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항상 장소가 필요하다 유년의 추억, 공간의 기억을 따듯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아티스트 홍 범

기억은 항상 장소가 필요하다 유년의 추억, 공간의 기억을 따듯한 시선으로 풀어내는 아티스트 홍 범


오래된 외면, 미래의 기억, 오래된 집, 잃어버린 숲, 마음속 어딘가의 방, 기억들의 광장.
설치/비디오 아트 작가 홍 범이 그동안 열었던 전시회 제목들이다. 이들 제목만으로도 작가의 감정적인 원천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작품 세계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듯하다. 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SVA)에서 컴퓨터 아트와 사진을 전공 한 후 15년 동안 뉴욕과 서울을 오가며 활발하게 작업을 해 온 홍 범은 집요하게 ‘공간’과 ‘기억’이라는 주제에 천착해 왔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어머니의 품 같은 따스함을 주는 것일까.

비디오 자료로 작가의 작품들을 접했을 때 기자는 그 작품들에서 온기가 느껴져서 좋았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비디오 아트에서 흔히 보아왔던 차가운 첨단과 난해한 시도 대신 홍 범의 작품은 자연과 인공의 오브제들이 정교하게 조합되면서도 작가의 따듯한 시선을 잃지 않은 것들이었다. 지난해 서울 ‘파라다이스 집(ZIP)’과 ‘두산 예술센터’에서 성공적인 전시를 마쳤고 올해도 뉴욕과 한국에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는 홍 범을 그의 첼시 아파트 라운지에서 만났다.


홍 범. 이름이 예술가답다. 초면에 이름에 대해서 먼저 물어봤다. 혹시 예명인가요?

“아버지가 지어준 본명이다. 원래 외자 이름을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 어른들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던 분이다. 미술가의 꿈을 가정 형편 때문에 접서 그렇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미대를 간다고 했을 때도 두말없이 승낙해주셨다.”


70년생인 그가 대학을 진학하던 시기에 예체능계를 선택한 많은 또래와 달리 그는 ‘장남이 미대를 가는 것을’ 선뜻 허락하고 지원해 준 부모님 덕분에 적어도 진로선택에서의 애로사항은 겪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가 처음부터 작업과 전시를 평생의 업으로 삼는 아티스트의 길을 택했던 것은 아니었다. 산업디자인을 공부했고 졸업 후에도 웹디자인과 CD 롬, 각종 드라마의 타이틀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로 활동했다. 잘 나가는 웹디자이너였던 그가 어떤 경로를 통해 뉴욕에서 아티스트로 활동하게 되었을까? 뉴욕의 다른 작가들과 출발 지점이 조금은 달랐던 그의 ‘아티스트 입문기’, 스스로 ‘혼돈의 시대’라고 표현했던 과정을 자세히 들어보면 그의 작품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가랑비에 옷 젖듯 천천히 들어선 작가의 길
그의 삶은 평탄했다. 명문 미대에서 실용적인 전공을 택했고 마침 부흥기를 이루기 시작하던 웹디자인과 당시엔 첨단의 미디어였던 CD롬 제작으로 경적으로 풍족했다. 20대 중반에 결혼해서 아이도 갖고 안정적인 가정생활도 꾸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20여 년 전 부모님이 캐나다 밴쿠버에 이민 올 때 함께 오게 되었다. 이민이라는 외적인 환경의 변화가 그의 삶에 급격한 변화를 준 것은 아니었다. 한국보다 일거리가 많지는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웹디자이너로 일을 했고, 사회 보장이 잘 되어 있는 캐나다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삶을 꾸려가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역설적으로 이런 지루함 섞인 편안함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어지럽게 한 듯하다.

