을 보낸 그 당시 뉴욕의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뭔가 지저분하고 정돈되지 않았지만 대신 자유롭고 낭만적인 뉴욕의 모습은 찾기 어렵죠.


한대수는 전후 경제적인 풍요의 배경에서 개인적인 자유를 추구하던 비트 제너레이션이 활약하던 50년대와 히피 문화가 주도하던 60년대를 관통하며 뉴욕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가수다. 60년대 한국 대중문화사에 한 획을 긋는 음악을 발표한 배양분도 결국 그 시절에서 만들어졌다. 그에게는 80년대 이전의 뉴욕이 진정한 뉴욕이다. 범죄와 매춘이 횡행하던 과거의 위험한 타임스퀘어가 이제는 보도를 막아 행인들이 앉아서 쉴 의자까지 놓여진 현재의 깨끗한 타임스퀘어보다 그의 정서에 맞닿아 있다. 여전히 작곡과 미술 활동을 부지런히 하고 있는 한대수에게, 그러므로 지금의 뉴욕은 예술가로서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닌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뉴욕에도 친한 지인들이 있지만 뉴욕에선 이들과 가끔씩 만나서 회포를 푸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도 한국과 달리 쉽지가 않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글도 쓰고 공연도 하면서 수입이 생길 꺼리가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어렵다.


한대수는 하우스 허즈번드(House Husband-가정주부)역을 자처한다. 하지만 ‘조선일보 - 한대수의 사는 게 제기랄’을 연재하며 팝케스트 ‘한대수의 마이뉴욕’ 방송 진행과
사진작가, 또 그의 본업인 음악가로 여전히 왕성한 활동 중이다.


딸에게는 좋은 환경이겠지만 막상 본인은 희생해야 할 부분이 있는것 같습니다.
59살 까지는 오직 내 음악에만 신경 쓰며 살았어요.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답고 의미 있는 음악을 만들 수 있을까? 이번 앨범엔 기타리스트 누구를 고용할까? 내 팬들을 어떻게 만족시킬까? 특히 친절한 여성 팬들에겐 어떻게 봉사활동을 할까? 이런 주제로 한평생을 보냈죠. 그런데 59세에 갑자기 베토벤 5번 교향곡이 연주되었어요. 딴딴딴 단. 우리 양호가 태어났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데 이렇게 많은 고통과 돈이 필요한지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는 처음 세상에 무서운 것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돈이 정말 귀중한 것도 알았구요. 물론 말로 표현할수 없는 기쁨과 환희가 그런 두려움과 고통보다 훨씬 크죠. 70이 된 나이에 편안한 한국을 떠나 다시 뉴욕에 와서 사는 어려움... 물론 있어요. 나름 희생이죠. 하지만 만약 아이를 안 낳았다면, 내 인생은 반쪽이었을 것이다. 인류 역사가 BC(Before Christ)와 AD(After Death)로 나누어진다면, 나의 인생은 BY(Before Yang Ho)와 AY(After Yang Ho)로 나누어진다, 저는 그렇게 말합니다. 양호를 낳은 뒤 처음 교육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몇 년전 뉴욕타임스 매거진이 6순의 나이에 임신을 한 여배우의 반나 사진을 표지로 올린 적이 있다. 이 기사는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는 것이 혹시 부모의 이기적인 행동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 본인들은 늦둥이를 봐서 행복하겠지만 어린 나이에 이미 병들고 노쇠한 부모를 지켜보는 것 혹은 부모를 떠나 보내야 하는 자녀들의 마음의 상처는 생각하지 못한 행동이라는 일부의 지적을 인용했다. 


하지만 한대수를 보면서 '늙은 아빠'를 둔 자녀가 더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생각해 보자. 평범한 남자들이 자녀들 두는 20-30대는 인생에서 가장 바쁜 사회 생활을 하는 시기와 겹친다. 육아는 아내에게 맡겨둔 채 매일 바쁜 생활에 쫒기며 살다가 어느새 자녀들은 커버린다. 생활비는 벌어 줄 수 있지만 아빠로서 정말 해줘야 할 노릇은 제대로 못한 것을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서구를 중심으로 돈을 더 버는 아내에게 경제적인 책임은 넘기고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는 하우스 허즈번드들이 늘어가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 행
동들이다.


아버지가 한대수라는 것의 의미를 10살 된 딸도 이미 알고 있을까요?
알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한국에서 콘서트를 할 때 무대에 양호가 함께 참여한 적도 있거든요. 친구에게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걸 보면 우리 아빠가 한국에서는 꽤 유명한 가수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하지만 딸이 정말 바라는 것은 유명한 아빠가 아니라 함께 많이 놀아주는 다정한 아빠에요. 제가 해주고 싶은 아빠로서의 저의 모습도 그것이구요. 그래서 주말이면 뮤지엄이나 센트럴 파크 등 뉴욕의 문화를 즐길수 있는 곳은 같이 다니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전철비만 쓰면서 맨해튼 바람 쐬는거죠. 그리고 5월에는 마침 저렴한 패키지 상품이 있어서 큰 맘 먹고 바하마 크루즈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어요. 바하마에서 배가 떠날 때 잊지 못할 천국을 맛 본 기분이었어요.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깨끗한 초록 바다, 양호와 신나게 노래 부르며 같이 탄 제트스키. 그런게 요즘 저의 행복입니다. 노래 한 곡 더 만드는게 중요한것이 아니고 적어도 딸이 대학생이 될 때까지는 이렇게 함께 지내며 늙어갈 수 있는 평범한 노년이 제가 꿈꾸는 삶이 되었습니다.

한대수의 조부 고 한영고 목사에게 지난 5월 모교인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은 헤리티지 어워드(2017 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 Heritage Award)를 수여했다. 한대수도 수상식 자리에 참석했다. 한국전 직전의 최빈국 한국에서 그는 클래식을 전공한 신학자와 핵물리학자와 피아니스트의 피를 받은 엘리트 가문의 자녀로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의 피가 예술적인 재능으로 발현되면서 큰 가수가 될 수 있었다. 동시에 평범한 부모를 둔 사람은 겪지 않아도 되는 큰 불행도 찾아왔다. 그의 말처럼 아버지가 당시 아무나 할 수 없었던 미국 유학길에 오르지 않았다면 17년간이나 아버지의 생사도 모르고, 어머니까지 떠난 상태에서 조부모밑에서 자라는 외로운 청소년기의 방황은 겪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대수에게 가족은 언제나 가장 큰 영향력을 준 존재였다. 큰 차이가있다면 부모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가족이지만 아내와 딸은 자신이 선택한 가족이다. 노년의 한대수는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을 일생의 마지막목표로 하는 사람이었다.


“절대로 아버지 처럼은 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어요. 필요할 때 옆에 있어 주는 아버지가 될 겁니다. 아빠가 아닌 가수 한대수로서도 마찬가지에요. 나이를 먹으면 어쩔 수 없이 감각이 떨어지고 뇌가 줄어들어서 창의성도 줄어듭니다. 이 나이에 대단한 음악을 만든다는 욕심은 없어요. 제 인생의 마지막 걸작이 한양호입니다.”


기획 Jennifer Lee / 글 Won Young Park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