“밴쿠버에서 90년대 후반 디자인 관련 일을 하던 시기였는데 어느 순간에 내가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예를 들면 1년 동안 꽃과 선인장을 계속 그리고 있었다. 지금 보면 현재 하는 작업과 연장 선상에 있던 순수 예술의 형태였지만 그때는 의식을 못 했다. 아마도 현실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마음속에서 다른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싶은 욕망이 넘실대던 시기, 
그런데 스스로는 그게 무엇인지 확실히 잡히지 않았다. 혼돈의 시절이었다. 그래서 뉴욕에 와서 공부를 새로 시작하기로 했다. 아내 역시 학업을 더 해보라고 권유하기도 했다. 이미 32살의 나이에 아이들이 있는 가장이어서 분명 두려움이 있었지만, 여전히 젊은 나이였다. 탈출구가 절실히 필요해서 내린 무작정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홍 범은 2001년 뉴욕으로 이주했고 SVA(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에 진학했다. 그때도 ‘예술가로서 올 인’하는 마음가짐은 아니었다. 경력과 관련이 있는 컴퓨터 아트를 전공으로 선택했고 졸업 후에 한국에서 교직을 가질 계획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누군가의 삶에 결정적인 변화를 준 것은 사소한 계기일 경우가 많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술가적인 끼가 남달라서 친하게 지내던 한 동료 학생의 권유로 사진과 전공인 비디오 아트 수업을 듣게 되었다.

“순수 영상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수업이 의외로 너무 좋았다. 담당 교수님도 학기 내내 나의 재능과 태도를 높이 평가하고 용기를 주었다. 무엇보다 교수님이 나에게 전시의 기회를 주었다. 내 생애 첫 작품 발표회였다.”


홍 범은 그때 새와 하늘을 소재로 한 4분 분량의 실험 비디오를 작업했다. 오브제와 백그라운드만 있는 단순한 설정이었지만 “존재와 공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시선”이란, 이후 작가 홍 범의 핵심이 되는 컨셉이 처음 작품으로 발현된 자리였다. 그저 호기심으로 들었던 비디오 아트 수업을 계기로 한 창작을 통해, 고민과 성취와 비평의 과정을 겪으며 그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자극과 재미 그리고 성취감을 느꼈다고 한다.

“교수가 개념적인 과제를 던져주고 나는 그 과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하나의 영감이 떠올랐을 때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관객들 앞에서 섰을 때는 긴장과 두려움이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 헐벗은 것 같은 감정이었다. 그 과정들이 정말 재밌고 자극적이고 행복했다. 지난 10여 년간 내가 끊임없이 내적으로 고민을 해 왔음을 비로소 확인했다. 그리고 마치 가랑비에 젖듯 조금씩 조금씩 예술가로서의 자아를 찾아왔던 것 같았다.”


전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만들었던 공간들
홍 범은 비디오 아트로 석사(MFA)를 마친 뒤 사진 전공으로 2년간 석사 과정을 더 공부했다.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교수의 권유에 따른 선택이었다. 2005년 졸업 후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브루클린 다리 밑에 모스 부호에 따라 빛을 발하며 움직이는 설치물을 작업하는 등 능숙하게 손에 익은 컴퓨터 기술과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한 예술적 아이디어들을 결합한 창작물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작가로서 처음으로 가진 의미 있는 전시는 50년대 지식인들이 즐겨 찾던 찻집을 갤러리로 개조한 인사동 ‘사루비아다방’에서 열린 <잃어버린 숲>이었다. 2000년대의 명성 있는 대안공간으로 한국 화단에 입문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곳으로 인식되던 갤러리였다. 홍 범은 4대의 프로젝터를 사용해 어린 시절 자신이 살던 세곡동의 기억을 떠올린 작품을 만들었다. 사루비아의 내부는 의도적으로 마감을 마치지 않은 콘크리트 벽면이었다. 그 거친 벽면은 아련한 옛 추억의 소환을 위해 붓이 번지는 효과를 살린 작품의 분위기를 살리는 백그라운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그린벨트에 묶여있던 시절의 세곡동은 시골과 다름없었고 나는 친구들과 동네 산과 들판을 돌아다니며 칡을 캐 먹는 등 산골 아이처럼 놀았다. 잊고 있던 그 시절의 기억들을 입체적으로 되살린 전시였다.”


작가는 사루비아의 <잃어버린 숲>으로 평단과 관객에게 주목을 받는 성공적인 데뷔를 했다. 이후 토탈 미술관, 베를린의 안도 파인아트, 스케이프 갤러리 등에서 활발히 전시 활동을 했고 2011년 뉴욕문화원 뉴욕-런던 젊은 작가전에 참여했다.

2014년 성북동의 ‘스페이스 캔’ 열린 <미래의 기억, 오래된 집>도 큰 관심을 받은 전시 중 하나다. 작가는 삶의 무늬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전시장의 특성을 최대한 살려 작품과 공간이 서로 스며드는 듯한 전시를 진행했다. 한 평론가는 전시를 보고 나서 “공간이 작품과 상호작용한다. 기계적 상호작용이 아니라 마치 바람결 따라 함께 호흡하는 공간, 관객이 현을 건드리면 곡도 연주되는 살아있는 공명의 공간이다”고 평했다.

2016년 겨울에서 지난해 2월까지 진행되었던 ‘파라다이스 집(ZIP)’ <오래된 외면> 역시 ‘공간의 기억이라는 주제가 전시장이라는 물리적 공간과 자연스레 섞이는’ 전시의 연장 선상이었다. ‘파라다이스 집’은 건축가 송효상이 오랜 시간을 들여 리모델링한 새로운 대안적 집이고 동시에 전시공간이다. 1980년 이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점차 자취를 갖춘 서울의 저층 단독 주택의 구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그의 작품과 제대로 분위기가 맞았다. 작가는 이 공간 안에 어린 시절 살았던 집과 그 구조를 3D모델링해서 변형시킨 이미지들을 투사했다.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은 리얼하면서도 초현실적인 꿈으로 인도하는 매개체역할을 했다. 뉴욕을 기반으로 작업 활동을 해온 작가에게 오래된 집은 어린 시절의 실제 살았던 집들을 연상시키면서도 동시에 어디에도 없는 미지의 장소로서 다가옴을 상징한다.


<오래된 외면> 전시 직후인 2017년 4월, 작가는 ‘두산갤러리 서울’에 이번엔 다섯 개의 기둥을 설치했다. 이 기둥들은 각각 다른 모양과 소리, 빛을 발산하며 주변을 배회하며 관객을 만났다. <기억들의 광장>이라고 붙여진 이 움직이는 기둥들은 “개인의 기억과 사회의 기억이 혼재되어 서로 연결되기도 하고 거리를 두면서 만드는 관계를 나타낸다. 다섯 개의 움직이는 기둥들은 관객에게 놀라움과 흥미로움, 낯섦, 혹은 불편함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관객을 그 기둥들의 관계 속으로 끌어들인다. 결국 기둥의 안과 밖을 오가는 관객은 전시장 안에서 또 하나의 기둥이 된다”는 설정이었다.

그는 한때 무대디자인에 관심이 있었다. 무대 공연을 보기 위해 관객들이 극장에 들어설 때 아직 연기가 시작되기 전 무대의 모습에 매료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극이 시작되는 순간 관객은 공연 일부가 된다. <기억들의 광장>은 움직이는 기둥이 연기자인 한 편의 연극 무대가 아니었을까? 기자는 아쉽게도 직접 홍 범의 전시를 볼 기회가 없었다. 파라다이스 집이나 두산 갤러리에 들어선 관객의 감흥을 그저 이런 식으로 짐작해 뿐이다. 한국이 아닌 뉴욕의 좋은 공간에서 그의 전시를 볼 기회가 오기를 기다린다.


어린 시절, 가족, 그가 살던 집들. 그리고 기억들
작가는 전시할 때마다 늘 같은 질문을 받는다. 왜 그렇게 한국에서 살던 집에 대해서 집요하게 추억하고 그걸 작품으로 만들어내는가? 작가가 ‘집’을 소재로 작업하게 된 건 여러 집을 이사 다니며 살았던 기억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이사를 자주 다녔다. 중곡동에서만 10번 넘게 이사를 했고 잠실로 옮겼고 세곡동에 정착했다.

“어머니가 집을 만들고 리모델링하는 일을 하셨다. 덕분에 온 가족이 함께 이사를 해야 했다. 짓고 있거나 고치고 있던 집에서 살다가 그집이 완성되면 또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하는 식이었다. 어느 날은 지하에서 어느 날은 옥상에서 심지어는 정신병원 옆에서 살기도 했다.”


친구를 사귈 수 없던 그는 당연히 잦은 이사가 불만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가 “우리는 이사 다니는 게 아니고 여행을 다닌 것”이라고 말하는 순간 홍 범의 마음이 바뀌었다. 어머니의 말이 어린 마음에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면서 새로운 공간을 구경하러 다니는 걸 오히려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공간들은 그에게 탐색과 공상의 소재가 되었다.


“중학교 때 처음으로 내 방을 갖게 됐는데 문이 열리면 새로운 공간으로 연결되는 복도가 나타난다든지, 다른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 듯한 망상에 빠질 때가 많았다. 2층 다락방엘 가면 갑자기 공간이 확장되면서 깊은 나락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도 들었다.”


비디오 아트를 시작한 뒤 그는 불현듯 떠오르는 이런 어린 시절의 기억을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어갔다. 또 작품을 만들다 보면 잊혀 있던 다른 기억들도 복원이 되었다. 예를 들어 어린 시절 작가에게 안방은 ‘수많은 기억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오래된 외면> 화면 속, 기둥 사이를 왔다 갔다 움직이는 다섯 개의 기하학적 오브제들은 작가의 가족을 상징한다. 그의 집 안방은 수많은 손님과의 교류가 일어났던 곳이고 그안에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작품 속 오브제들은 그런 내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의 기억과 작품의 주제가 집에만 한정되는것은 아니다. 2011년 뉴욕한국문화원에서 열린 뉴욕-런던 작가 교류전에 선보인 <숨바꼭질 2>는 구리파이프에 걸린 동물과 식물 캐릭터의 모티프들이 회전하며 벽에 컬러플한 이미지를 그린 작품이었다. 그 모티프들은 ‘군대의 악마 같은 고참, 수업시간에 나를 놀렸던 선생, 세발 자전거 타던 모습, 닭장에 들어가던 동생’ 등 그가 수첩에 그렸던 어릴적 추억과 결합한 캐릭터들이다.


즉, 어린 시절 홍 범은 공상을 좋아했고 많은 공간을 이동하며 살았고 그 공간들을 탐색하길 즐겼다. 자신이 살던 나라를 떠나 먼 이역으로 생활의 근거지를 옮기고 뒤늦게 작가의 세계에 뛰어든 이후에 그 기억들은 예술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공간은 작가의 화두가 된 것이다.

그는 비디오 컨텐츠 만큼 설치 부분에 물질적 투자와 시간적 공을 많이들인다. 공간마다 기억이 투영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에게 전시란 ‘낯선 공간이 나의 기억과 교류를 통해 또 다른 나만의 공간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다. 비디오 아트는 회화나 조각 등 다른 미술 장르보다 상업적인 보상의 기회가 더 적은 분야다. 관객들로서도 전시를 직접 대할 기회가 적다. 그의 작업처럼 설치와 연계가 된다면 제작비는 올라가고 상영 공간의 조건은 더 한정된다. 홍 범은 이런 어려움을 알면서도 ‘빛의 움직임’에 매료돼서 비디오 아트를 선택했다. 그리고 감각과 재능보다는 우직함이 예술가의 진정한 덕목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공부한 전공에서 보면 컴퓨터와 디자인이란 재능은 광고와 산업 분야에 있는 디자이너들이 더 뛰어나다. 순수 예술을 하는 작가들의 기술과 재능이 그들을 앞서는 경우가 드물다. 대신 예술가는 뚝심과 고집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한국에서 주로 전시 제의가 오지만 언젠가 뉴욕에서도 제대로 작품을 선보이고 싶다. 중년에 접어든 동양인 아티스트가 뉴욕에서 주류와 경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그저 뚝심 있게 나가려고 한다. 그게 예술가니까”


홍 범
■ 1970년 서울 출생
■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 졸업
■ 밴쿠버 가족 이민
■ 2003년~2005년. 스쿨 오브 비쥬얼 아트(SVA) 컴퓨터
아트 석사. 사진학과 석사(MFA)

개인전
■ 오래된 외면. 파라다이스 ZIP, 서울 (2016-2017)
■ 미래의 기억, 오래된 집. 스페이스 캔, 서울 (2014)
■ Luminous Link, 안도 파인아트. 베르린, 독일(2010)
■ Somewhere in the Mind, The Room,
토탈 미술관, 서울(2009)
■ 잃어버린 숲. 사루비아 다방, 서울 (2007)


글 Won Young Park / 정리 에스카사 편집부